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눅22:66-71
(2020/11/22, 창조절 제12주)
[날이 밝으니, 백성의 장로회, 곧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들의 공의회로 끌고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말하더라도, 여러분은 믿지 않을 것이요, 내가 물어보아도, 여러분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이제부터 인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게 될 것이오." 그러자 모두가 말하였다. "그러면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라고 여러분이 말하고 있소." 그러자 그들은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언이 더 필요하겠소? 우리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직접 들었으니 말이오."]
올리움과 낮춤의 통일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이 24절기로 소설小雪입니다. 첫 눈이 오는 때라는 말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농부들은 무와 배추를 수확하여 김장을 하고, 방고래에 쌓인 구들미(탄 흙이나 재)를 긁어내 불길이 잘 통하게 하고, 비바람에 속이 드러난 벽에 흙을 바르고, 창호문을 개비改備하고, 쥐구멍도 막고, 외양간에 거적을 쳐서 짐승들을 보살피고, 땔나무를 준비했습니다. 30여년 전만 해도 교인들은 '시탄헌금'이란 것을 했습니다. 젊은 세대에게는 시탄柴炭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할 겁니다. 땔나무 혹은 '섶'(자잘한 나무를 이르는 말)과 석탄을 합친 말로 겨울을 날 연료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이런 풍경들이 기억의 저편으로 다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교회력으로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다음 주부터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오순절, 창조절로 이어져온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라는 고백으로 수렴됩니다. 왕이신 주님은 모든 이들 위에 계신 분이지만,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오신 분이십니다. 빌립보서의 고백처럼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2:6-7a) 가장 높으신 주님은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분이십니다. 높아짐과 낮아짐의 통일 속에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올리브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관원들에게 체포된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심문을 받고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지키는 사람들은 예수를 때리면서 갖은 말로 모욕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린 채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추어 보아라"(눅22:64)라고 놀렸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분노와 아울러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예수님을 때린 이들은 대제사장의 집을 지키는 경비원들이거나 종들이었을 겁니다. 그들도 남들에게 천대받고 모욕을 당해도 참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자기들에게 주어지자 그들은 자기들 속에 숨어 있던 폭력성과 악마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노출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울분을 풀어놓고 싶은 대상을 만났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다를까요? 가장 친한 친구의 불행 속에는 기분 나쁘지 않은 뭔가가 있다지 않습니까? 물론 이것은 미성숙한 영혼의 특색이지만, 사람은 세월이 간다고 하여 꼭 성숙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강자들과 합일화하면서 유독 약자들에게 폭력적인 이들을 보면 속상합니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들에게 유난히 포악을 떨었던 것이 조선인 고등계 형사들이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자기 속에 있는 자책감과 두려움이 역으로 표현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함으로 그 경비원들이 얻는 것이 있었을까요? 강자들의 눈에 들었을까요? 그런 행위를 통해 오히려 주인에게 더욱 예속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어떤 반응을 기대했던 것일까요? 왜 때리냐고 대들거나, 뭔가 이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렸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폭력에 일체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약함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굴욕을 당하며 살아온 그들 속에 깃든 어둠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악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연약함과 어두운 상처까지도 보듬어 안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왕이라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을 일컫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무나 무력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혼의 빈곤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위대한 영혼의 힘을 보여주십니다. 폭력 앞에 무너진 영혼, 분노로 이글거리는 영혼이 아니라 폭력의 종이 된 이들의 마음조차 무력화시키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광채를 봅니다.
조롱당하는 그리스도
그림 한 점을 함께 보실까요?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라는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조롱 당하는 그리스도'입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사였던 그는 성품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본명은 귀도 디 피에트로(Guido di Pietro)인데 사람들은 그를 '천사같은 수도사'라 하여 프라 안젤리코라고 불렀습니다. 이 그림은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있는 수사들의 방에 그린 그림입니다. 프라 안젤리코는 작은 공간에 예수님의 수난 내러티브를 가급적이면 많이 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고심 끝에 그는 특정한 상황을 재현하여 보여주기보다는 일련의 도상학적 상징들을 활용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연단 위에는 예수님이 진홍색 의자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보혈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새하얀 튜닉과 겉옷을 입은 그리스도의 눈은 가리워 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져 있지만 그렇게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후광이 사람들의 눈길을 끕니다. 그리스도가 입고 있는 새하얀 튜닉은 바닥의 흰 석판과 조응하여 주님의 영광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앉아계신 뒷편 벽은 베이지색 톤인데, 그 가운데 에메랄드 빛 대리석이 마치 포인트 벽지처럼 우뚝 서 있습니다. 얼핏 보면 영화 스크린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장면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프라 안젤리코는 가야바의 집과 빌라도의 법정에서 주님이 당하신 모욕과 수치의 순간들을 한 화면에 다 담아내고 있습니다. 모자를 쓴 군인 한 사람이 예수님께 침을 뱉고 있습니다.
침을 뱉는 이의 모습을 제외하고는 예수를 조롱하는 이들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다만 손만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뺨을 치는 손,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때리는 손, 으쓱 하며 조롱하는 손입니다. 수사학적으로 말하면 사물의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일종의 제유법(提喩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예수를 지키는 이들은 예수의 눈을 가린 후 그의 머리를 때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눅22:64). 사람의 사람됨은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데 있건만,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극명하게 갈리는 순간 사람들은 강자와 자기를 합일화함으로 안전을 확보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을 의사도 능력도 없는 사람을 마음껏 조롱하는 것처럼 비인간적인 일이 또 있을까요?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손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쉽게 군병들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손만 드러난 그의 그림은 예수님을 모욕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무죄한 이들을 혐오하고 모욕을 안겨주고 조롱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은 무력한 이들이 감내해야 했던 슬픔과 아픔을 온몸으로 겪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영혼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그림을 볼까요? 예수의 오른손에 들린 갈대는 군인들이 조롱하기 위해 쥐어준 것이지만 왕홀처럼 보이는 것은 그 위엄 때문일 것입니다. 왼손에 들린 커다란 구슬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세상입니다. 수난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신적인 위엄을 잃지 않고 세상의 구원자로 고요히 좌정하여 계십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 사도가 주는 통찰이 있습니다.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벧전2:22-23)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살다보면 가끔은 하나님의 현존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믿음의 사람이라 해도 다 겪는 일입니다. 마더 테레사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머물 때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기에 그분이 맡기신 일을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그것이 어둠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문현답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날이 밝자 백성의 장로회, 곧 대제사장들과 율밥학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공의회로 끌고 갔습니다. 또 다시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대가 그리스도이면, 그렇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시오." 수많은 이적을 보고도 주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주님이 '그렇다'고 말하면 믿어주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말이 부질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의 질문에 응대하십니다. "내가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말하더라도, 여러분은 믿지 않을 것이요, 내가 물어보아도, 여러분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이제부터 인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게 될 것이오."
말해도 알아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주님은 해야 할 말씀을 하십니다.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말입니다. 논쟁을 통해 진리가 드러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논쟁은 두 성격의 대립일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말을 하지 않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주님은 그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장은 깨닫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과 태도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역사할 겁니다. 칼을 들고 있는 상대에게 비무장상태로 그냥 다가서는 사람의 모습 자체가 낯섭니다. 이 비폭력적인 태도는 누가 참 자유인인가를 드러냅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운명이었습니다.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그들은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오?" 하고 묻습니다. "내가 그라고 여러분이 말하고 있소." 이 대답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렇다는 긍정적인 답입니까, 아니면 당신들이 그렇게 말할 뿐이라는 말입니까? 가타부타 말한다고 하여 그들이 '아, 그렇군요'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주님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공의회는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을 참칭했다며 심문을 종결합니다. 참 편리한 셈법입니다.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낮아짐으로 가장 높이 들리는 하나님의 셈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굴욕을 당하는 분이 곧 세상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깊이 잠겨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넘어지기도 하고, 죄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갈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가뿐하게 받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정하게 굴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 때도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상처를 애긍의 마음으로 감싸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왕이시라고, 예수님이 우리 왕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올리우심과 낮아지심이 한 호흡 속에 있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처럼 낮은 자리에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