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박경미 이화여대 교수

성경본문

전도1:1-5 벧전 1: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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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박경미 교수 페이스북 갈무리)
▲박경미 이화여대 교수

오늘 기장 여신도회 주간에 향린교회 교우들과 말씀을 나눌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제가 함께 아는 안병무 선생님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아마 나이드신 분들은 저보다 훨씬 더 안 선생님을 잘 아시고 가까이 사귀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대에서 은사셨던 돌아가신 허혁 선생님, 박순경 선생님을 통해 말씀으로만 듣다가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안병무 선생님을 거의 매일 뵈었습니다.

1980년대 초 군사정권이 많은 교수를 대학 강단으로부터 쫓아냈을 때 안 선생님도 한신대에서 쫓겨나셨습니다. 그때 저는 아직 석사과정생으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던 국제성서주석 시리즈 번역원으로 한국신학연구소에 들어갔습니다. 입사 면접을 할 때 안 선생님은 논문주제가 무엇인지 물으시고 "역사적 예수 문제"라고 대답하자 정면으로 저를 응시하면서 "역사적 예수는 나의 평생의 질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셔서 그때 저는 당황했습니다. 뭐라고 제가 더 말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역사적 예수" 문제를 그저 논문 주제로 생각하고 어려운 원서들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던 제게 60대 노학자가 했던 "평생의 질문"이라는 말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인데 실은 방기해온 그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로도 여러 번 안 선생님은 제가 난처해할 만한 질문을 하셨고, 저는 안 선생님의 질문을 제대로 통과한 적이 없었습니다. 안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안 선생님은 세상 물정 모르는 스물서너 살짜리 처음 보는 학생을 앞에 놓고 그렇게 말을 걸어오는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뭔가 얘기해주고 싶어 하고 또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 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려서 고집스럽고 까다로워 보이는 언행 이면에 한없이 다정하고 솔직한 그분의 인격에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월이 흘러 제가 그때 선생님 나이 비슷하게 되니 조직이나 위계, 인사치레 같은 거추장스런 것들을 던져버리고 마치 조급증에 걸린 것처럼 어서 빨리 사물의 핵심에 다가가고자 하시던 그분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짧다면 짧은 것이 인생인데,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로 살아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일까요? 안 선생님은 민중신학이라는 뛰어난 신학운동을 주도하고, 감옥에까지 드나들며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지만, 그것은 어떤 이념이나 윤리적 당위 이전에, 진정으로 기쁘고 진실되게 살고자 했던 그분의 바람의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험난한 한국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지식인으로 안병무를 기억하는 것이 일차적이겠지만, 제게 안병무는 무엇보다도 '인생주의자', 상투성을 넘어 삶의 속살에 다가가고자 했던 '인생주의자'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인생주의자' 안병무의 가슴 속에 평생 자리잡아서 언제나 살아 펄펄 뛰는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게 만들었던 것이 상투성을 넘어선 풋풋한 인간, 맨사람, "갈릴리 예수"였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내 평생의 질문"이라고 첫 만남에서 제게 하셨던 말씀의 의미는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를 품고 사셨던 안병무 선생님은 주변의 많은 사람에게 신학하는 기쁨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제게는 참 좋은 선생님들이 계셨지만, 그중에서도 안 선생님은 성서를 보는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안 선생님을 통해 저는 성서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책이고, 또 사람들이 희망을 일구어간 기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역시 세상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일까 하는 질문 앞에서 성서의 인물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갈 희망을 발견하고 그 희망의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가 멸망하는 비참한 때에 들불처럼 일어나 활동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쟁은 참혹합니다. 처참한 살육과 굶주림, 부모 잃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칩니다. 절망은 깊고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예언자들은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죄를 폭로하고 하느님 앞에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회개하면 희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외국 군대가 침략하여 이스라엘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느님이 앗시리아나 바빌론 같은 외국 군대를 막대기로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바른 길로 교육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가르치기 위한 도구로 다른 나라를 사용하신다고 선언하기 위해서는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주변국가, 아니 전 세계를 다스리는 유일한 한 분 하느님이라는 믿음의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이 가장 심각한 고난의 상황에 처했을 때 예언자들을 통해 유일신 신앙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단일신 신앙, henotheism에서 유일신 신앙, monotheism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유일신 신앙은 몇몇 뛰어난 신학자들이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해서 만들어낸 관념도 아니고, 처음부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주어져 있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 한가운데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함께 이루어갔던 구원사의 맥락에서 고통스럽게 얻은 삶의 진실입니다.

예언자들의 신학은 이스라엘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고대 근동의 제국들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수백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더 비관적인 상황에 빠져 더 이상 예언자들의 희망을 유지하기 어려워졌을 때, 묵시문학가들이 등장해서 이 예언자들의 희망을 계승합니다. 흔히 다니엘서나 에녹서, 모세의 유훈 같은 묵시문학은 세계의 종말, 대파국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본문들을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묵시문학은 세계의 종말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같은 약소국을 억압하고 수탈했던 제국의 종말을 기다렸습니다. 묵시문학은 우주대파멸이 아니라 제국의 파멸을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이어질 새 하늘과 새 땅, 새 인간을 기대했습니다. 묵시문학가들은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고 근동 대제국의 지배와 파괴, 수탈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예언자들의 희망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예언자들의 희망을 이어가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묵시문학가들의 희망의 선포를 이어갑니다. 그러나 달라지는 점이 있습니다. 예언자들과 묵시문학가들의 희망 속에는 언제나 민족과 국가, 시온의 회복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국가와 민족의 회복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선포의 핵심에는 언제나 하느님나라가 있습니다. 복음서의 비유들에서 하느님나라의 주인은 지금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갈릴리의 소농들,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지금 가난하고 고통받아 슬피 우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지금 가난하고 슬피 우는 사람들, 평화를 만드는 민중,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국가와 민족의 실체를 민중 개개인으로 본 것입니다. 예언자들과 묵시문학가들처럼 예수 역시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희망의 맥락에서 가르치고 활동했지만, 예수께서 발견하신 것은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고 사람들을 먹여살리며 장구한 생명의 끈을 이어가는 것은 지금 허리굽혀 땅에 바짝 붙어 일하는 소농들, 민중이라는 사실입니다. 국가와 민족의 실체는 민중,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국가와 민족을 먹여살리는 소농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삶의 진실을 말해주었습니다.

이들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도, 그리고 예수께서도 저급한 물질적 욕망이나 탐욕에 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이집트의 고깃가마를 그리워하지만, 하느님은 고깃가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이라는 감격적인 해방의 체험을 하고도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의 훈련기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예언자들은 권력자들을 향해서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느님과 마몬 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서는 한결같이 돈과 명예, 저급한 탐욕이 자신의 주인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만일 희망이 물질적 성취, 경제발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정신적 고양이나 자기수련에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가르치는 종교들도 있습니다마는, 성서는 개인적 수련이나 명상, 고행 같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물질적 풍요에 희망을 두지도 않지만, 반대로 정신적 고양에 희망을 두지도 않습니다. 성서는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적 대립을 모릅니다. 그래서 정신 아닌 물질에서, 또는 물질 아닌 정신에서 희망을 보지 않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성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희망을 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경과 지지, 존중이 있을 때 공동체는 살아나고 희망이 생깁니다. 예수께서 하신 하느님나라운동도 사람들 사이에서 하신 일입니다. 길가에 돌멩이 같은 사람들을 일으켜세우고 그들더러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느님나라의 주인이 될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선악과 가치가 전도된 세상 한가운데서 그래도 하느님은 살아계시다고, 하느님이 다스리신다고 확신을 주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들 사이에 원수된 것을 풀고 이웃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이 상호 간의 채무관계 때문에 원수가 되는 일이 흔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서로 빚을 탕감해주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겪는 불행에 대해 서로를 비난하지 말고 서로를 받아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파괴된 촌락공동체, 이스라엘 공동체를 회복하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들에 핀 엉겅퀴를 보라고 하셨고,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아침에 피었다 저녁이면 아궁이로 들어가는 들꽃도 하느님이 먹이시고 입히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이 솔로몬의 옷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이런 언어들은 그의 가슴 속에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기뻐했는지 알려줍니다. 복수와 대결을 통해 결국에는 당신들이 이길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너희처럼, 들풀처럼, 참새처럼 사는 것이 행복하다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무시당하지만 실은 너희들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고 그들의 삶을 밑바닥에서부터 긍정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면서 밥을 나누고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고 함께 하느님나라의 꿈을 꾸었습니다. 꿈을 꾸는 동안 그들은 진실한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갖는 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함께 하는 삶입니다. 사람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물질적 가난 그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무시당하고 소외당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부당한 요구에 굴종할 수밖에 없고, 가난하기 때문에 자존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난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정말로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지금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인격을 믿었던 사람들은 예수의 그 단순한 말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원수가 되었었는데, 이제 서로 빚을 탕감해주고 서로 돕는 이웃이 되라고 했습니다. 가난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만들고 서로 협력하게 만듭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식으로 희망 없던 사람들이 스스로 희망을 찾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위기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희망을 찾아갈 수 있을까요? 코로나 19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년 한 해를 집어삼킨 전염병은 새해가 돼도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조만간 백신접종으로 코로나 19가 지나간다 해도, 과학자들에 의하면, 오늘날 신종 바이러스는 연간 수백 종이 넘게 출현하고, 그 대부분은 잠재적으로 '팬데믹'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코로나 팬데믹은 따로 떨어진 분리된 현상이 아니라 더 센 것, 정말 무서운 기후변화의 전조일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 팬데믹은 기후변화로 인해 우리가 겪게 될 재앙적 수준의 재난들의 예고편일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인류 역사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던 계기가 자연재해나 전염병인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점에서 세계의 역사는 전염병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염병의 역사를 말하는 사람들은 과거 인류에게 일어났던 대규모 전쟁이나 문명의 전환 등 인간사의 총체적인 변화 현상이 어떤 형태로든 전염병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예가 중세 말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페스트일 것입니다. 1346년 몽골군이 크림반도를 공격할 때 유럽으로 유입된 페스트는 1350년까지 불과 4년 동안 유럽 인구의 거의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페스트로 인해 농노와 하층민들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중세 농노제를 떠받쳤던 실질적인 토대가 무너졌고, 이로 인해 중세 유럽의 봉건질서가 결정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대항해의 시대', '대탐험의 시대'가 열리고, 신대륙을 탐사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고대 인도 북서부에서 성장한 힌두 문화는 세력이 막강했는데도 인도 동남부의 고온다습한 숲지대 종족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고, 이들을 불가촉천민으로 규정하며 카스트제도의 근간을 만들었는데, 그 이유 역시 숲 지대 종족의 군사적 저항이 거셌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의 열대성 전염병에 침입자들이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카스트라는 차별적 사회제도의 기원이 종교적 이념이 아니라 실은 전염병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1521년 스페인의 코르테스가 단 600명의 병사로 인구 수백 만의 아스테카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앞선 무기나 전투력이 아니라 그들이 유럽으로부터 가져온 전염병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남미 대륙의 식민화로 이어졌습니다.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이 말했듯이, 인간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놓고 세계사의 물줄기를 변화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생산력의 발전이나 계급투쟁, 또는 전쟁이 아니라,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 역시 인류 역사에서 낯선 경험이 아닙니다. 고대, 중세의 역병과 다른 게 있다면 그 범위가 전 지구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인류의 삶이 전지구적인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지구적 확산은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세계화, 과잉 산업 발전, 소비주의의 확산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이윤과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데 혈안이 되어 무절제한 탐욕이 온 세상을 압도하는 바람에 야생생물들의 서식지를 포함한 생태계는 대대적으로 파괴되었고, 거기에 자본, 물자, 사람의 대량 이동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적 자유무역 논리까지 합세하여 지금과 같은 파국적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과거 전염병의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지금과 같은 응급상황에서 백신접종이나 치료제 개발 같은 기술적 방책은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이 위기 앞에서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은 근본으로 돌아가서 우리 삶을 되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 많은 사람이 하루빨리 코로나를 극복하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바로 그 이전의 삶의 방식이야말로 지금과 같은 재앙을 불러온 근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경쟁하고 소비적 삶을 부추기며 쓰레기를 만들어내며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가 속한 믿음의 전통은 뭐라고 가르치는지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배운 인류의 오랜 지혜들은 하나같이 탐욕을 멀리하라고 가르칩니다.

역사는 전염병의 창궐이라는 위기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문명의 흥망이 결정된다는 점을 가르쳐줍니다. 지리학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저서 "문명의 붕괴"에서 그린란드의 바이킹 이야기를 했습니다. 1000년경 그린란드에 바이킹 정착이 이루어졌지만, 1300년경부터 소빙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린란드에 소빙하기가 도래했을 때 유럽적 생활양식을 고수했던 바이킹족은 사라졌고, 그린란드의 달라진 생태적 조건에 맞는 생활양식을 추구했던 이누이트족은 살아남았습니다. 소빙하기 그린란드에서 펼쳐진 바이킹의 소멸과 이누이트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이 자연환경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고 말해줍니다. 가혹한 환경에서 인간 사회가 소멸할 수 있지만, 그 붕괴가 필연적인 것은 아닙니다. 소빙하기보다 더욱 격렬하게 기후가 변화하는 오늘날 역시 생존을 위해 새로운 가치와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시점입니다.

대표적인 대기과학자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인 조천호 박사는 저서 "파란 하늘, 빨간 지구"에서 138억년 전 빅뱅 순간에 인간이 탄생할 확률은 거의 0이었지만, 그동안 우주와 태양계에 변화가 일어났고, 특히 지구는 다른 행성에 비해 극심한 변화를 겪었으며, 이 변화 과정에서 인류 생존에 필요한 우연들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만일 이 우연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인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지구 환경은 연속적으로 일어난 우연이 누적된 지구 변화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우연이 현재의 지구와 같은 생명력 있는 역동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는 건 아닙니다. 적합한 기후의 출현은 지구 편에서 보자면 우연이지만, 우리의 생존에는 필연입니다. 이제 인간이 기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고, 인간에 의한 이 우연이 지구를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지구의 발생과 지구가 지금까지 겪어온 변화에 대한 조천호 교수의 장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인간 존재에 대해 겸손해지게 됩니다. 우리 인류는 필연적으로 생명체의 최정점에 오른 위대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연히 적합한 기후가 출연했고, 생명의 나무가 분화되는 과정에서 우연히 우리가 자연선택을 받았을 뿐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이런 우연의 배후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구의 우연은 언제든 인간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조천호 교수는 인간의 신통함은 이 우연을 안다는 데 있고, 인간의 위대함은 이 우연을 다루는 데서 비로소 발휘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많은 생태학자들이 세계화의 역설을 말합니다. 세계화는 단기간에 전지구적인 부의 규모를 확대했지만, 지구환경이 변하는 시대에 세계화는 위험을 증폭시킵니다. 상호 연결된 시스템은 서로 간의 의존도와 복잡성을 높여 위험을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세계화 구조에 편입되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27퍼센트, 에너지 자급률은 3퍼센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요 상대국이 무역보복을 들고 나오거나 수출이 안 되면 위기에 빠질 수 있는 취약한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더 잘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후변화, 에너지와 식량 안보, 물관리, 환경 보존 같은 실질적인 생존 문제보다 세금과 국가 예산 집행을 둘러싼 부의 재분배 문제, 이념 문제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보수건 진보건 정작 우리 삶의 토대를 흔들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코로나 사태와 기후변화 위기를 맞아 우리는 어떻게 우리 삶을 돌아보고 새로우면서도 오래된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을까요? 기후위기가 근대 산업화와 그에 따른 자본주의적 소비 위주의 삶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과학자나 정치가, 관료들이 위기상황을 해결할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려고 하겠지만, 결국 우리 자신의 욕망을 줄이지 않는 한 현재의 파국적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올 희망은 없습니다. 아무리 신재생 에너지를 개발하고 전기차를 만들고 환경친화적인 정책을 펼쳐도 현재 우리가 누리는 생활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한 희망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함께 단순·소박한 삶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오래된 큰 지혜, 종교적 전통이 가르쳐주듯이 함께 사는 공생의 윤리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속한 기독교 전통은 참으로 풍부한 가르침을 줍니다. 성서의 인간들은 물질적인 행복과 성공을 추구하는 것을 삶의 희망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물질세계의 덧없음을 깨닫고, 물질에 매이지 않으며 검소하고 소박하게, 겸손하게 살 것을 가르치는 성서의 말씀은 오늘의 위기 앞에서 무엇보다 절실하게 가슴에 와닿습니다. 목전에 닥친 위기를 예감하면서 또 그 앞에서 스러져갈 가련한 희생자들을 떠올리면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다."는 이사야서와 베드로전서 1:25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듯이 육체는 시들고 썩기 마련입니다. 육체에 희망을 두는 사람, 탐욕에 삼켜진 사람은 절망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는 오직 영원한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그 말씀으로 살고 그 말씀에 희망을 거는 사람만이 영원한 삶을 산다고 말합니다. 전도서에서 시인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헛되고,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노래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헛되고, 근원적 새로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현존하는 모든 것의 영속성이 위기 앞에 놓인 현시점에서 믿음은 어떻게 유지되며, 영원한 것은 무엇일까요?

성서와 기독교의 가르침은 노장사상이나 그리이스 철학과는 사뭇 다릅니다. 장자는 세상의 삶을 한 바탕 꿈이라고 했고, 죽음은 실제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플라톤도 보이는 세계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이데아만이 참된 실재라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의 현실을 꿈이나 그림자로 보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지만, 그것은 현실도피이거나, 현실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에 따르면 세상 안에서의 삶도 진지한 현실입니다. 십자가가 참된 현실이듯이 우리의 삶 역시 소중한 참된 현실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일에 매이지 않으면서 세상일에 적극적입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이 우리에게 큰 영광을 줍니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서 영원한 삶을 삽니다.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에 이릅니다. 썩을 몸이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몸을 보이는 것으로만, 물질과 육체로만 보면 몸은 썩고 추해집니다. 몸에 하느님의 영, 예수의 생명을 모시면 몸은 하느님의 신령한 성전이 됩니다. 내 몸은 흙으로 지어졌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몸은 하느님을 모신 그릇입니다. 그릇은 겸손하고 부지런해져야 합니다. 자랑할 것도 없고 아낄 것도 없습니다. 땀 흘려 힘껏 살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 때 그 삶의 원리는 우리 신앙의 선배 바울이 삶으로 보여주었듯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와 사회는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는 당연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오늘날처럼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부추기는 문명은 없었습니다. 그 끝은 아마도 모두의 파멸일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육체의 자랑과 욕심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파국을 직접 겪고서야 그것을 깨닫는 개인이나 사회는 어리석습니다. 자기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를 전하는 교회가 육체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얼마나 검소하게 살았습니까? 예수의 제자들과 바울은 얼마나 청빈하게 살았습니까? 그래도 그들은 기쁨에 넘쳤고 그들의 말은 힘찼습니다. 탐욕을 멀리하고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살 때 하느님의 능력은 강하게 역사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떡을 나누어 먹고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먹었던 엘리야와 엘리사는 얼마나 힘있는 주의 종이었습니까? 맑은 정신을 지니려면, 교회가 영적 힘을 지니려면 육체적인 삶이 검소하고 소박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과 능력이 역사하려면 사람의 육체적 삶은 겸허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죽을 때 새 소리는 슬프고 사람의 말은 착해진다." 죽음을 당할 때 비로소 착해진다는 것은 세상일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어쩌면 이 말은 전지구적 위기 앞에 있는 인류에게 해당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전지구적 생태 위기 앞에서 우리의 말과 생각이 착해져야 합니다. 세상 안에 있는 것, 해 아래 있는 것들의 덧없음을 인식하고, 영원의 한 끝을 붙들고 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전도자의 말대로 "나"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적 우연의 축적, 하느님의 은혜의 손가락 끝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와 우리가 속한 세상이 헛되고 인간은 세상을 지배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세계의 근거이신 하느님이 진정한 세계의 주인이심을 알아야 우리는 진실하고 착해질 수 있습니다. 목전의 경제적 이익, 부국강병, 경제성장에 눈이 가려 생명을 파괴하고, 우리 삶의 진정한 토대인 자연생태계를 어지럽히는 사람은 헛된 것에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우리 대다수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붙들려 있는 신화, 즉 새로운 과학기술의 개발을 통한 끊임없는 성장, 또는 진보의 추구라는 관념과 결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가장 큰 계명은 시대의 진정한 위기를 깨닫고, 개인적, 사회적 삶의 방향전환을 이루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핵발전을 포기하고, 소비적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은 경제성장과 시대발전에 역행하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늘어날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 보이지 않는 이웃, 상처받은 생명을 사랑하려면 오늘 이 시대의 지배적인 논리를 거슬러 작고 희미하고 들리지 않는 희생자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느낌이 사랑이고 어진 마음이고 믿음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느끼는 일입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이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미래를 말할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허망하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고 참됩니다. 그러니 보이는 것에 매달려 헛된 것을 추구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헛된 것에 집착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붙들면 마음의 병도 사라질 것입니다. 이 진리를 죽음을, 파국을 눈앞에 두고 너무 늦게 깨닫지 말고 일찍 깨닫는다면 인류는 진정 지혜로운 자, 호모 사피엔스가 될 것입니다. 탐욕을 멀리하고 검소하고 소박하게, 겸손하게 영원의 끝을 잡고 살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단순히 개인적 삶의 태도를 넘어 이제 기후변화의 위기에 직면한 인류를 향한 보편적 명령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느끼는 일입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이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미래를 말할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습니다."(벧전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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