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야 43:1-7, 로마서 6:1-4, 마태복음 3:13-17 -
교회력으로 지난 1월 10일은 '주님의 수세주일,' 즉 예수께서 세례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날을 기념하려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연기된 세례식을 오늘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은 단지 세례를 받는 열 분만을 위한 날이 아닙니다. 이미 세례를 받은, 또 앞으로 세례를 받을 모든 분을 위해 이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세례를 받을 분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가 넘치고, 세례를 이미 받은 분들에게는 이 은혜의 기억이 오늘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사건을 보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례는 초대교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학의 역사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문제였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기사는 네 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어서 (마태 3:13-17, 마가 1:9-11, 누가 3:21-22, 요한 1:32-34)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한이 성경의 기록대로 "죄를 자복하[는]"(마태 3:6) 세례를 베풀었다면 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셔야 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나 흠이 없는 분이 아니신가요(히브리서 4:15)? 그런 분이 왜 요한이 베푸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마가 1:4, 누가 3:3)를 받으셔야 했나요? 이 질문은 상아탑의 신학자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서를 깊이 읽는 교인들로부터 제기된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이 문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말립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태 3:14). 요한은 예수님이 요단강으로 나아오시기 전에 이미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마태 3:11)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도 왜 굳이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자청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태 3:15).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무 죄나 흠이 없는 예수님은 '의를 이루기 위해,'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 세례를 자원하신 겁니다.
사도 바울은 세례의 깊은 의미를 '연합'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말씀처럼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로마서 6:3, 5)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받는 세례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참여하고 연합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도 우리의 고난과 아픔에 대한 예수님의 동일시와 연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내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태 25:40)이며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마태 25:45)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래서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 그리고 죄를 뉘우치고 새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시고 연합(연대)하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세례(洗禮)는 영어로 "baptism"입니다. 이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밥티스마'(βαπτισμα)입니다. 그 뜻은 '물에 담그다' 혹은 '물에 적시다'입니다. 왜 물에 담그거나 적실까요? 물은 무엇을 표상합니까? 세례는 원래 물속에 몸을 완전히 담그는 '침례'(浸禮)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표상합니다. 죄 안에 살던 나의 옛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로마서 6:3) 것이라고, 즉 "죄에 대하여 죽[는]"(로마서 6:2)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 죽음의 목적은 새로운 생명을 살기 위함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로마서 6:4)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죄(罪)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에는 히브리어로 모두 세 가지 죄 개념이 나오는데 그것은 모두 '비뚤어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온'(עון)입니다. 마음이 비뚤어져 자신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두 자기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자신을 존중하고 아끼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온이라는 죄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자신과 올바른 관계가 파괴된 것,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첫 번째 죄입니다. 두 번째는 '하타'(חטא)입니다. 반사회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회적 범죄와 가깝습니다. 하타는 이웃과의 관계가 비뚤어진 것입니다. 아온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죄라면, 하타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죄입니다. 세 번째는 '페샤'(פשע)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지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무너진 것입니다. 이렇듯 성서가 말하는 모든 죄의 핵심은 '관계의 파괴'입니다. 나와 나 사이의 올바른 관계, 나와 이웃 사이의 올바른 관계, 그리고 나와 하나님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파괴되고 비뚤어진 것, 그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죄입니다. 달리 말하면 죄는 자신에 대한 학대, 이웃에 대한 불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며, 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성서는 죄라고 말합니다.
세례는 바로 이와 같은 죄에서 회개(悔改)하는 것입니다. 즉 이와 같은 죄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로마서 6:6)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가 베푸는 물의 세례는 단순한 정결 예식이 아닙니다. 씻김굿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마가 1:4)입니다. 회개, 즉 돌이킴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내가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 나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아끼며, 하나님과의 신실하고 아름다운 관계 속에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율법 아래가 아니라 이제부터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바울은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이제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다]"(로마서 6:14)고 선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무 대가 없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품으시는 풍성한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죄 사함을 받으려면 성전에 가서 동물을 속죄 제물 바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큰돈이 들어갔습니다. 당시 성전은 가난한 백성의 고혈을 짜서 배를 불렸습니다. 대제사장 일족이 성전 경제를 장악하고 환전과 매매를 통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마가 11:17). 그렇게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소유하고 의를 독점하고 율법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양산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사람들을 성전이 아니라 강가로 나아오라 했습니다. 강은 지천으로 물이 흐릅니다. 요한은 그 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거기에는 돈이 한 푼도 들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하나님의 백성을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게 만든 당시의 성전 제도를 향한 준엄한 심판의 행동이었으며 아무 값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지 않았습니까?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이사야 55:1).
'키라스마'(charisma)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 말을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카리스마란 '많은 사람들을 휘어잡는 능력이나 자질'을 뜻합니다. 우리는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을 볼 때 멋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 카리스마라는 말의 어원이 신약성서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때 그 은혜라는 단어가 바로 '카리스마'(χαρισμα)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베푸시는 은혜, 아무 대가가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은혜, 그리고 결코 다시 거두어가지 않는 선물과 같은 은혜, 그것이 바로 카리스마입니다. 밥티스마, 즉 세례는 바로 이 카리스마, 즉 은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지요. 첫째는 협박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매수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종류의 카리스마를 한국인들은 '칼 있으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것은 주먹이나 돈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세 번째의 카리스마입니다. 사랑으로 감동시켜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변화시킨 것은 그를 끝까지 추적하여 옥에 가두려고 한 자베르 경감의 카리스마가 아니었습니다. 장발장을 뼛속까지 변화시킨 힘은 그가 훔친 은그릇들을 자신이 내어준 거라고 감싼 미리엘 신부의 용서였습니다. 장발장은 이 카리스마에 전율했고, 가슴을 치며 회개했으며, 결국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마태가 전하는 예수님의 세례 기사에서 그 핵심은 그가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또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마태 3:16-17, 마가 1:10-11, 누가 3:21-22).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매우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성서에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빌론 포로기의 예언자 에스겔은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에스겔 1:1)라고 그의 예언서 맨 처음을 시작합니다. 나라 잃고 포로로 끌려가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만 같은 그 절망의 자리에서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사도행전 7:55)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성서에서 '하늘이 열리는' 일은 매우 특별한 사건에만 언급됩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하늘의 비밀이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성서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늘은 비밀로 가득 싸여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인지] 드러"(에베소서 3:9)났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동양의 언어로는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하늘이 열려 하나님의 뜻이 계시(啓示)되고 그 뜻이 땅에 펼쳐져 땅이 새롭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강 물에서 나오실 때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셨습니다. 마가는 '하늘이 갈라졌다'라고 표현합니다(마가 1:10). 그리고 예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분의 비밀이, 그리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드러난 것입니다.
요단강 물에서 나오실 예수께서는 사랑으로 하늘을 우러러보셨습니다. 하늘로부터는 한 소리가 나서 사랑으로 그를 부릅니다. 성령(聖靈)이 비둘기같이 내리며 성부(聖父)와 성자(聖子) 사이의 사랑의 비밀이 드러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서 '신적인 사랑의 순환'이 이루어집니다. 신학적인 상상력으로 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즉 '원을 도는 사랑의 춤'이 펼쳐집니다. 다마스쿠스의 요한의 말처럼,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며,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완전한 사랑이 흘러넘쳐 세상이 존재함이 보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신적인 사랑의 순환이 이루어집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는"(요한 15:5) 사랑의 신비가 일어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사랑의 계시 사건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무엇인지 이렇게 노래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느니라"(이사야 43:1).
하나님은 내가 부자이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높은 자리에 있어야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연약할 때도, 경건하지 않을 때도, 아직 죄인 되었을 때도, 심지어 하나님과 관계가 비뚤어져 원수가 되었을 때도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성서는 말합니다(로마서 5:6-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한1서 4:10)고 말합니다. 세례는 사랑의 계시입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우리의 고난과 아픔과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한없는 연민이고 깊고 푸른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는 이 사랑을 받아들여 내가 새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서울 근교에서 자그마한 생태 마을과 교회를 가꾸어가는 한 목사님의 목공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벽에 문삼석 시인의 <그냥>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주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시였습니다. 너무 좋아서 기록해 놓고 종종 읽어봅니다. "엄만 / 내가 왜 좋아? // 그냥 ······. / 넌 왜 / 엄마가 좋아 // 그냥······." 그렇습니다. 길게, 어렵게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이란 두 음절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관계인 엄마와 자식 사이에 그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입니까? '그냥'입니다. 그냥 엄마와 자식의 사랑입니다. '그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입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더 이상 말을 보탠다면 그것은 군더더기가 될 것입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그냥 사랑'의 계시입니다. 이 사랑의 비밀이 드러날 때 우리 앞에 새 하늘이 열릴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늘 아래 살 수 있다면 앞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시련과 고통이 와도 우리는 생명과 소망과 사랑 속에서 은총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십시오. ("Remember your baptism!") 여러분이 받을 세례를 기대하십시오. 세례는 죄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찬양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합니다(고린도후서 12:9). 그러므로 이제 죄가 여러분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지금부터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합니다. 세례 받은 여러분은, 그리고 세례 받을 여러분은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골로새서 3:12)입니다. '거룩'은 히브리어로 '카도쉬'(kadoshi)인데, 그 뜻은 '구별되다'이지만 이 안에는 '따뜻하다, 밝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세례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따뜻하고 밝은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런 구별된 삶을 사십시오. 마지막으로 드리는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라"(골로새서 3:12-14). 아멘. (2021.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