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룻2:1-3
(2020/10/18, 창조절 제7주)
[나오미에게는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엘리멜렉과 집안간으로서,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보아스이다. 어느 날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밭에 나가 볼까 합니다. 혹시 나에게 잘 대하여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따라다니면서 떨어진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대답하였다. "그래, 나가 보아라." 그리하여 룻은 밭으로 나가서, 곡식 거두는 일꾼들을 따라다니며 이삭을 주웠다. 그가 간 곳은 우연히도, 엘리멜렉과 집안간인 보아스의 밭이었다.]
취약해진 사람들
주님의 은총과 위로가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바람이 제법 선선해졌습니다. 늘 목을 보호해야 하는 저는 벌써 목도리를 두르고 지냅니다. 찬바람에 혹시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다소 주춤하는 것처럼 보이던 코로나19가 잦아들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칠 때도 있지만, 최전선에서 맞서 싸우는 의료진들의 노고를 생각하면 지친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추수의 계절입니다. 가을걷이를 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한 때입니다. 다소 상투적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맘 때 떠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룻(Ruth)입니다. 룻은 '우정' 혹은 '친구'라는 뜻입니다. 이름 속에 이미 룻의 운명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룻기는 베들레헴에 닥쳐온 기근 때문에 이방 땅으로 이주해야 했던 한 가족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의 중요 인물들은 대개 떠돌며 살던 이들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그렇고, 다윗도 그랬습니다. 출애굽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떠돌며 산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입니다. 그들은 흉년과 기근, 박해와 차별로 인해 한 곳에 머물 수 없었습니다. 가나안에 대한 약속은 떠도는 이들에게 고향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명기서는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거두는 첫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이렇게 아뢰라고 명합니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신26:5)
떠돎은 고통스럽지만 또한 자기 확장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소설가인 김탁환 선생은 "성장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전제로 한다. 뒷배인 고향과 가족을 떠나야 비로소 온전히 세상과 맞닥뜨릴 수 있다."(김탁환,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해냄, 2020, p.67)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익숙한 것 속에만 머물면 정체상태를 면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떠남입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와야 비로소 창공을 날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낯선 세계에 던져질 때 조금은 주체적이고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의 어려움이야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을 겁니다. 성숙한 부모는 자식을 떠나보내기도 합니다. 물론 살다보면 어쩔 수 없어 떠나야 할 때도 많습니다. 낯선 곳에 간다는 것은 취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울타리 없는 자리에 선다는 말입니다. 그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곳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저기 떠돌아 본 사람이라야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제 룻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불행은 언제나 겹쳐서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근으로 인해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한 엘리멜렉 가정이 겪은 일이 그렇습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지만 운명은 유독 그 가문에 혹독한 것 같습니다. 엘리멜렉은 아내와 두 아들을 남겨두고 그 낯선 땅에서 죽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이름 뜻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아내 나오미는 두 아들 말론(Mahlon)과 기룐(Chilion)을 모압 여인 오르바와 룻과 맺어주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두 아들이 뭐가 급했는지 세상을 훌쩍 등지고 말았습니다. 말론은 질병이라는 뜻이고 기룐은 수척하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룻기를 기록한 이가 그들의 운명에 합당한 이름을 부여한 것 같습니다.
결단의 시간
남겨진 세 여인의 마음을 저는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몇 년 사이에 가장 가까운 이들을 다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에는 아마 수없이 많은 실금이 나있지 않았을까요? 그 실금마다 아픔이 배어들고, 서러운 기억들이 스며들었을 겁니다. 그 실금들이 어느 사이에 버름하게 벌어져 가슴이 무너질 때도 많았을 겁니다. 바람만 스쳐도 눈물이 나고, 햇살이 쨍쨍해도 서러웠을 겁니다. 나오미는 그 신산스런 마음을 가눌 길 없어 그 서러움의 땅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습니다. 문제는 남겨진 두 며느리였습니다. 나오미는 가엾은 두 며느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동족들에게로 돌아가 새 남편을 얻어 행복하게 살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두 며느리는 한사코 나오미와 동행하겠다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안쓰러워 '제발 돌아가라'고 재차 권합니다. 나오미의 강권에 오르바는 울면서 시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룻은 차마 인생의 온갖 쓴 맛을 다 들이킨 나오미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룻1:16-17)
이 강고한 결단을 무지를 수 없었기에 나오미는 룻을 떠나보내지 못합니다. 룻의 결단은 장엄하고 숭고합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가 있습니다.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는 바로 그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의 길을 택한다는 것은 다른 길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가끔 선택한 길이 막히거나 너무 험하다고 느낄 때면, 다른 길을 택해야 했던 게 아닌가 후회하기도 하는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선택이 곧 인생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20세기 회화의 혁명가', '야수파 운동의 주도자', '색채의 마법사', '강력한 원색을 사용해 행복감과 충만함을 표현한 화가'라고 말합니다. 지금 그의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군에 속해 있지만, 20세기 초에 그는 파리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에 르벨이라는 수집상에게 정물화 한 점, 풍경화 한 점을 400프랑에 팔았습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약 500만 원 정도가 됩니다. 그 놀라운 행운에 놀란 마티스는 멍해져서 100 프랑짜리 지폐 한 장을 바닥에 놓고 물러서고, 또 한 장을 놓고 물러서서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 가운데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린 정물화였습니다. 계속 그런 그림을 그리면 상당한 값에 사겠다는 제안이 들어오자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수집상들의 요구에 맞추다 보면 더 이상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는 전통적인 정물화 한 점을 막 완성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그림을 과감히 없애버렸습니다. 나중에 마티스는 <뉴요커 New Yoker>의 파리 특파원이었던 재닛 플래너에게 그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걸 내놓고 싶은 유혹이 들었지만, 만일 그렇게 한다면 내 예술적 죽음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는 돈 욕심을 떨쳐버리고 자기 예술에 집중하게 된 그 때를 회상하며 "나는 그날을 내가 해방된 날로 꼽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메리 매콜리프,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 최애리 옮김, 2020, p.143-4 참고) 돈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그 정물화를 폐기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에게 예술적인 영감과 기쁨을 주는 마티스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고단한 노동의 현장
결단은 순간이지만, 견뎌야 할 생은 무겁기 이를 데 없습니다. 결단이 시적 순간이라면 일상적 삶은 산문과 같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도 가난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베들레헴(Bethlehem)은 '베이쓰 레헴'(Beyth Lechem) 곧 'house of bread'으로 빵집이라는 뜻입니다. 빵집에 빵이 없습니다. 아니, 나오미와 룻에게 빵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룻은 팔자타령이나 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추수하는 들판에 나가 이삭이라도 줍겠다고 말합니다. 고단한 노동의 현장인 그곳에서 일꾼들은 일쑤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비록 동족인 나오미의 며느리라 해도 과부가 된 이방 여인 룻의 등장을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룻은 그 불확실함 속으로, 그 위험 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율법의 가르침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못 박습니다. 사람은 그 땅에 잠시 머물다 가는 거류민일 뿐입니다. 우리가 떠난 후에도 그 땅은 뭇 생명을 받아들이며 존속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소외된 이들의 살 권리를 되찾아주시는 분입니다. 그들이 비록 가난하다 해도 굴욕감을 느끼며 살지 않도록 돌봐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래서 성결법전은 밭에서 추수할 때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둬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떨어진 이삭을 주워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살아갈 방도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 땅에 몸 붙여 살고 있는 외국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그들의 당연한 권리라는 것입니다.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걸 사회주의적 정책이라 하여 반대하는 이들도 있지만, 기본 소득 논의는 건강한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룻은 밭에 나가 이삭을 줍기 시작합니다. 목가적인 광경을 머리에 그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프랑스의 오르세이 미술관에 있는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83.5*111cm)을 잠시 떠올려 보십시오. 밀레는 이 그림을 1857년에 완성합니다. 40대의 왕성한 시기에 그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분위기는 애잔하기만 합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세 여인은 프랑스 사회의 가장 가난한 계층을 대변합니다. 여인들은 추수가 끝난 들판에 엎드려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화면의 좌측 상단에는 수확한 것들을 무겁게 실어 나르는 마차가 보입니다. 두 마리 말이 끄는 큰 마차입니다. 우측 상단 저 멀리 말을 탄 사람이 보입니다. 아마도 밭의 주인일 것입니다. 그는 흰옷을 입은 채 수확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매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옆에는 짚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까마득한 저 하늘 위로는 풍성한 수확을 함께 나누고 싶은 새들이 날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면의 3/4을 차지하는 공간의 주인은 이삭을 줍는 여인들입니다. 그런 배치는 여인들이 하고 있는 일의 존귀함을 나타냅니다. 허리를 깊이 숙인 두 여인을 구분해주는 것은 머리에 쓰고 있는 두건의 색깔입니다. 파란색과 붉은색이 단조로운 풍경에 색채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비록 빈곤하지만 그들이 절망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두 여인의 왼손의 배치 또한 절묘합니다. 한 여인은 이삭을 든 왼손을 등 뒤로 들어 올리고 있고, 다른 여인은 무릎께에 두고 있습니다. 여인들의 손은 투박합니다. 오른쪽에 선 여인은 이제 막 허리를 굽히려 하고 있습니다. 수확물을 담기 위해 엉덩이께에 질끈 동여맨 앞치마는 아직 비어 있습니다. 낯빛이 어두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의 모습은 대지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분홍빛 하늘은 어쩌면 곤고한 노동 속에 깃든 희망이 아닐까요?
우리 시대에 주는 교훈
밀레의 그림에 나오는 그 여인들의 모습 속에서 저는 룻을 봅니다. 이후에 벌어진 일을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 노동의 현장에서 룻은 보아스의 관심을 사게 되고, 보아스의 각별한 돌봄을 받습니다. 나오미의 친족이었던 그는 결국 룻과 결혼함으로써 친족의 의무를 다합니다. 이 둘 사이에 태어난 이가 오벳입니다.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열거하면서 이방 여인 '룻'의 이름을 과감하게 드러냅니다. 룻과 예수님은 족보로도 이어져 있지만 두 분은 삶의 방식으로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의 자유와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친 분들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룻기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부분을 하나를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룻기가 저술된 것은 대략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그 때는 포로생활로부터 벗어난 이스라엘이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해 분투하던 시기입니다. 정체성이란 차이와 구별을 통해 형성됩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대교의 특성들은 대개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에스라가 한 일 가운데는 지금의 우리 윤리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정화를 명분삼아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에게 이혼을 강요했습니다. 소위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순수성에 대한 집착이 일쑤 폭력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에스라의 명령은 당사자들의 고통을 헤아리지 않는 무정한 조치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룻기는 이방 여인을 가장 인간다운 인간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순수성의 폭력을 지적하는 동시에, 낯선 이들에 대한 관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룻기는 그 당시의 시대정신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룻기는 지금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낯선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그들이 살아갈 공간을 허용해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일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려고 하는 것은 대의명분이야 어떠하든 폭력입니다. 룻기는 타자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그 아픔을 지며리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 마음도 그렇게 확장되고, 따뜻하게 무르익어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