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사랑

장윤재 목사 (이화대학교회)

- 사무엘상 18:1-5, 요한1서 3:11-18, 요한복음 15: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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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해마다 사순절이 되면 저는 20년 전의 이 일이 떠오릅니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일입니다. 가난한 신학생으로 학교 가까운 한인교회에서 대학부 전도사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7살이던 저의 아들 유진이는 그 '형'을 보러 대학부 예배에 가겠다고 저를 조르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녀석아, 7살짜리 꼬마가 대학부 예배에는 왜 가. 너는 주일학교 어린이 예배에 가야지. 그리고 '형'은 또 뭐야. 너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데...' 주원 군은 제 아들 유진이가 가장 좋아하던 '형'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일학교 마치고 아빠가 있는 대학부에 기웃거리기라도 하면, 그 녀석을 제일 먼저 발견하곤 잡아다가 무등을 태우고 숨바꼭질을 하며 놀아주던 게 주원 군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금방 압니다. 누가 자기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주원 군은 제 아들 유진이의 마음을 사로잡은, 세상의 몇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그 '형'의 죽음을 유진에게 알리지 못했습니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였기 때문입니다.

뉴욕한인교회에 주원 군이 처음 찾아왔을 때를 기억합니다. 훤칠한 키에, 지성으로 반짝이는 눈, 수려한 용모, 깍듯한 매너, 그리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부드러운 말솜씨, 하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 녹아있는 분명한 자기 입장과 소신 .... 누가 보아도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는 청년이었습니다. 멋진 청년이었습니다. 눈부신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원 군은 외모만 아름다운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만남을 거듭할수록 저는 그의 내면세계의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친절하고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품성을 가졌습니다. 장래의 꿈이 외교관이라고 했는데, 저는 그가 정말 외교관으로서 손색이 없는 자질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몸으로 참여하는 남다른 봉사 정신과 강한 책임감의 소유자였습니다. 언젠가 교회를 대대적으로 청소하는 날이었습니다. 주원 군은 제일 힘든 일을 자청했습니다. 4층에 있는 낡고 무거운 가구들을 밖으로 나르는 일이었습니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그는 해가 떨어진 뒤까지 남아 그 일을 끝내고야 말았습니다.

그는 또한 깊은 영적 세계에 대한 갈망과 남다른 감수성을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언젠가 "Santo, Santo, Santo"라는 노래를 제가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남미에서 지어진 성가인데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고 단순하고 짧은 곡입니다. "Santo, Santo, Santo, Mi Corazon Te Adora ...." "거룩, 거룩, 거룩, 내 마음 주를 노래합니다. ...."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풍성한 그 곡을 주원 군은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얼마나 좋아했던지 대학부 모임이 있으면 그 노래를 부르자고 먼저 청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무척 기뻤습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곡을 누군가 나보다 더욱 사랑한다는 사실과 또 단순한 가사와 멜로디 안에 숨겨진 그 곡의 깊은 영성을 또 다른 누군가 깊이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기쁘게 했습니다. 너무도 많은 말과 너무도 많은 논리와 너무도 많은 욕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지칠 때마다 주원 군은 그 노래를 부르며 큰 위로와 안식을 얻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는 지성과 영성과 헌신성을 다 가진 청년이었습니다. 저는 확신했습니다. 이런 청년이 한국의 외교관이 되면 한국에 희망이 있다고.

그런데 주일 새벽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사실 유학생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전화가 새벽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입니다.) 다급한 전화를 받고 응급실로 뛰어가는 제 마음은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의사가 잘못 판정한 걸 거야.' 그러나 병원에 도착해보니 그게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주위에는 저보다도 먼저 주원 군의 친구들이 달려와 있었습니다. 불과 한두 시간 전까지도 그와 함께 있다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망연자실한 친구들, 내 눈으로 보아야 믿겠다고 서로 부둥켜안고 오열하던 친구들, 서울에 전화를 걸었으나 출타 중이신 부모님 대신 전화를 받은 주원 군의 여동생에게 차마, 차마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끊었다 울먹이던 친구들 ... 저는 그날의 새벽을 잊지 못합니다.

그날 저녁 저는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 100가에 있는 주원 군의 아파트 앞에 갔습니다. 여전히 믿을 수가 없어서,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엔 믿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거기에 나갔습니다. 멀리서 검게 그을린 그의 방 창문이 보였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거기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누군가 "신의 사랑을 받는 자는 일찍 죽는다"라고 했습니다. "하늘은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 이른 죽음을 준다"(Byron 경)고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 하나님이 주원 군을 너무 사랑하셔서 일찍 데려가신 것일까? 그렇게 설명하면 될까?

장례식을 치를 때까지도 우리는 주원 군이 정확히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잠을 자다 누전으로 번진 불과 연기를 미처 피하지 못한, 안타까운 사고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뉴욕 소방국 과학수사관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잿더미가 된 화재현장 속에서도 화재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가려내고, 또 희생자가 화상을 당한 부위와 정도를 보고 불길 속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주원 군은 자기 침실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아파트에 있다 살아남아 병원에 입원 중인 자기 친구를 재운 방에서 그 친구와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주원 군의 손과 발은 많은 화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불을 끄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는 증거입니다. 주원 군은 얼굴을 포함해 몸의 전면에 많은 화상을 입었고, 부상 당한 친구는 등에만 조금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원 군이 그 친구를 업고 불길을 빠져나오려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친구가 자던 방에 들어가 정신을 잃은 그를 등에 업고 불이 난 방을 빠져나오려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거실은 화씨 1,500도, 그러니까 섭씨 약 800도의 고열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주원 군이 몸의 전면에 화상을 입은 것은 이때입니다. 할 수 없이 다시 방으로 등을 돌렸습니다. 부당 당한 친구가 등에 화상을 입은 것은 이때입니다. 그리고 둘은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불길과 정면으로 싸우다가 이미 몸의 전면에 많은 화상을 입은 후였고 연기로 숨을 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후 도착한 소방관들은 한 방 안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주원 군이 저 혼자 살겠다고 곧바로 빠져나왔다면 그는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를 위해 자기 몸을 던졌습니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에 비장한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남기십니다. 지상에 계시던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 15:12).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여라." 주님은 행동하는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실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말로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의 온갖 박해를 받으시면서도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뒤에 매우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No one has greater love than this, to lay down one's life for one's friends.) 신학적으로 대단히 놀라운 선언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말씀하셨더라면 우리는 하나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쓰인 그대로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뒤이어 예수께서는 더욱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you.) 친구란 평등한 존재입니다. 위아래의 상하 관계를 우리는 친구라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관계 중에서 친구 관계가 가장 자유롭습니다. 두 사람의 자유롭고 평등한 유대를 우리는 친구 관계라 합니다. 친구는 둘 사이의 기쁘고 자유로운 이끌림입니다. 친구란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고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서로 즐거워하는 관계입니다. 친구의 동의어인 '동무'(companion)란 말에는 "빵을 함께 떼다"라는 문자적 의미가 있습니다. 동무들은 음식을 함께 나누고, 함께 먹으며 기쁨을 공유합니다(샐리 멕페이그, 『어머니 연인 친구』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는 타인의 선(善)을 지향하는 인간의 사랑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는 '비네보렌티아'(benevolentia, 영어 benevolence), 즉 자애로운 마음으로, 이것은 위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둘째는 '컨큐피슨티아'(concupiscentia, 영어 concupiscence), 즉 강한 욕망으로 이것은 타인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마지막 셋째는 '아미시티아'(amicitia, 영어 friendship), 즉 우정으로 평등한 친구 간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는 이 셋 중에서 아미시티아가 최고의 것이라 했습니다.

사실 구약성서가 전하는 다윗과 요나단의 이야기가 바로 이 아마시티아의 이야기입니다.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죽이려고 하는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사무엘상 18:1, 3, 20:17)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줄 정도로 헌신했습니다(사무엘상 18:1-4). 이런 친구 요나단이 전쟁에서 죽자 다윗은 그 유명한 '슬픈 노래'(사무엘하 1:17-27)를 지어 애통하며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사무엘하 1:26)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의 다리 저는 어린 아들 므비보셋을 불러다가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너는 항상 내 상에서 [음식]을 먹을지니라"고 약속했습니다. 성서가 전하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하나입니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엄격한 상하질서의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하던 세상 속에서 가히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위에서부터 주어지는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시혜(施惠)가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평등한 친구 간의 사랑과 같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주님은 '사랑에는 위아래가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친구가 되면 상하 귀천의 장벽이 허물어집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그 이유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한 15:15)고 말씀하셨습니다. 종들은 그들이 종이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하지만 친구는 다릅니다. 친구는 주인의 생각과 행동의 이유를 압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친구에게는 사전에 알려주고 의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종, 즉 '둘로이'(douloi)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친구라 부르겠다 하셨습니다. 당시에 둘로이, 즉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칭호가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둘로스, 즉 하나님의 종이라 불렸습니다(신명기 34:5). 여호수아도 그랬고(여호수아 24:29) 다윗도 그랬습니다(시편 89:20). 그것은 바울이 영예롭게 생각했던 칭호이며(디도서 1:1) 야고보 역시 그랬습니다(야고보 1:1). 성서의 위대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둘로이로 불리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서에는 이와 함께 인간이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는 개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 부르셨습니다(이사야 41:8). 하나님은 모세를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대면하여 말씀하"(출애굽기 33:11)셨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의 지혜서(7:7)에는 지혜가 사람을 하나님의 벗으로 삼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사람들이]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태 11:19)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신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소식을 들으셨을 때에도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한 11:11)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해서는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누가 12:4)고 당부하시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유다가 배신하여 겟세마네 동산으로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고 입을 맞출 때 예수님은 그를 일러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태 26:47-50)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배신하는 제자까지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그를 끝까지 '친구'로 대하셨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는 데 있지 않고 같은 방향을 함께 주시하는 데 있다"(Love does not consist in gazing at each other but in looking together in the same direction)라고 생텍쥐베리는 말했습니다. C.S. 루이스도 "연인들은 보통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각자 상대방에게 빠져들지만 친구들은 나란히 서서 어떤 공동의 관심사에 빠져든다"(Four Loves 중에서)고 말했습니다. 친구 관계를 창조하는 것은 '공동의 비전'입니다. 미국의 퀘이커교도들(Society of Friends)은 공동의 비전으로 유지되는 친구들의 공동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역시 공동의 비전에 기초한 것입니다. 생명의 구원과 안녕을 위한 공동의 프로젝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비전을 공유하는 친구, 즉 동반자(partner)로 부르신 것입니다. 종은 동반자가 아닙니다. 그리스 법률에 따르면 종은 '살아있는 도구'입니다. 주인은 절대로 그에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종은 명령받은 바를 이유나 설명 없이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의 종이 아니라 나의 협력자다. 나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과 어찌하여 그것을 하고자 하는지를 모두 말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모든 비밀을 너희에게 말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인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한 노예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에 파트너가 되는 영예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 하나님의 벗이 되었습니다. 주님과 사랑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사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행동의 의지로 표현된 사랑입니다.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감정도 소중하지만, 사랑의 행동이 필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큰 것을 요구하는 사람을 향해서 본능적으로 '당신에게 무슨 권리가 있어 나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 '당신에게 무슨 권리가 있어 우리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요구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예수께서는 아마도 이렇게 답하실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노라.' 오늘 읽은 신약서신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1서 3:16) 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친구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먼저 행동하신 사랑을 우리에게 요청하신 겁니다. 이것이 우리를 친구라 하신 예수 그리스도 선언의 위대함입니다.

27살의 아름다운 청년 박주원 군은 20년 전 친구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참된 친구가 되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랑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성서 66권을 줄이고 또 줄이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으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주원 군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예수님 가르침의 정수(精髓, essence)를 실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20년 전 그날 새벽, 뜨거운 불길이 치솟던 주원 군의 아파트 안에서 일어난 일을 믿음의 눈으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친구를 등에 업고 나가다 쓰러진 주원 군을 예수께서 자신의 등에 업고 나가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주원아, 내 등에 업히렴. 불길은 내가 정면으로 맞을게. 친구야, 내 등을 꼭 잡어. 내가 너를 업고 나갈 거야. 낮의 해도, 밤의 달도, 그 무엇도 너를 상하게 하지 못할 거야. 친구야, 고맙다, 내 말을 지켜줘서!'

인도의 성자 간디가 어느 날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순간 그의 신발 하나가 벗겨져 플랫폼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기차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간디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하나를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동행하던 사람들은 간디의 그런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묻자 간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하나를 주웠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하나마저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주원 군은 불이 난 그의 방에서 자신의 신발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소중한 자신의 친구였습니다. 기차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다른 신발 하나를 아낌없이 벗어버렸습니다. 그렇게 그는 우리에게 신발 한 짝을 온전히 다 남기고 홀연히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맨발의 주원 군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께서 그를 등에 업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신발을 신지 않아도 되도록, 예수님이 그를 등에 업고 불길을 헤쳐 저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1서 3:16-18)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사랑의 동역자로 부르십니다. 이 춥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함께 생명을 살리고 정의를 가꾸며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사랑을 살자고 부르십니다. 어느 찬송가 가사처럼 날 먼저 사랑하시고 그 귀한 몸을 버려 날 구원하신 나의 진실하신 친구 예수님은(찬송가 90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하며 이 사랑의 기쁨이 내 안에 충만한(요한 15:10-11) 새봄, 거룩한 사순절 되시길 바랍니다. (20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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