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추수감사주일설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하박국 3:17-19a, 골로새서 2:1-17, 누가복음 17:1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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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올해는 코로나 대유행 속에 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상실, 우울, 슬픔, 고독, 고통의 어두운 색깔로 채색된 세상입니다. 이때에도 우리는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이때에도 설교자는 "범사에 감사하라" 설교할 수 있을까요?

올해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신대륙에 건너온 지 4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들의 항해는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코로나 상황보다 훨씬 더 긴박했습니다. 강풍과 눈보라 치는 혹독한 추위, 질병과 식량 부족, 들짐승의 위협, 거할 집 하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절반 가까운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청교도들은 첫 추수를 하고 난 다음에 감사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나올 때부터 감사가 넘쳤습니다. 메이플라워 항해일지에 따르면 그들은 온갖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를 드렸습니다. 플리머스 해변에 도착하던 1620년 12월 26일은 극심한 추위로 얼어붙은 날이었지만 그들은 나무와 바위를 끌어안고 눈물과 환희에 뒤섞인 채 오늘 우리가 교독한 시편 100편으로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렸습니다. 117일간의 긴 항해, 굶주림과 질병의 위협, 동료들의 죽음 가운데서도 그들은 '감사의 신앙'으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청교도들의 '감사의 신앙'의 바탕이 된 구약 하박국 선지자의 이 고백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감사'가 흐르고 있습니다. 성서의 감사는 단순히 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가 아닙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시편 118:28). 시편 118편의 기자에게는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 자체가 감사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편의 기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하자고 노래합니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시편 97:12 / 시편 44:8, 106:47, 30:4). 또 우리가 이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영원히 주께 감사"(시편 79:13)하자고 말합니다. 이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시편 118:21) 감사하자고 노래합니다. 시편의 기자들이 여호와께 감사하는 이유는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시편 100:5, 106:1, 107:1, 118:1, 118:29). 유명한 시편 136편에는 무려 26번이나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후렴구가 나옵니다.

구약성서에는 3가지의 화목제(和睦祭, peace offering, 히브리어 제바흐)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쁨과 행복의 제사가 화목제인데, 첫째는 감사제(感謝祭, thanks offering)로 이미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둘째는 서원제(誓願祭, votive offering)로 앞으로 주실 것을 믿고 미리 드리는 감사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낙헌제(樂獻祭, freewill offering, 자원제)로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감사입니다. 낙헌제는 조건을 뛰어넘는 감사입니다. 처음엔 조건을 바꿔 달라고 기도하지만, 신앙이 깊어지면 조건을 뛰어넘는 감사가 일어납니다. 시편 54편 기자는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시편 54:6)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에 감사하는 이 감사가 성서의 감사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감사의 신앙으로 고난을 이겼습니다. 청교도들도 이 감사의 신앙으로 고난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8)라는 하박국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감사송'이라는 복음성가에 나타난 감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감사, 그래도 감사, 그러나 감사, 그러므로 감사, 그렇지만 감사, 그럼에도 감사, 그러니까 감사, 아주 그냥 감사, 그리 하실지라도 감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이래도 저래도 감사, 매일매일 감사, 항상 감사, 쉬지 말고 감사, 범사에 감사."

이번 학기에 가르치고 있는 한 수업에서 어느 학생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에 제출한 에세이의 한 토막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때 감사 일기를 쓰는 기회가 있어서 한 달 동안 매일 감사한 것 3가지를 일기장에 쓴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숙제로 생각하고 날마다 특별하게 좋았던 일들에 대해서 감사한다고 적곤 했다. 내게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가 왔다거나, 큰 사고가 날 뻔했는데 다행히 무사하고 다치지 않고 건강할 수 있었다거나, 큰 선물을 받았다거나... 이 정도는 되어야 감사 일기에 쓸 만하고, 감사하다고 할 만하다고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이런 거창한 감사의 제목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나 하고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오늘 아침에 내가 눈을 뜬 것부터 감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사실 그 전날 잠이 들어 그대로 죽으면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 새로운 날을 맞이했다는 것부터 내게 감사 제목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감사할 것이 넘친다."

오늘 우리 시대는 이러한 감사의 마음, 감사의 신앙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도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로마서 1:21)고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한 시인도 추수감사절에 이런 마음의 흉년을 읊은 적이 있습니다. "가을 들판 노적가리 짚단에 파묻혀도 / 허기는 사철 때를 맞춰 와서 / 유리하는 탕자로 당신을 떠납니다. / 굶주리며 당신을 은금과 바꿔 / 해마다 흉년 / 어둡고 긴 겨울..."(이향아, <일용할 양식>)

누가복음 17장에는 한센병 환자 열 명이 예수께 고침을 받았으나 그중 오직 한 명만 예수께 돌아와 감사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으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누가 17:17)고 한탄하시며 돌아와 감사한 그 한 사람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누가 17:19)고 선포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다시 말하면 이 한 사람에게만 완전한 치료가 이루어졌습니다.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확약이 주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네 감사가 너를 구원하였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곧 믿음이요, 그 믿음으로 구원이 주어졌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감사'와 '믿음'과 '구원'은 하나입니다.

사실 감사는 깊은 종교적 행위입니다. 사람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 자신이 이루었다 여기는 것에는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살면서 감사라는 말에 인색한 사람들을 종종 보았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들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은 그것들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주어진' 것들이라는 깨달음에서 감사가 우러나옵니다. 시편 50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편 50:14, 23). 인간은 벌거숭이로 세상에 왔다가 벌거숭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자신을 창조하지도 않았고 그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살면서 누리는 것은 모두 '주어진'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의 일부를 신에게 바칩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사의 제사를 통해 겸허히 자신의 유한함을, 자신의 일시성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그 본질이 종교적입니다.

엣 앵글로 색슨 영어에서 "thankful"(감사가 넘치다)이라는 말은 "thinkful"(생각이 깊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깊이 생각하면 감사에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이 생명이, 오늘 이 하루가 당연합니까? 여기까지 나 혼자의 힘으로 왔습니까? 내가 누리는 것들이 다 나의 성취입니까? 아마도 인간의 품위를 가장 떨어뜨리는 것은 감사를 모르는 태도일 것입니다. 동물도 고마움을 알고 표현합니다. 예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한 그 사마리아인 한센병 환자의 이야기가 말해주는 진리는 감사가 우리를 구원하며 인간을 더 높고 품위 있는 존재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고침을 받고 그냥 제 길로 간 그 아홉 중 하나입니까? 아니면 돌아와 감사함으로 구원의 축복까지 받은 그 한 사람입니까?

박인걸의 기도시 <주님 감사합니다>를 읽어봅니다. "한 쌍의 비둘기처럼 / 오래된 둥지에서 아내와 함께 / 오순도순 살아온 날을 감사합니다. // 뒷바라지 힘들어도 / 현관에 뒹구는 자식들 신발을 보면 / 마음으로 기댈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 아침마다 깨어날 때면 / 아직도 내 심장이 뛰고 있고 /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 서로 아껴주는 /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이웃들과 / 언제나 함께 있어 감사합니다. // 햇곡 밥을 지어 / 푸성귀 반찬을 얹어 먹을 때마다 / 풍성한 양식에 감사드립니다. //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 주님의 목숨과 나를 맞바꾸어 / 영원한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자인 바울은 그래서 입만 열면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의 신학은 한마디로 '감사의 신학'입니다. 그는 먼저 기도할 때에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4-7). 그는 또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에베소서 5:1-3). 아니 바울은 사람 자체가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로새서 3:15-17).

그런데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도 감사의 에너지가 고갈된 것을 느낍니다. 감사는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할 텐데, 감사가 넘친 바울의 신앙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골로새서 2장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로새서 2:6-7)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주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네 가지 권면이 모두 수동태로 되어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원문을 직역하면 주 안에 '뿌리를 박히고,' '세워지고,' '믿음에 굳게 섬을 받아,' '감사함이 넘치게 되게 하라'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더욱 특이한 점은 이 네 가지 중에서 맨 첫 번째 '뿌리를 박히다'만이 완료형 시제로 되어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이미 '뿌리가 박혀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결과로 우리의 믿음이 나무처럼 '세워지고,' '굳게 섬을 받고,' 마치 나무에 꽃과 열매가 열리는 것처럼 '감사함이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초목의 아름다움에만 감탄하며, 그 풀과 나무의 생명을 지탱하는 뿌리의 고마움을 잊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삶의 토대가 되어주는 것, 보이지 않지만 나를 나로 있게 한 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총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의 토대가 되어주는 노동을 우리는 '그림자 노동'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와 농부와 노동자들의 노동이 없다면 우리는 여기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매일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헌신과 수고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내 삶의 가지에 맺힌 꽃과 열매에 대한 찬가만이 아니라 그 꽃과 열매를 맺게 한 뿌리에 찬가를 보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께만이 아니고, 고마운 사람을 떠올려 보시고 고맙다고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해보십시오.

마지막으로 감사는 나눔으로 완성됩니다.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린도전서 15:10)이라 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족[하다]"(고린도후서 12:9)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신학은 '은혜의 신학'입니다. 그렇게 선물처럼 받은 은혜이기에 바울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나누라고 권면합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바울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로마서 12:12-13)고 말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가정에는 양초와 담요 그리고 마른 빵 세 가지가 항상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도움을 요청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그네가 문을 두드리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양초가 필요했고, 그가 굶주렸을 테니 신속히 마른 빵을 준비했다가 제공해야 했고, 그가 잠을 잘 때 덮을 수 있도록 담요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초기 모든 기독교 가정의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철저히 바울의 은혜의 신학과 감사의 신앙을 나눔과 환대로 실천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신앙의 힘으로 모진 박해 속에서도 서구 문명의 중심 신앙으로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라].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디모데전서 6:11, 17-19). 나눔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신약성서의 히브리서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브리서 13:15-16).

<가난한 부자>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작가 미상의 글인데, 해외에 거주하는 서광선 목사님의 지인이 보내준 글입니다. "굉장한 부잣집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들이 어찌 사는가를 보여주려고, 어린 자녀를 데리고 시골로 갔다. 둘이서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의 농장에서 2~3일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다. '어때 재미있었니?' '네, 아주 좋았어요.' '그래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알았어?' '네, 아빠!!' 아버지가 묻기를 '그래 무얼 배웠느냐?' 아들이 대답하기를, '우린 개가 한 마리뿐인데, 그 사람들은 네 마리더라고요. 우린 수영장이 마당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끝없는 개울이 쫙 놓여 있더라고요. 우리 정원에는 수입 전등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밤에 별이 총총히 빛을 내더라고요. 우리 패티오(patio)는 앞마당에만 있는데 그 사람들은 지평선처럼 끝이 없더라고요. 우리는 작은 정원에서 사는데 그 사람들은 넓은 들과 함께 있더라고요. 우린 하인이 우리를 도와주는데 그 사람들은 남들을 도와주더라고요. 우린 음식을 사서 먹는데 그 사람들은 직접 길러 먹더라고요. 우리 집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사람들은 친구들에게 싸여 있더라고요.' 아버지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들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아빠, 고마워,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가를 알게 해주어서...'" 여러분은 가난하십니까, 풍요로우십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태 6:25-34 중에서).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감사의 신앙'이 위기 극복의 열쇠입니다. 우리는 상실과 우울과 슬픔과 고독과 고통의 이 코로나 대유행 시대에서도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노래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117일간의 긴 항해, 굶주림과 질병의 위협, 동료들의 죽음 가운데서도 시편 100편을 부른, 400년 전 청교도들의 그 감사의 찬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찬양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하십시오. 겸손한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그 감사의 예배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웃과 나누는 감사의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그 나눔의 제사가 우리를 구원하고 세상을 치유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잃어버린 그 아홉이 되지 말고 돌아와 감사함으로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주님의 축복을 받는 그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곧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그 감사의 신앙이 오늘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202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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