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130:1-8, 로마서 12:-13, 누가복음 3:1-6 -
그리스도교는 '신앙의 절기'를 지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두 절기는 '사순절'(四旬節, Lent)과 '대림절'(待臨節, Advent)입니다.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며 부활을 기다리는 절기이고, 대림절은 생명의 빛으로 오시는 구세주의 탄생, 곧 성탄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기다림을 빼놓고선 신앙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회는 기다림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기다림의 언어와 예전은 남았으나 간절한 기다림은 사라졌습니다. 로마의 극심한 박해를 받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마라타나'였습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그리고 현세에 안주하면서부터 서서히 기다림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는 어쩌면 '기다림의 약화'의 역사로 기록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헨리 나우엔의 글입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가 아니라 그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주님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올해, 오늘,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우리는 주님을 기다린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와 차이나는 점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아 나가는 게 종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옵니다. 제1 이사야는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이사야 35:4) 했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제2 이사야는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사야 40:10)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신과 진리를 향한 인간의 탐구 생활이 아니라 인간의 비루한 삶의 자리로, 한 찬송가(304장)의 가사처럼,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우리를 구하러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오심'과 '임하심'을 선포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대림절은 영어로 "Advent"라고 합니다. '출현,' '도래,' '등장'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것이 "adventus"입니다. 우리가 미래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가 현재를 향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dventus"는 희망의 도래(到來)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안으로 뚫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희망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 안으로 밀고 들어오십니다. 예수께서도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마태복음 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침노(侵擄, forcefully advancing)란 '법이나 도리에 어긋나게 쳐들어감'을 뜻합니다. 그렇게 강하게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한가운데로 임하십니다.
집에 반가운 손님이 들이닥치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일어나 옷을 고치고 자리를 내어드리고 차를 내옵니다.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도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하심을 간절히 희망하는 자는 주어진 현실에 그냥 머물지 않습니다. 대림절의 희망은 동적(動的)입니다. 그 희망은 정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동적인 기다림입니다. 역사를 뚫고 들어오시는("침노하는")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나를 그 나라의 참여자로 부릅니다. 단지 그 나라의 상속자가 아니라 그 나라를 가꾸는 정원지기로 부릅니다. 이해인 님의 대림절을 묵상하는 시가 이 희망의 변증법을 정확히 짚었습니다다.
"월동준비와 더불어 / 싱싱한 배추포기 속에 살아오는 / 기다림의 계절에 /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 주님의 목소리 / "깨어 있어라" // 1년 내내 먼지 낀 / 마음의 창을 닦으며 / 오늘도 주님 앞엔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 다른 이를 위한 사랑의 일엔 / 늘 졸기만 하고 / 자신을 위한 일에만 / 한껏 깨어 산 것 같은 죄책감을 /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 유익한 일보다 / 쓸데없는 일로 / 더 바쁘게 살아온 지난날들이 / 너무 크게 보임을 / 어찌해야 할까요 // 살아 있는 동안 / 우리가 늘 같은 잘못을 / 되풀이해도 / 다시 한번 / 시작할 기회를 주시는 / 자비의 주님 // 이젠 우리가 먼저 / 당신을 사랑할 때입니다 // 눈물도 꽃으로 피워내는 /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 이젠 우리가 / 당신께 가야 할 때입니다 // 등불을 밝히는 / 가장 따스하고 부드러운 / 그 음성으로 / 다시 말씀해주십시오 / "늘 준비하고 있어라" // 네, 이젠 우리가 / 기다리는 마음에 / 더욱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 주님의 산을 향해 / 오르게 하십시오 / 산에서 복음을 전하는 / 빛의 자녀이게 하십시오."(이해인, <이제는 우리가 먼저 - 대림절>)
주님의 오심이 "다시 한번 시작할 기회"임을 깨달은 시인은 "이젠... 기다리는 마음에 더욱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주님의 산을 향해 오르"겠다고 합니다. 기다림은 적극적인 행동이 됩니다. 오시는 하나님 나라의 마중물이 되어 주님의 산에 올라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어떤 소식입니까? 이사야 예언자가 처음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이사야 40:9-11).
이사야는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면서 우리가 주 여호와의 오심을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이사야 40:3). 광야는 생명의 힘이 스러지는 공간입니다. 사막은 생명이 이미 바짝 말라버린 불모의 땅입니다. 오늘 우리 삶의 자리가 바로 광야와 사막입니다. 거기에서 이사야는 우리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광야에서의 이 외침을 이어받은 사람이 신약성서의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실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오심을 준비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를 건너뛰어 바로 성탄절로 갈 수 없습니다. 네 복음서 모두 세례요한을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인 누가복음 3장은 조금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할 때 세례요한에 대한 보도 중 누가복음의 차이점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3장 1~2절입니다. 여기에서 누가는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활동할 즈음의 시대적 맥락을 매우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내용입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누가 3:1-2). 디베료는 티베리우스(Tiberius)입니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후계자였으며 따라서 로마의 두 번째 황제입니다. 분봉왕(分封王)이란 '4분의 1의 통치자'(governor of a fourth part)라는 의미입니다. 로마는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 갈릴리, 이두래와 드라고닛, 그리고 아빌레네의 네 지역으로 분할시켜 각각 본디오 빌라도, 헤롯 안티파스, 헤롯 빌립, 루사니아가 통치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세계정세와 팔레스타인의 정세를 자세히 다루고 난 후에 누가는 종교로 눈을 돌려 요한이 출현할 때 대제사장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한 시기에 두 명의 대제사장이 재직하고 있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누가가 두 사람의 이름을 함께 기록하는 이유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으만 그의 장인인 안나스가 여전히 막후에서 실권자로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이렇게 세례요한의 활동 배경을 넓은 정치적, 종교적 맥락 속에 위치시킨 까닭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단지 유대인뿐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누가의 특이한 점은 네 복음서 저자 모두 세례요한의 활동을 이사야 40장 3절의 말씀("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과 연결하고 있지만, 누가만이 이사야 40장 3절을 넘어 4~5절까지 확장하여 인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4절에서는 높은 것(산과 언덕)이 낮아지고 낮은 것(골짜기)이 높아지는 '역전'(逆轉) 현상이 일어나 평탄한 여호와의 길이 준비됩니다. 깊은 골짜기가 돋우어지고 높은 산이 낮아진다는 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높아지고 부와 권세를 누리던 사람들이 낮아진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5절, 즉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생명이 억압과 분열에서 벗어나 평등하고 조화로울 때 드러나며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누가의 특이한 점은 세례요한이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는 건 같으나 누가만이 무엇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지 매우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큰소리로 꾸짖으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합니다(3:7-8). 그러자 무리가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으니 요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또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물으니, 요한은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라고 대답합니다. 이어 군인들도 와서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하고 물으니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누가 3:10-14)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누가에만 나옵니다.
무엇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까? 무리, 세리, 군인 등 대화 상대는 다르지만 세 그룹의 사람들에게 답한 세례요한의 말에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곧 재물에 대한 태도입니다. 한마디로 재물에 대한 욕심에 이끌려 불의한 일을 저지르지 말고, 자기의 재물을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것입니다. 사실 누가는 재물의 사용이나 재물에 대한 태도가 신앙과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신앙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통로라고 누구보다 강조하는 사람입니다. 누가의 이런 특별한 관심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강도 만난 이웃을 도운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누가 10장), 재물을 쌓아놓고 안전한 줄 알았던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누가 12장), 그리고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누가 16장)가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온다는 점에서 확인됩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가르침을 잘 실천했습니다. 예수님 이후 초대교회는 회심자를 위한 신앙훈련을 3년이나 시켰습니다. 교회에 처음 온 사람에게 우선 신앙문답을 통해 '세속적인 삶을 그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신앙적인 삶을 살 것인지'를 묻고 결단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통과해야 세례 예비자 과정이 시작되는데, 예비자들은 일주일에 몇 번씩 아침 일찍 모여 말씀을 공부했고, 교사들은 그들을 안수한 후 일터로 나가도록 했습니다. 이때 교회가 세례 예비자들에게 요구한 내용을 보니 놀랍습니다.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라, 높은 이자를 취하지 말라, 보복하지 말라, 선한 말을 하라, 분노를 억제하라, 잘못이 있을 때 서로 사랑으로 교정하라" 등이었습니다. 회개는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것이 누가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입니다.
크리스탈 시길 리스트룬드의 <그분이 오고 계신다>입니다. "서둘러라! / 그분이 오고 계신다! / 음식을 준비하고 포도주를 빚어라. / 그분이 오고 계신다! / 세상의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 마음 상한 이들에게 따스한 사랑을 베풀어라. / 그분이 오고 계신다! / 집 없는 이들에게 쉴 곳을 주고 / 옥에 갇힌 죄수들을 방문하라. / 그분이 오고 계신다! / 성경을 읽고, / 또 너희 자녀들에게 / 그들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르쳐라. / 서둘러 준비하라! / 예수께서 오고 계신다!"
그분이 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해야 합니다. 골짜기를 메꾸고 산들을 낮추어 고르지 아니한 곳을 평탄하게 하고 험한 곳을 평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가 없을 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것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굶주린 자에게 빵을 제공하는 것이 은혜의 도래를 위해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윤리학』,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 중).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마태 25:40)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고통당하는 자들과 이렇게 가까이 계시기에, 나를 사랑하시듯 굶주리는 자도 사랑하시기에 우리는 가난하고 굶주린 이웃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방법입니다.
작가 미상의 글, <나그네 예수>를 읽어봅니다. "나는 오늘 한 나그네를 보았습니다. / 나는 그를 위해 접시에 음식을 담고 / 잔에 물을 따라 그에게 주었습니다. / 그리고 그를 위해 음악을 틀었습니다. / 삼위일체의 거룩한 이름으로 / 그는 나와 나의 집과 내 소유와 / 내 가족을 축복했습니다. / 종다리가 지저귑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도 자주 / 낯선 나그네의 가면을 쓰고 오십니다."
지은이는 신비한 일을 경험했나 봅니다. 한 길손을 만나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음악으로 환대(歡待)했는데, 그는 삼위일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소유와 그의 가족을 축복(祝福)했습니다. 낯선 나그네의 얼굴로 오신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축복의 기회가 올 수 있을까요? 아니 오히려 오늘 예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도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이사야는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이사야 1:3)라는 한탄으로 시작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엇이 다를까 싶습니다. 현대인들은 오늘 성자(聖子)가 우리 가운데 오신다 해도 아마 그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심지어 내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시는 그분을,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the least)로 존재하는 그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을 기쁘게 맞이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런 나눔과 섬김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오시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는 일입니다.
작년 겨울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청의 한 궁전을 개조해 노숙자 쉼터로 제공해 큰 감동을 준 적이 있었습니다. 성 베드로 광장 바로 옆쪽에 있는 '팔라초 밀리오리'(Palazzo Migliori)라는 대저택을 교황청은 원래 근사한 호텔로 개조하려 했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곳을 '자신이 원하는 손님들'을 위한 장소로 쓰길 원했습니다. 그가 원한 손님들은 다름 아닌 노숙자들이었습니다. 개조가 완료돼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처음 그 집의 문을 연 날 교황은 새 건물을 축성(祝聖)하면서 "아름다움이 치유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말이었습니다. 한 노숙자는 이 집이 이전까지 자신이 겪었던 합숙소와는 다르다고 말하면서 "그곳에서는 때로 붐비는 우리 속 동물처럼 느껴졌는데 이곳은 훨씬 더 집 같은 느낌이 든다"라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치유를 경험한 것입니다. 실로 가난하고 굶주린 이웃을 주님처럼 섬기고 자신의 소유를 나누는 일은 아름다운 회개의 열매이며, 바로 그 아름다움이 세상을 치유할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Already)과 '다시 오심'(Not Yet)을 맞이하는 준비의 절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초림(初臨)을 믿고 재림(再臨)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대림절을 '겨울의 사순절'이라고도 하는데, 이 시기에 우리는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림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 곳도 난 알 수 없[지만]"(찬송가 310장, 4절),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반드시 찾아오십니다.
올해는 시편 기자의 말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왔습니다. 아니, 우리는 아직도 그 골짜기를 다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대림절은 "이미 끝나버린 것 같은 미래를 여시는 하나님"(월터 브루그만)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오십니다. 그의 나라가 우리의 고통스러운 삶 한가운데로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을 준비하는 방법은 쇼핑이나 연말 파티, 카드 보내기가 아닙니다. 대림절은, 바울의 권면처럼, "형제[자매]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써야]"(로마서 12:10-13) 하는 시기입니다.
주님이 오십니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합시다. 대림절은 그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젠 우리가 주님의 산에 올라야 합니다. 산 위에서 복음을 전하는 빛의 자녀로 살아야 합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202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