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19일 [한겨레] 신문 첫 장에 실린 두 사진에 눈이 갔습니다. 지면 왼쪽에는 우리나라 최고 재벌이 국정농단 재판을 받으러 들어 가면서 찍힌 사진이 보였고, 오른쪽에는 눈 내리는 가운데 두 사람이 마주 서 있는 사진이 희미하게 보였습니다. 왼쪽 사진은 보나마나 부끄럽고 화나는 사진이어서, 눈을 돌려 하염없이 내리는 눈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두 사람에 주목했습니다. 사진 하단에 "'따뜻하게 입으세요'...노숙인에게 외투.장갑 벗어준 시민"이라는 설명을 보고서, 이게 무슨 소리지?하고 기자님 설명을 읽었습니다.
기자님의 설명은 짧지만 명문이었습니다. "소낙눈...."이란 말, 참으로 처음 듣는 멋있는 말 (아마도 소나기 비, 소나기 눈을 줄여서 만든 말 같은 '소낙눈')으로 시작해서 "소낙눈이 무섭게 쏟아지던 18일 오전 서울역 앞 광장에서 얇은 군용 내피와 수면용 바지에 겨울을 나던 노숙인에게" 지나가던 시민이 자기가 입고 있던 방한용 외투를 입히고 장갑도 벗어 주면서 5만원까지 지갑에서 꺼내 건네고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노숙인은 '너무 추워서 따뜻한 커피 한잔 만 사달라고 했는데 아무 대꾸도 없이 내 어깨를 잡더니 입고 있던 외투와 장갑을 줘 너무 고맙고 눈물이 난다'고 했다."는 대목에 가서 울컥했습니다. 이에 더하여 기자님이 인터뷰를 청할 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는 대목에서는 신문을 내려 놓고 고인 눈물을 닦았습니다.
소낙눈 내리는 혹한 속에 떨고 서 있는 노숙인에 대한 측은함과 동시에 이분과 마주친 한 시민이 그냥 지나가지 않고 자기 외투를 벗어 입혀 주고 장갑까지 벗어 주면서 "따뜻하게 입으세요" 하고 지갑에서 만원짜리도 아니고 귀한 5만원 지폐까지 건네 주고 있는 모습은 따뜻한 아파트 방에 팔자 좋게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이 늙은이를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그 사진이 공교롭게도 국정 농단 사건 등에 연류 되어 재판장에 들어가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사진 바로 옆에 나란히 전시된 데 시선이 왔다갔다 하면서, 설명하기 어려운 갈등과 분노와 측은함과 동시에 무한한 위로와 함께 해방감과 믿음과 희망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내뱉는 분노의 한숨 소리, "헬조선"을 만들어 온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을 신문 한 장에 두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체감으로 느끼면서, 이름 없는 시민의 측은지심과 혁명적인 행동에 추위를 녹이는 따뜻함과 희망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재판받는 재벌의 얼굴과 노동조합도 불허한다는 재벌 회사에서 해고되었을지도 모르는 추위속의 노숙자를 보면서 절망과 함께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주는 이름 없는 시민이 있다는데 하염없는 감동과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기자님의 사진과 설명을 보고 읽으면서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가슴에 떠올랐습니다. 하루는 어떤 율법학자라는 당대의 최고 지성이면서 권력자가 젊은 예수에게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를 수 있겠습니까?" 이를테면, 공개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는 직접 대답하지 않고 "당신이 잘 아는 유태교 율법서에 어떻게 써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이 법률학자는 자기 실력을 과시나 하는 듯이 정답을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하였습니다." 단숨에 자신 있게 큰소리로 외치다 싶게 정답을 말했습니다. 예수는 칭찬했습니다. "정답이요 명답이요. 당신이 말한 대로 하십시오,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요"했는데도 그 머리 좋은 율법학자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누가 내 이웃입니까?" 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예수는 어려운 종교철학이나 윤리학 강의 대신 늘 하는 대로 보통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이 질문, "누가 내 이웃입니까?"에 응답하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신약성서 누가복음 10장 25절에서부터 37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를 오늘 우리 한국에서 일어난 이야기로 "각색"해 보겠습니다.
소낙눈 혹은 소나기눈이 펑펑 쏟아지는 영하 10도, 체감 영하 15도의 추위에 서울역사 앞 광장에 어린아이를 껴안고 엎드려 있는 아기 엄마가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무거운 서류 가방을 든 변호사 아니면 재벌회사 고급 사무원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앞에 엎드려 있는 모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회사 일로 너무 바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다음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모모한 이름있는 대형교회 목사님이 장로님들과 함께 지방에 있는 수양관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다음 KTX를 타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바로 가는 길 앞에 엎드려 추위에 떨고 있는 모녀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냥 지나가기가 그랬는지 주머니에서 손에 잡히는대로 천원짜리 지폐 한두 장을 어린아이 등에 던지고 지나갔습니다.
오후가 되자 어떤 까만 얼굴을 한 청년이 지나가다, 두 모녀를 보고 가까이 다가갑니다. "일러 나셰여...." 우리나라 말 발음이 시원치 않은 걸 봐서 외국인 노동자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는 근처 포장마차에 데리고 가서 꼬치니 이런저런 먹거리를 사서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자기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벗어서 어린아이 목에 걸어 주고, 만원 짜리 지폐를 아기 엄마 손에 쥐어주고 총총히 자기 가던 길을 갔습니다.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나 같으면 그 유태인 율법학자의 질문,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의 대답은 "눈오는 추운 날 아침, 길바닥에 엎드려 있는 두 모녀가 당신 이웃이요..."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그 서울역 광장에 누어있는 모녀가 아니라, 두 모녀를 도운 외국인 노동자 (착한 사마리아인)가 이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너도 그 외국인 노동자처럼 하여라. 참된 이웃이 되어라."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예수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에서
그 율법학자가 물은 질문,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산속에서 강도당해서 피투성이로 다 죽어 가던 사람이 아니라 그 강도당한 사람을 구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묻는 자에게 예수는 "바로 당신이 이웃이요. 착한 사마리아 같은 이웃이 되시오."였습니다.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유태 율법에서는 강도당한 사람이나 길바닥에 누어 자야하는 노숙인을 "이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지식인의 질문에 "바로 당신이 노숙자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다." "바로 당신이 참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백소아 기자님의 사진 속의 마주 서 있는 두 사람 가운데, "참 이웃"은 그 눈보라 치는 추운 아침에 자기 외투를 벗어 추위에 떨고 있는 노숙인에게 입혀 준 이름 없는 착한 행인이었습니다. [한겨레] 1월 19일 자 신문 정면에 실린 또 하나의 사진 속의 재벌 대표는 "이웃'이 아니었습니다. 민생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고 버티는 국회의원들도 공장에서 일하다가 기계 사이에 끼어 죽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이웃"이 아닙니다. 코로나 때문에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아가는 소상공인들, 자영업자들에게 재난 지원금도 기본소득 제도 같은 것은 생각도 안 하는 나라는 국민의 "이웃"이 되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공무원이고, 국회의원이고, 대통령이고 청와대 수석들, 권력에 눈이 멀어 국민이 보이지 않는 맹인들이고 국민들의 통곡소리가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인 밖에 안 됩니다. 예수가 한 말대로, 참 지도자는 섬김을 받는 자, 섬김을 강요하는 지배자, 갑질하는 자가 아니라, 힘없고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백소아 기자님의 귀한 사진, 우리의 눈과 귀를 열게 해 주신 것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