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깨끗하게 되어라

김기석 목사(청파감리교회)

kimkisuk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성경본문

막1:40-45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로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단단히 이르시고, 곧 그를 보내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령한 것을 바쳐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여라." 그러나 그는 나가서, 모든 일을 널리 알리고, 그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다. 그래도 사람들이 사방에서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아픔의 땅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국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난 한 주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공수처가 출범했습니다. 입법 취지 그대로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데 이바지 할 수 있기를 빕니다. 온 세계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을 지켜봤습니다. '통합만이 진전을 향한 길'이라는 그의 메시지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정책으로 구현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와 그의 정부가 분열되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고, 무너졌던 신뢰의 토대를 다시 구축할 수 있기를 빕니다. 취임하자마자 그는 행정 명령을 통해 배타적이었던 이민 정책을 재고하도록 했고, 세계보건기구(WHO) 재가입을 지시했습니다. 제게 매우 고무적이었던 것은 30일 이내에 파리기후변화협정에 복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24살의 시인 어맨다 고먼(Amanda Gorman)이 낭송한 취임 축시 '우리가 오르는 언덕'(The Hill We Climb)이 화제입니다. 그는 어둠 가운데서 빛을 찾는 일의 중요함을 지적한 후, 분열을 메우고 차이를 제쳐놓을 용기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시의 마지막 부분은 새로운 여명이 동터올 것이라면서 그러한 확신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빛은 언제나 있을 것이기에
우리에게 빛을 볼 용기가 있다면,
우리에게 빛이 될 용기가 있다면."

(For there is always light,
if only we've brave enough to see it
if only we're brave enough to be it.)

'빛을 볼 용기', '빛이 될 용기'야말로 이 어두운 시대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어둠에 사로잡혀 빛을 보지 않으려는 완고한 고집과 비관주의입니다. 비관주의자들은 '빛이 될 용기'를 낼 수 없지만, 어맨다는 그 빛이 항상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볼 눈이 없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빛은 창조의 첫날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빛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근원적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세상의 빛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이들은 비관주의나 숙명론을 거부합니다. 엄동설한에도 봄을 준비하는 나무들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빛이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은 분열과 갈등의 땅, 아픔과 시련의 땅에 생명과 평화와 화해의 빛을 가져간 삶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은 그 첫 장부터 각종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으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절망이 더께처럼 내려앉아 새로운 삶을 꿈꾸지 못했던 갈릴리의 민중들은 예수를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새 생명의 꿈틀거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숭배할 대상을 찾고 있는 이들에게서 오히려 멀어지셨습니다. 외딴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고, 사람들이 찾고 있다는 제자들의 보고를 듣고는 다른 고을로 떠나셨습니다.

의지와 능력

오늘 본문은 그 길 위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나병은 죄에 대한 징벌로 여겨졌습니다. 나병 환자였던 한하운(1920-1975) 시인을 아시지요?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천형天刑의 시인'이라 했습니다. 그 병 자체가 하늘의 징벌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그가 경험해야 했던 고통과 소외감의 크기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일 겁니다. 그는 남도길을 걷다가 발가락이 한 개 두 개 떨어져 나가는 경험을 한 후에 쓴 시 '황톳길'에서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라고 노래합니다. 반겨주는 이 아무도 없고, 갈 곳조차 없는 세상에서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일을 겪으며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 걸어야 하는 것은 얼마나 처절한 일입니까? 예수님 당시에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 밖 특정한 장소에 격리되곤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오염시킬 수도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꺼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 왔다고 말합니다. 과거형인 '왔다'로 번역됐지만 원문은 현재형입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만 마가는 마치 그 사건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말함으로 이야기를 듣는 이들을 그 사건의 현장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예수님께 나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If you will, you can make me clean]"(막1:40). '하고자 하시면(will)'과 '해주실 수 있습니다(can)'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이 중요합니다. 할 수 있어도 뜻이 없거나, 뜻이 있어도 할 수 없으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이제 선택은 주님의 몫입니다. 예수님 속에서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사용된 단어 '스플라흐니조마이(splagnizomai)'는 가련한 이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합니다. 이 단어는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이 머무는 자리인 창자가 꿈틀거린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피해야 할 오염 덩어리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겪었던 삶의 애환과 고통, 그를 사로잡고 있는 어둠과 절망, 물새같은 비애의 깊이를 고스란히 당신의 것처럼 느끼셨던 것입니다. 전남대학교에 계신 철학자 김상봉 선생님은 교양의 본질은 "자기를 초월하여 타자의 자리에 자기를 놓을 줄 아는 능력, 곧 타자에 대한 상상력"(서경식 김상봉 대담, <만남>, 돌베개, p.350)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교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그의 몸에 손을 댔다가 나 또한 오염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는 없습니다. 말씀이 떨어지자 나병이 떠나가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뜻이 일어나자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강은교 시인의 시 '당신의 손'이 떠오릅니다.

"당신의 손이 길을 만지니
누워 있는 길이 일어서는 길이 되네.
당신의 슬픔이 살을 만지니
머뭇대는 슬픔의 살이 달리는 기쁨의 살이 되네.
아, 당신이 죽음을 만지니
천지에 일어서는 뿌리들의 뼈."

우리 손이 닿는 곳마다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뜻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뜻의 일어남이 바로 사랑입니다. 진실한 사랑이 일어날 때 우리는 무능에서 깨어나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말하기, 보이기

나병 환자의 치유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당사자가 느낀 기쁨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단단히 이르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령한 것을 바쳐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여라."(막1:44) 두 가지 명령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침묵 명령입니다. 다른 하나는 율법의 규정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침묵 명령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비밀을 지키기 위한 것이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는 말은 아직 유대교와의 정면 대결을 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그를 보내셨다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보내셨다'고 번역된 단어 엑발로(ekballo)는 '내쫓다'에 가까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명령을 들은 즉시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입니다. 왜 주님은 이렇게 엄격하게 지시하신 것일까요? 우리가 깨끗해졌다는 것, 구원받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로 설명할 것이 아니고, 삶으로 입증하라는 것이 아닐까요?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요13:35)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이 부질없을 때가 있습니다. 말이 논란을 일으킬 때가 많습니다. 믿음의 진실함은 행위를 통해 나타나고, 사랑의 참됨은 수고를 통해 드러나고, 소망의 적실함은 인내를 통해 입증됩니다(살전1:3). 행위와 인내와 수고가 없는 믿음 소망 사랑은 공허합니다.

얼마 전 우리는 눈이 내리는 서울역 광장에서 벌어진 한 아름다운 사건을 기억합니다. 노숙인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점잖은 행색의 행인에게 너무 추워 그러니 커피 한 잔만 사달라고 했습니다. 그 행인은 추위에 떨고 있던 그에게 외투와 장갑을 벗어 주고, 5만원을 건네고는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그 놀라운 순간이 기자의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그 행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 이 냉혹하고 차가운 세상에 햇볕 한 줌을 뿌린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아니라 삶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가야 할 길이 너무 멉니다.

바깥에 서야 하는 운명

결과적으로 주님의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 치유된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퍼뜨렸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긴 합니다만 그 때문에 예수님은 드러나게 동네로 들어가실 수 없었습니다. 그곳은 예수님을 기적 행위자로 받아들이려는 이들의 욕망이 들끓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깥 외딴 곳'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주님은 통념과 관습이 지배하는 일상 세계에 속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세계를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우리의 일상이 잡담과 호기심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남들과 자기를 비교하거나 비교 당하며 삽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가치를 지위, 재산, 인기 등을 척도로 삼아 재려 합니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합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다른 이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뒤처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늘 조바심칩니다. 잡담거리가 되는 것에 호기심을 갖습니다. 그래야 소외되었다는 느낌에서 놓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수록 영혼의 소리는 듣지 못하게 됩니다. 사물과 세계에 깃든 하나님의 신비를 알아차리는 능력은 자꾸만 퇴화됩니다.

가끔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 나무와 숲을 만나야 하고, 시원한 바람을 쐬야 합니다. 눈을 맞을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그곳에 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경이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한적한 공간이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고독의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마을 밖으로 나가야 비로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접속시켜주시는 분, 우리 시선을 한없이 확장시켜 주시는 분으로 주님을 만날 때 세상의 인력은 줄어듭니다. 자유가 우리 속에 유입됩니다.

유혹이 많은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영혼에는 때가 많이 묻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보니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말았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불투명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상기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참상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엎드려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고쳐주실 겁니다. 이제 우리가 삶으로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입증해야 할 차례입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의 마음에 햇볕 한 줌 나눠주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그 사랑의 범위를 점점 넓혀 가십시오. 빛을 볼 용기를 내십시오. 빛이 될 용기를 내십시오. 그 길 위에서 지치거든 마을 밖 외딴 곳에 계신 주님을 찾아가십시오. 빛이 이미 그곳에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워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위 설교문은 청파감리교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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