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세기 3:17-19, 히브리서 2:14-18, 요한복음 5:24 -
"꽃이 질 때 / 노을이 질 때 / 사람의 목숨이 질 때 // 우리는 깊은 슬픔 중에도 /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 지혜를 배우고 / 이웃을 용서하는 / 겸손을 배우네 // 노래부를 수 없고 / 웃을 수 없는 침묵 속에서 / 처음으로 진지하게 / 기도를 배우고 / 자신의 모습을 깊이 들여다보는 / 진실을 배우네 // 모든 것이 사라지는 / 고요하고 고요한 찰나에 / 더디 깨우치는 / 아름다운 우매함이여."
이해인 님의 시 <사라지는 침묵 속에서>입니다. 오늘은 영원주일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 사랑하는 이들을 기억하며, 시인의 말처럼 슬픔 중에 삶을 이해하고, 침묵 속에 자신의 모습을 깊이 들여다보는 날입니다. 우리 역시 죽음 앞에서 평등한 존재라는 깨달음은 왜 이리 "모든 것이 사라지는 고유하고 고요한 찰나에"나 뒤늦게 찾아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음 앞에 서야 비로소 생명이 보입니다.
개신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의례(儀禮)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개신교인 중에는 장례식이나 그 이후에 고인을 떠올리며 우는 사람을 훈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국에 가셨는데 왜 우냐'며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바라보기도 합니다. 물론 죽음은 천국 문을 통과하는 일이지만, 남은 자의 아픔과 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상실(喪失)을 충분히 애도(哀悼)할 수 있게 지켜줘야 합니다. 정진홍 선생님이 쓴 『죽음과의 대화』는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사모곡처럼 쓴 책인데 누군가의 원거리 죽음이 아니라 지근거리의 죽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절절한지 느끼게 해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낭만일 수 없고 철학으로 이야기될 수 없는 비탄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죽음으로 이별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돌보는 것입니다. 슬픔이 충분히 표현되도록 옆을 지키는 것입니다. 슬픔은 표현될 때 치유됩니다.
우리는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갑니다. 떠날 때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잊혀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떠나야 할 사람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잊어야 할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때로 내 눈에서도 / 소금물이 나온다 / 아마도 내 눈 속에는 / 바다가 한 채씩 살고 있나 보오." 나태주 시인의 <그리움>입니다. 앞서 떠나간 사람들을 잊지 못해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오늘도 우리 눈에서는 진한 소금물이 나옵니다. 내 눈 속에도 바다가 한 채 들어있나 봅니다.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작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벗을 위한 레퀴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연습할 것은 하나뿐, 서로를 놓아주는 것이다. 서로를 붙잡는 것은 쉬운 일이라, 굳이 배울 필요가 없으니." 이별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고 누군가를 온전히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스스로 미워하지 않고 사랑을 간직한 채 그 사람을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비록 생살을 찢는 것만 같은 이별의 아픔이지만,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랑하고, 그 아픈 사랑을 간직한 채 그 사람을 영원히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이별마저 사랑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온 힘을 다해 사랑했기에,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놓아줄 수도 있습니다.
성서는,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성찰처럼, 죽음에 관한 한,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의 입장입니다. 성서는 '영혼 불멸'과 같은 추상적인 언어로 죽음이라는 인생의 엄혹한 진실을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태평스러운 위로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교독문인 시편 90편은 죽음과 삶에 대해 가장 깊은 성서의 견해를 대변하는 시입니다. 한 절 한 절 곱씹어볼 가치가 있는 시편입니다. 시편 90편은 매우 비관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마치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인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셨던 말씀을 되풀이하는 것 같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9).
놀랍게도 이 시편은 찬양의 노래로 시작합니다.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1절). 시인은 인생의 무상함을 묘사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찬양합니다. 그는 땅을 보기 전에 먼저 하늘을 봅니다. 밑을 보기 전에 위를 봅니다. 인간의 불행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하나님의 위엄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먼저 무한(無限)을 보고 나서야 유한(有限)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永遠)을 바라보아야 찰나(刹那)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인간의 유한성과 불행 그리고 비극에 대해 직접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공적이지 못합니다. 인간의 일시성을 가장 또렷이 보여주는 거울은 하나님의 영원성입니다.
시인은 2절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선명한 언어로 표현합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세상에서 움직일 수 없는 것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산인데, 산들조차 태어나고 죽습니다. 그러나 산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은 산들이 죽은 후에도 계실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시편 기자는 이제 인간을 내려다봅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3절). 이제 보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티끌과 같다는 것이 잘 보입니다. 우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법칙에서 아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운명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운명입니다. 최근 노화와 유전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자라 불리는 하버드 의대의 데이비드 싱클레어 박사는 『노화의 종말』(Lifespan: Why We Age - And Why We Don't Have To)이라는 책에서 이제 노화(老化)는 치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하는 질병 - 가장 흔한 질병 - 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인류는 질병과 장애 없이 살아가는 '건강수명' 기간을 점차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화'의 종말을 말했지 아직 '죽음'의 종말을 이야기하진 못했습니다.
시편 90편의 기자는 인생의 짧음을 깊이 한탄합니다.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4-6, 10절). 이 시편이 쓰인 오래 전에 칠십과 팔십은 자랑이었으나 사실 많은 이들은 이 나이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 나이는 젊은이들에게 아직은 상상하기 어려운 나이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나이에 이른 사람들에게는 그 시간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치 새처럼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돌연히 시편 90편의 기자는 인생의 무상함을 한탄하면서 그것이 인간의 죄책과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7-9, 11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간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여기에 인간의 죽음에 대한 성서의 독특한 견해가 나타납니다. 인간은 단지 자연법(自然法)에만 묶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는 건 당연합니다. 그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존재에도 적용되는 자연법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단지 이 법에만 묶인 존재가 아니라는 게 성서의 견해입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죄책 때문에 죽어야 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창세기 3:19)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단순한 자연법의 제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 죄책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현대인에게 매우 낯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일방적이거나 자의적으로 행동하는 격노한 폭군으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그런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인간의 죄책에 대한 응답입니다. 선악과 앞에서 뱀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세기 3:5)라고 말하며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는 것,' 그것이 최초의 인간이 저지른 원죄(原罪)입니다. 그 결과 땅은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창세기 3:17-18) 내며 인간은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고...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창세기 3:17. 19) 수 있게 되었다고 성서가 말합니다. 전도서에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도서 2:22-23)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이 한탄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시편 90편의 기자는 비관과 염세주의로 자신의 시를 끝내지 않습니다.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하는 시를 밝은 희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마무리합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12절 - 새번역)라며 지혜를 간구한 다음 시인은 희망을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13-17절). 이전에 없던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삶은 영원 안에 있지 않고 인생은 무상하지만,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기도, 미래에 있을 행복과 기쁨에 대한 기대, 하나님의 임재,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의 성공을 위한 간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단지 '영원한 하나님'에 불과하신 분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그분이 또한 '미래의 하나님'으로 바라봅니다. 그분은 단지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 안에만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시간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죄책을 짊어지고 새로운 생명의 미래를 여시는 분입니다. 시편 90편 기자의 소망은 오늘의 신약서신 말씀에서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서 2장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창시자"(10절)라고 말하며 그분이 어떤 일을 이루셨는지 이렇게 전합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그가]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브리서 2:14-18).
'영원하신 분'(the Eternal)이 시간 안으로 들어와 죽음의 살과 피를 입으시고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멸하시고 죽음이 두려워 한평생 죽음의 권세에 노예로 살던 모든 사람을 해방하셨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사슬은 깨집니다. 죄에서 진노로 돌아가는 악순환의 고리도 깨집니다. 우리의 죄책에 대한 은혜의 용서가 이루어지고 죽음의 권력에 대한 승리가 선포됩니다. 이것이 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은 마지막 나팔소리가 날 때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다시 일어나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선언하면서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라고 힘찬 승리의 개선가를 불렀던 이유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은 죽음 속에서 잠을 자며 그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나아간다. 잠은 자는 이가 어떻게 밤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아침에 편안히 깨어나는 것처럼 그는 다시 깨어날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깊고 달콤한 수면으로 간주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무덤은 부드러운 침대이다." 예수께서도 한 관리가 찾아와 자기의 딸이 죽었다며 살려주시기를 간청할 때 그 아이가 "잔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마태복음 9:24, 마가복음 5:39, 누가복음 8:52). 잔다는 건 깨어날 아침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이들"에게는 부활의 새 아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우리 모두 부활의 열매가 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23).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생명의 한 완결, 혹은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길든 짧든 하나의 문장 끝에 놓이는 작고 동그란 마침표와 같습니다. 마침표는 한 문장의 끝을 알리기도 하지만 또 다른 문장이 시작됨을 알리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단절의 표시가 아니라 연결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종말로 보지 않고 새로운 시작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요한복음 5:24).
카푸치노(Cappuccino)를 좋아하시는지요? 카푸치노란 에스프레소 위에 우유 거품을 얹은 커피를 말합니다. 카페라테와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카푸치노는 카페라테보다 우유의 양이 적고 그 공간을 거품이 채워 맛이 더욱 진합니다. 그런데 카푸치노의 어원을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카푸치노'는 프란체스코의 '카푸친'(Capuchin) 수도사들이 쓰고 다니는 두건(頭巾, 모자)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카푸친 수도회는 성 프란치스코가 설립한 '작은형제회'의 한 분파인데, 이들은 청빈의 상징으로 두건이 달린 원피스 모양의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진한 갈색 커피 위에 우유 거품을 얹은 모습과 비슷해 카푸치노라는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카푸친 수도원의 본원은 로마의 바르베리니 역 근처에 있습니다. 겉모습은 평범한데 안으로 들어가면 놀라운 모습의 지하 납골당이 있습니다. 그곳엔 1599년부터 1920년대까지 살다 죽은 카푸친 수도사들의 유골 4,000여 구를 가지고 정교하게 장식한 공간이 펼쳐집니다. 여기엔 십자가도, 전등도, 탁자도,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해골입니다. 그 해골들이 방문자들에게 이렇게 말을 겁니다. "우리도 당신과 같았다. 머지않아 당신은 우리와 같아질 것이다." 카푸친 수도사들이 나누는 인사말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입니다 즉 '당신의 죽음을 기억하라'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박해시절에 나누었던 바로 그 인사말입니다. 지금 한국 사회가 오만과 탐욕과 폭력의 사회로 변한 것은 죽음의 철학을 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묵상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오후에는 카푸치노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자기의 죽음을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메멘토 모리,' 즉 나의 죽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 좋겠습니다. 정연복 님의 <오늘을 위한 기도>입니다.
"오늘을 마치 / 내 생애 최초의 날같이 / 싱그러운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 오늘이 어쩌면 / 내 생애 마지막 날인 듯 / 애틋한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 오늘 하루의 매 순간을 /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며 / 알뜰한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교우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사랑하며 살기에도 너무 짧습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환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정직하게, 가진 것을 나누며, 서로 용서하며, 그리고 사랑만 하며 살겠다고 말합니다. 삶은 길이가 아니라 질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예외 없이 모두 평등한 존재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지금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외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죽음은 말합니다. 지금 당장 사랑하며 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성공과 성취를 위해 들이는 시간의 10분의 1만이라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데 사용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졌을 겁니다.
홍수희 시인의 <오늘을 위한 기도>입니다. "나로 하여 / 오늘을 살게 하소서 / 내일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내일이 오면 / 또 그 내일이 온다는 / 안일함으로 // 오늘 내게 주어진 / 소중한 작은 것들을 / 부디 잃지 않게 하소서 // 더러는 /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더라도 / 나보다는 너의 편에서 / 이해할 수 있는 여유를 // 더러는 / 우쭐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도 / 칭찬은 너에게로 / 돌릴 수 있는 따스한 용기를 // 날카로운 시선에는 / 오히려 부드러움을 / 미움에는 오히려 / 베푸는 향기를 // 나로 하여 / 오늘을 그렇게 살게 하소서 / 내일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지나고 나면 다시는 / 오지 않을 오늘이라면 / 지금 이 시간 사랑으로 /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다. 그리고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겠지만,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제임스 C. 헌터의 『서번트 리더십』 중에서). 그렇습니다. 울면서 태어나 웃으면서 가는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축복과 웃음 속에 태어나 다른 사람들의 비통과 눈물 속에 떠나는 사람이 성공한 삶을 산 것입니다. 사랑으로 절박한 삶, 그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이해인, <가을 노래>)처럼, 하늘은 높아가고 가을은 깊어갑니다. 시인의 시어(詩語)처럼, "영원을 향한 그리움이 어느새 감기 기운처럼 스며드는 가을"입니다.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은 시인의 말처럼 "남은 시간 아껴 쓰며 언젠가 떠날 채비를 서서히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새해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간 이들을 영원한 안식과 평화 속에 고이 품으시고, 또 온 힘을 다해 사랑했기에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놓아주며 오늘 하루 선물로 주신 내 삶의 자리에서 다시 힘을 내어 사랑하며 살기를 다짐하는 교우 여러분에게도 위로와 평화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이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이 (시편 92:1)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