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2주 2020년 12월 6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성경본문
마가복음 7:24-30
오늘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제정한 인권주일입니다. 인권주일은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인 12월 10일에 맞추어 1989년 제 74회 총회에서 결정한 것이며 지금까지 매년 12월 첫째주일에 지키고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은 1948년 12월 10일에 유엔에서 총 58개국 회원국 중에 50개국이 찬성하여 공포한 선언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 인권유린의 현장을 반성하는 취지였습니다. 72년 전에 제정된 선언문이지만, 지금 읽어보아도 이대로만 지키면 세계의 인권이 침해당하거나 사람이 사람대접을 못 받는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만든 선언문입니다.
우리 교단 총회는 12월 1일에 교단 총회장이 인권주일을 앞두고 이에 관련된 목회서신을 발표하였습니다. 총회의 인권주일제정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창1:27)에 따른 것이며, 101년 전의 3.1 운동, 1987년의 민주화 운동, 장애 비장애인의 차별이나, 결혼이주여성과 다문화 자녀에 대한 차별대우 등등의 문제까지 다 언급하였습니다. 이어서 비정규직 노동자와 청년실업자, 노인빈곤 문제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언급과 함께 코로나 19 확산으로 택배노동자들의 과로로 인한 참사와 요양병동에서 코로나 집단 감염사태로 인한 노약자들의 죽음, 그리고 최근 산업현장의 산재사고까지 오늘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인권과 연관된 문제들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래서 총회가 '주여! 이제 회복하게 하소서'라는 주제를 정했고, "회복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고통의 자리에서 희생당하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인권에 대한 이해는 다른 단체들의 생각과 비교하면 여전히 온도차가 많습니다.
오늘 마가복음 7장 본문에 등장하신 예수는 매우 쓸쓸해 보입니다. 어쩌면 하던 일에 시달려서 지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앞장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는 문제를 놓고 추궁을 계속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두로 지역으로 가서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다."(막7:24)고 말합니다. 숨으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 어떤 지명이 나올 때, 그곳이 어디쯤에 있는 지역인지 알면 내용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여기 "두로"라는 지역은 지금의 레바논 해안지대에 있는 티레(Tyre)라는 도시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여기에 "시돈"(Sidon)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시돈이라는 지역은 레바논에서 북쪽으로 40Km거리에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과 머물던 곳은 게네사렛 지역인데, 갈릴리 호수주변 마을입니다. 그러니 갈릴리 지역을 떠나서 멀리 북쪽으로 떠나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등장하는 여인에 대한 설명이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시로페니키아라는 지명은 지금의 시리아이고 페니키아 제국이 있던 자리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수로보니게라고 표기를 해서 그 위치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을 교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더 사마리아의 혼혈족 보다 더 멀리 있는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가나안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지쳐서 숨고 싶었던 예수 앞에 이방여인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하니 예수님도 좀 짜증이 났을까요? 그 간청을 단박에 ,그리고 매몰차게 물리칩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 문장만 놓고 보면 주님 말씀이 틀리지는 않습니다. 요즘에 아무리 애완견이 사랑스럽다고 해도 애들 먹여야 할 음식을 애완견에게 먼저 내주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주님의 표현이 많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 때문이었을까요? 이방인을 개에게 비유하는 것은 확실히 비인권적이었다는 생각이듭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두고 해석이 다양하게 등장하였습니다.
예수가 이 여인의 믿음을 강하게 시험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다는 해석도 있고, 이방인과 유대인사이의 일반적인 차별을 예수님이 여기서 드러나게 하시려고 일부러 간청을 강하게 거절하는 척 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해석이 "쓸쓸함의 해석"입니다. 유대인들 특히 유대 지도자들에게 강하게 거절을 당한 그 아쉬움과 쓸쓸함이 이제는 겨우 이방인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또 다른 쓸쓸함으로 증폭되어서, 결국 예수가 이런 말투로 대답한 것 아니냐는 해석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먼저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민족으로부터 배척을 당하면 그 마음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는 쓸쓸한 마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보는 제 눈은 조금 또 다른 것을 봅니다. 제 생각에는 지금 예수의 깨달음의 영역이 막 넓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의미인가하면, 민족이 민족을 사랑하고 우선시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민족주의적인 특성이 과도해지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민족이 약할 때 민족주의는 그 민족에게 힘을 줄 수 있지만, 강할 때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을 괴롭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유대민족이 주변민족에게 어떤 우월감을 내세우며 살았는지 그것을 깨닫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유대인의 우월감을 지니고 살았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말을 대놓고 한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점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종종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강한 믿음을 칭찬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예수께 매달릴 때는 이 여인처럼 강하게 매달려야 들어주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내려 놓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강한 요청이 주님을 움직인다고 하는 해석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에게 강하게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개에게 비유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이 여인의 동의가 추가 됩니다. "주님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나서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자격이 있어서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여인은 단지 주님의 자비를 구한 것입니다. 유대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 내리는 것이라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기준으로 예수를 배척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그런 자신과 이 여인이 오버랩 되었을까요?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 중에 <날아라 개천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졸출신 박 변호사와 전직 기자였던 S대 출신 박 기자가 힘을 합쳐 재판에서 이기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재판은 모두 다 재심을 청구한 재판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재심청구를 해서 승소하는 것입니다. 승소하면 억울한 판결에 대한 국가의 보상금이 나오는데, 그중 10%을 수임료로 받는다고 좋아합니다. 물론 진짜 속마음은 정의감입니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사건들은 모두가 실화입니다. 그리고 드라마 작가는 권력자의 오심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악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권력자들을 자기들의 잘못을 언제나 감추려고만 한다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과정 속에서 승진까지 하고 여전히 권력을 불의하게 행사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런 권력에 맞서 싸우는 통쾌한 역할을 주인공들이 맡은 것입니다.
사건들이 실화인 것을 알고 저는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만만한 사람에게 인권은 없었습니다. 피의자로 몰려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은 대개 다 가난하고, 결손가정이고, 장애가 있고, 심지어 솔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에 살인자의 누명이 더해져 평생을 억울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맞닥뜨린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바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 자신들이 천대받아야하는지, 그리고 왜 자기의 딸은 고치지 못할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소문이 났기에 찾아와서 간청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유대인이 아니라서 못 도와준다는 말이었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은 병을 고칠 때에 말 한마디로 치료를 해주었으니, 약품 값이 드는 것도 아니니, 쉽게 돌려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하고 칭찬을 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네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십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에 먼저 나온 기록이니 그 내용이 훨씬 담백합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라는 말씀 속에서 제가 느끼는 것은 예수께 이 이방여인이 담고 살아온 깊디깊은 한이 전달된 것 같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개에 비유하는 말을 듣고도 분노하기는커녕, 그런 내말을 받아들이니 가슴이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지 못해 겪고 있는 아픔을 느끼는 것이 사실 인권의 출발점이 아니겠습니까?
실망하고 지쳐서 먼 이방지역까지 떠나와 쉬려고 숨으셨던 예수에게 이 이방여인이 찾아와서 간청을 한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경험하고 오히려 예수님은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되고 원기를 회복하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 비로소 당신이 이스라엘에게는 배척을 당하고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역을 담은 복음은 제자들에 의해 온 세상에 퍼졌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이름과 교회라는 조직이름으로 퍼졌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명칭과 조직 뒤에 드러나지 않게 가려진 예수의 가르침과 정신을 찾아내고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기독교와 교회가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기본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권주일에 되어서 일 년에 한 번 말로만 하는 선언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먼저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마음을 가져야하고, 이 마음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실천하며 살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 2째 주일에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우리에게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대하라는 가르침을 들고 오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인권운동가가 될 수는 없지만, 사람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이해하는 마음만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탄생은 모든 사람에게 평화이고 소망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한 주간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