교계/교회

[설교] 초막의 기억

김기석 목사(청파감리교회)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본문: 신16:13-15
(2020/10/11, 창조절 제6주)

["당신들은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에서 소출을 거두어들일 때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켜야 합니다. 당신들은 이 절기에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들과 딸과 남종과 여종과 성 안에서 같이 사는 레위 사람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까지도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켜야 합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모든 소출과 당신들이 손을 댄 모든 일에 복을 주셨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마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청명한 가을날입니다. 우리는 지금 유대력으로 초막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절기節氣의 사전적 정의는 '태양년을 황경(黃經)에 따라 24등분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쉽게 말하면 일 년을 태양력을 기준으로 하여 24등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절기'에서 '절'은 '마디 절'입니다. 그래서 저는 절기를 시간의 마디라고 말합니다. 사실 시간은 일정한 보폭으로 지나갑니다. 이인슈타인이 말한 특수상대성이론이나 일반상대성이론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시간은 급하다고 빠르게 가지도 않고 여유가 있다 하여 늑장을 부리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다리는 마음의 간절함을 가리키는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 시간이 마치 쏜살 같다는 말은 시간은 느리게도 빠르게도 경험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아기들이 경험하는 시간과 노인이 경험하는 시간이 같을 수 없습니다.

시간은 참 무정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시간에 마디 혹은 무늬를 만들어 권태를 이기려 합니다. 기념할만한 날들을 눈금 새기듯 시간 위에 새기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생일, 결혼기념일, 조상들의 추모일, 세례일 등을 기억합니다. 연인들은 만난 날수를 세기도 합니다. 남들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저마다 잊을 수 없는 날들도 있습니다. 지워버리고 싶은 날도 있고, 꼭 붙들고 싶은 날들도 있습니다. 제게도 그런 날이 있습니다. 한 사회도 다양한 날들을 기억합니다. 추석이나 설날 같은 날들도 중요하지만, 우리 민족의 가슴에 새겨진 날들도 있습니다. 3월 1일, 8월 15일 등과 같은 날들입니다. 우리가 사회화 된다는 말은 사회적 기억 혹은 집단적 기억이 우리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우리 가슴에 새겨진 기억의 순간들을 시간의 마디라고 말합니다. 그 마디들이 우리가 권태의 강으로 떠밀려 가지 않도록 든든하게 붙들어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절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삼대 순례절기라고 하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은 권태로울 수도, 지나치게 긴장될 수도 있는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날들이었습니다. 각각 봄, 여름, 가을 추수와 연관된 이 절기들을 창조적으로 기억하면서 그들은 각박한 삶의 조건 속에서 슬기롭게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 절기에 자기들의 역사적 기억을 새겨 넣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의 해방 이야기를, 칠칠절 혹은 오순절에는 시내산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그리고 초막절에는 40년 동안의 광야생활 동안 이끄시고 지키시고 돌보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곤 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희망이 없다지요? 이스라엘은 순례의 명절을 통해 자기의 뿌리를 돌아보는 동시에 민족적 정체성을 재확인하곤 했던 것입니다.

기쁨의 축제

초막절은 장막절 혹은 수장절(收藏節)로 지칭되기도 합니다. 가을 수확을 마친 후에 지금까지 돌보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는 절기입니다. 우리도 옛날부터 가을을 '추원보본追遠報本' 혹은 '보본반시報本反始'의 때라 가르쳤습니다. 조상의 덕을 추모하며 자기의 근본을 돌아보는 때라는 뜻입니다. '근본을 돌아본다', 이게 핵심입니다. 남에게 뒤질세라 앞만 보고 질주하다보면 삶의 지향을 잃어버리기 쉬운 법입니다. 문득 외로움에 사로잡혀 '여긴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 묻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가끔은 멈춰 서서 자기가 가는 방향과 삶의 속도를 가늠해 보아야 제대로 갈 수 있습니다. 헛된 열정에 사로잡혀 시간에 쫓기듯 살다보면 나중에는 공허함이라는 심연 앞에 서게 될지도 모릅니다.

초막절은 돌아보는 절기입니다. 유대력으로 7월의 열흘째 되는 날이 욤 키푸르 곧 대속죄일인데, 그 다음 날부터 유대인들은 자기 집 뒷마당이나 옥상에 수카(sukkah)라는 허름한 초막을 지었습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든 세대가 동참했습니다. 함께 짓는 일을 통해 기억을 몸과 마음에 새기는 절차였던 것입니다. 잔 나뭇가지로 지붕을 만들고 벽은 사과와 석류, 포도, 옥수수, 다양한 종류의 꽃으로 장식했습니다. 초막절 축제에는 시트론, 종려나무, 은 매화나무, 버드나무가 등장했습니다. 그 나무들은 저마다 상징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초막은 물론 광야 생활을 해야 했던 조상들의 신산스러움을 경험하자는 취지였지만, 초막절의 기본 정조는 기쁨과 감사였습니다. 그 기쁨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됩니다. 아들과 딸, 남종과 여종, 레위 사람, 떠돌이, 고아와 과부까지도 즐거워해야 합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풍습입니다만 우리나라 농촌에서도 7월 칠석이나 백중 무렵이 되면 '호미씻이'라는 놀이를 했다고 합니다. 호미씻이를 세서연洗鋤宴이라고도 하는 데 흙 묻은 호미를 씻는 의식입니다. 가장 힘든 세벌 김매기가 끝날 무렵 논의 주인들은 농군들의 수고를 달래기 위해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신나게 놀 수 있도록 했습니다. 풍물패들이 집집마다 풍물을 치며 돌았다고 합니다. 공동체적 축제는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주었습니다. 농사일에 지쳤던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초막절에는 제단에 물을 부어 바치는 의식도 거행했는데 그것을 일러 '씸하트 베이트 하소예바'라고 합니다. '물을 따르는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물은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기에 물을 길어 제단에 바친다는 것은 그 생명의 물을 올해도 제때에 공급해달라는 청원이 아닐까요? 초막절에 물 긷는 의식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너희가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을 것이다"(사12:3)라는 구절을 연상시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날이 도래할 것이라면서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초막절이 되면 성전의 바깥뜰에는 네 개의 금 등잔에 환하게 불이 밝혀졌습니다. 예루살렘 어디에서나 그 불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7장과 8장은 초막절에 벌어진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명절의 마지막 날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7:37b-38)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8:12)

예수님은 초막절을 상징하는 생명의 물과 세상의 빛으로서의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초막절의 기쁨과 참된 뜻은 바야흐로 예수의 삶을 통해 구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토라의 기쁨

초막절 축제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신명기에 보면 모세가 제사장들에게 신신당부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매 칠년째 되는 해는 면제년(쉐미타Shemittah, the year of remission)입니다. 빚을 면제해주는 해라는 뜻입니다. 빚에 몰려 삶의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에게 7년마다 새로운 기회를 주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율법은 가난한 이들의 곤경을 모른 척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냉대하거나 인색한 마음으로 대하지 말아야 하고,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꾸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신15:8). 7년이 지나도 갚지 못하면 면제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하여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세상의 불공정과 불공평을 치유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보더라도 아주 급진적인 정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품고 살 때 그들의 산업에 복을 내리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저는 득실을 따지지 말고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믿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면제년의 초막절이 되면 제사장들은 온 백성 앞에서 율법을 낭독해야 했습니다. 외국인들도 그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낭독하는 것을 '씸하트 토라'라고 하는 데 '토라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축제 기간 중에 그들은 오경을 한 번 다 읽고, 다시 한 번 창세기의 첫 장을 읽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회당에 보관된 토라를 어깨에 메고 거리를 행진하기도 하고, 토라와 함께 노래하며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언약의 백성이라는 기쁨의 표현입니다.

여러 해 전 제가 처음 이스라엘에 갔던 날이 마침 초막절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있던 타바 국경 검문소에서 폭발물로 의심되는 가방이 발견되어 이스라엘 입국이 예정보다 여러 시간 지체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11시가 넘어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긴장 속에 시간을 보냈던 터라 몹시 고단했습니다. 그런데 바깥이 너무 소란스러워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창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함께 모여 원형을 이룬 채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나중에야 그때가 초막절 축제의 끝자락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토라의 기쁨을 그들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야를 잊지 말라

이런 다양한 의식이 거행됨에도 불구하고 초막절 축제의 원뜻은 곤고했던 시기 곧 광야를 떠돌던 때를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 힘겨웠던 시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시절,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었던 그 시간을 돌아보며 삶을 성찰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형편이 나아지면 사람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고,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게 마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삶의 도구를 바꾸는 순간 하나님조차 바꾸는 게 인간이라는 말도 경험에 바탕을 둔 진실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개구리 올챙잇적 생각 못한다'는 옛말도 똑같은 지점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구질구질하던 기억들을 어떻게든 지우려 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억을 말끔히 지우는 순간 우리는 오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보본반시' 할 줄 모르는 사람과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소설가 이승우 선생은 '최사장의 후회'(국민일보, 7월 15일자)라는 신문 컬럼을 다짜고짜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최 사장은 최근 사무실을 줄이고 살던 집을 처분했다. 경기가 좋지 않은 시기에 투자를 무리하게 해서 손해를 보았고,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사기도 당했다고 했다. 여러 가지 외부의 악조건들이 소위 '잘나가던' 최 사장 사업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 이유가 외부가 아니라 자기에게 있었다고 말했다.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일이 너무 잘 풀려나가는 바람에 조심하지 않게 됐다고, 그게 복이 아니라 화였다고 그는 말했다. 우연한 성취를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으로 착각하고 오만방자했노라고 말할 때 그는 진심으로 참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잘나가는 게 복이 아니라 화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최사장은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우연한 성취를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으로 착각'했다는 말을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사장은 "우리의 크거나 작은 성취는 수없이 많은 변수들의 눈에 띄지 않는 합종연횡 결과"임을 실패 이후에야 깨달았습니다. 세상일에는 나의 능력과 상관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승우 선생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때 사람은 오만해지고 긴장하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사회 모든 영역이 이 진실에 눈을 떠야 합니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자칫 하면 빠져들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대형교회를 이룬 것이 자기 능력 때문인 것처럼 생각하는 순간 그의 영적 전락이 시작됩니다. 교회의 크기가 곧 은혜의 크기일 수 없습니다. 커질수록 더 겸허하게 자기를 낮추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큰 교회 목사가 곧 영적으로 맑은 사람 혹은 깊은 사람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십시오. 교인 수와 상관없이 신앙의 신비 속에 깊이 들어간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교회의 희망입니다. 우리도 오만의 강물에 떠밀리지 않으려면 가끔 초막을 지어야 합니다. 뒷마당에는 짓지 못하더라도 우리 가슴에 초막을 짓고 그 속에 가끔 머물러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작은지 자꾸 자각하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머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이들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굳이 초막을 짓지 않더라도 일상의 삶 자체가 고통인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다 해도 먹을 것도 머물 집도 없었지만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걸었던,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광야 공동체를 기억하십시오. 살아있는 한 희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의 믿음이 단단하게 무르익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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