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물가에 심겨진 나무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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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예레미야 17:5-8, 갈라디아서 3:9-14, 마태복음 7:15-20

설교문

대학교회 오는 길에 영춘화(迎春化)가 활짝 피었습니다. '봄을 맞이하는 꽃'이라는 뜻입니다. 일본에서는 매화처럼 꽃이 빨리 핀다고 황매라고 하고, 서양에서는 겨울 자스민이라고 합니다. 노란 꽃잎 때문에 많은 분이 개나리로 혼동합니다. 하지만 영춘화는 개나리보다 먼저 피는 봄의 전령입니다.

영춘화가 핀 돌 언덕 맞은편에는 자작나무 가로수가 대학교회로 향하는 교우들을 환영합니다. 물에 젖은 채로도 불에 넣으면 '자작자작' 하며 타들어 간다는 자작나무입니다. 하얀 수피(樹皮, 나무껍질)가 너무나 아름다워 우리 조상들은 무척 귀하게 여겼지만, 워낙 추운 곳에서만 자라는 탓에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나무입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눈부신 설경을 기억하는 분들은 이 나무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자작나무 껍질에 사랑의 편지를 써보셨는지요. 겉보기와 달리 자작나무의 껍질은 무척 연하고 부드럽습니다. 추위를 잘 견디기 위해서 껍질 밑에 지방을 잔뜩 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겨 내서 그 위에 사랑의 마음을 적어 보내면 그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문자메시지보다는 자작나무 껍질 위에 편지를 쓰는 마음이 얼마나 애틋할까요. 밤새 쓰고 지우고, 버리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며 연애편지를 쓰던 때가 기억납니다. 대학교회 오시는 길, 교우들을 환영하는 자작나무는 오늘 하나님께 사랑의 기도편지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손짓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나무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 고난은 나무 이야기를 통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 김안식 목사님의 <목수 예수님>을 다시 읽어봅니다. "목수이셨네, 우리 예수님 / 가난한 시골 목수로 / 어머니 모시고 동생들 돌보느라 / 몹시 고단한 삶을 사셨지." 이렇게 시작하는 기도는 십자가 사건과 나무를 연결합니다. "일일이 쓸어안아 나무 향을 아시고 / 나뭇결의 사연과 옹이진 아픔까지 / 어루만지고 다듬어 / 새 생명을 주신 목수 예수님 / 나무 십자가 지고 고난 길 오르시어 / 마침내 나무에 못 박히신 채 / 잘리고 깎이고 패인 나무의 상처들 / 피로 덮어주셨네." 그리고 목사님은 상처 입은 나무와 같은 자신의 아픔을 호소합니다. "이 몸의 모진 고통, / 마음 찢는 아픔과 잘 못 드는 사연도 / 어루만져 감싸 주실까? / 사람 아들로 사시고 사랑으로 죽으신 / 목수 예수님은."

김안식 목사님은 현재 한 장로교회(강서교회)의 담임 목사님으로 영등포산업선교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계시는데, 10차 항암 중이십니다. 목사님이 직접 밝힌 사연입니다.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며 두려운 밤을 맞이합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새벽, '예수님은 목수이셨네' 시상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보다 나무를 잘 아신 목수 예수님, 내 주님은 쓰러진 나무 같은 이 종도 잘 아시기에 어루만지시고 다듬어 새롭게 일으켜 주실 줄 믿습니다." 목사님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는 '나무' 십자가였습니다. 철로 된 십자가나 보석으로 만든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오늘 신약서신의 말씀처럼, "나무에 달린 자"(갈라디아서 3:13)였습니다. 평생 나무와 함께하셨기에,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예수의 손에는 십자가에 박혀 못 자국이 나기 전에 먼저 목수 일로 생긴 굳은살이 박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도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보내는 능동적 준비 단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런 예수님이기에 모든 나무들을 "일일이 쓸어안아 [각] 나무[의] 향을 아시고 / [각] 나뭇결의 사연과 옹이진 아픔까지 / 어루만지고 다듬어 / 새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나무에 '곡지'(曲枝)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어떤 외부적인 영향 때문에 가지나 줄기가 휘는 것을 가리킵니다. 나무는 본래 굽어 자라지 않고 하나의 줄기로 위로 곧게 자라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지'(一支)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의 곡지를 보면서 무슨 나무가 저리 나약하고 줏대가 없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외부 환경에 따라 제 몸을 이리저리 바꾸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하지만 그건 곡지에 대해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곡지는 나무가 남긴 삶의 투쟁 흔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겠다는 모진 다짐의 결과물입니다. 나무는 일단 뿌리를 내리고 나면 한평생 한 곳에 묶여 사는 게 숙명이기에 주변의 환경에 강하게 맞섭니다. 거기서 "잘리고 깎이고 패인 나무의 상처"와 같은 곡지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휜 나무들을 보고 나약하다고 말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그렇게 곡지가 난 휜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를 아시고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은 이리저리 휘고 잘리고 깎이고 패인 나무의 상처들을 그의 피로 덮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들을 덮어주신 십자가의 예수님은 꼭 느티나무와 같은 분입니다. 어릴 적 고향에서 속이 뻥 뚫린 커다란 나무를 본 기억이 있으신지요. 이름도 모른 채 술래잡기를 하며 놀던 그 큰 나무가 대부분 느티나무입니다. 30년째 아픈 나무를 돌봐주고 있는 나무 의사 우종영 선생은 어릴 적 가끔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날이면 싸리비로 엉덩이를 때리는 어머니를 피해 느티나무 구멍을 몰래 숨어들던 기억을 나누며 느티나무는 워낙에 속이 잘 썩는 나무라고 알려줍니다.(우종영,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가지가 부러지거나 하늘소 같은 벌레가 들어가 작은 구멍이 생기면 걷잡을 수 없이 썩기 시작해서 결국엔 속이 텅 비어버립니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이 나무는 이에 끄떡도 하지 않고 그 육중한 무게를 버텨 낸다는 점입니다. 그런 느티나무를 볼 때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생각납니다.

고 장영희 교수가 이야기입니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소아마비 판정을 받은 후 다섯 살 때까지 누워만 있던 소녀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어머니의 등에 업혀 학교에 갔습니다. 어머니는 두 다리와 오른팔이 마비된 딸을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두 시간에 한 번씩 학교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 어머니에 대해 장영희 교수가 회고한 글입니다. "기동력 없는 딸이 발붙일 한 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 걸고 '운명에 반항'하여 싸운 나의 어머니, 장애는 곧 죄를 의미하는 사회에서 마음속으로 피를 철철 흘려도 당당하고 의연하게 딸을 지킨 나의 어머니... 조금만 도와주면 나도 잘 해낼 수 있다고 제발 한몫 끼워 달라고 애원해도 자꾸 벼랑 끝으로 밀쳐 내는 이 세상에 악착같이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의 속은 얼마나 시커멓게 썩었을까요. 느티나무처럼 속에 얼마나 큰 구멍이 뚫렸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느티나무와 같은 분입니다. 자신의 속은 시커멓게 썩어서 큰 구멍이 뚫렸음에도 "잘리고 깎이고 패인 나무"와 같은 우리들의 상처를 당신의 피로 덮어주십니다. 우리나라 산림청은 '새천년 밀레니엄나무'로 느티나무를 선정했습니다. 오래된 나무가 많고, 동네마다 가장 좋은 자리에 자리할 만큼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느티나무는 평균 500~600년은 보통이고 길게는 1,000년도 삽니다. 그 오랜 시간을 수많은 세대가 오고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을 사람들의 회합 장소로 쉼터로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자신을 다 내어줍니다. 이런 느티나무는 필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느티나무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이화동산에서 느티나무를 보시려면 사회과학대 포스코 관 앞과 과거 기숙사로 쓰던 진선미 관 옆으로 오시면 됩니다. 거기에 있는 느티나무는 남학생들의 눈물을 먹고 자란 나무입니다. 거기까지만 여학생을 바래다주고 발길을 돌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진선미 관 앞에서 어머니와 같은, 그리스도를 닮은 느티나무를 보신 다음에는 조금만 발길을 옮겨 중앙도서관 앞으로 가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산딸나무가 있습니다. 한 전승에 의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쓰인 나무가 바로 이 산딸나무입니다. 산딸나무는 꽃도 십자 모양이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줍니다. 산딸나무의 꽃말은 '희생' 혹은 '견고'입니다. 5~10m 정도 높이의 이 나무는 매년 봄이 되면 잎이 나고 그 위에 흰색의 십자 모양 꽃을 피웁니다. 가을이 되면 딸기 비슷한 열매를 맺고 단풍이 진 후 잎이 다 떨어집니다. 이렇게 매년 죽음이 있고 다음 해에는 새로운 삶이 있습니다. 꼭 십자가와 부활 같습니다.

코로나로 답답한 이 사순절 기간 이화동산을 걸어보시기 바랍니다. 주일예배 후에 바삐 가지 마시고 '자연심방' 하는 기분으로도 걸으셔도 좋습니다. 이화대학은 캠퍼스 전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생태공간입니다. 학교 뒤편이 안산과 연결되어 있고 안산은 또 북한산과 연결되어 있어서 생물학적 다양성이 높습니다. 캠퍼스 안에는 사람과 건물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나무들과 동물들이 존재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화동산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에덴동산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교회 중에 이렇게 많은 나무를 품고 있는 교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 봄에 이화동산 자연심방, 혹은 생태탐방을 떠나보십시오. 제가 동행해드릴 수 있습니다. 저를 따라 '10cm 길, 5cm 길, 운동화 길' 중 선택하시면 됩니다. 여기서 '10cm', '5cm'는 구두 굽의 높이를 말합니다. 제일 짧은 코스는 '10cm 길'인데 대강당에서 중강당을 거쳐 본관 앞에 이르는 약 30분 정도의 길입니다. 그다음은 '5cm 길'인데 이화역사관까지 올라가는 1시간 코스입니다. 만일 운동화를 신고 오시면 약초원까지 약 2시간 이화동산을 탐방할 수 있습니다. 혼자 떠나신다면 우리 학교 용환승, 소지현, 황규호, 류현정 교수님이 제작하신 <이화나무지도>도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이 봄, 내 곁에 항상 있었지만 그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하던 나무들을 만나보십시오.

성서에서 나무는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에덴동산 가운데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요 다른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창세기 2:9) 아담과 하와가 함께 먹은 선악과를 보통 빨간 사과로 묘사하곤 하는데 사과의 꽃말은 '유혹'입니다. 하지만 이 나무의 정식 명칭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방주에 있던 노아는 날려 보낸 비둘기가 감람나무(올리브나무 - 성경에 나오는 감람나무는 실제로 올리브나무를 지칭함) 새 잎사귀를 물고 오자 비로소 땅에 물이 줄어든 줄 알고 희망을 품었습니다.(창세기 8장) 아브라함과 사라는 상수리나무(정확히는 테레빈 나무) 아래에서 세 나그네(천사)를 극진히 대접했다가 늦은 나이에 자식 이삭을 잉태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창세기 18장) 야곱은 막내아들 요셉을 가리켜 그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창 49:22)라고 축복합니다. 물이 귀한 이스라엘 땅에서 나무가 샘 곁에 있다는 것은 축복의 상징입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뵙고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자가 되었습니다.(출애굽기 3장)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자가 되심을 선포하면서 "숲속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역대상 16:33)한다고 찬양합니다. 욥은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보호해주던 3중 울타리, 즉 재산과 자녀와 건강이 다 사라진 이후 절망 속에 있다가 도끼에 찍혀도 다시 움이 나서 가지가 돋고 뿌리가 땅속에서 늙어도 물기운에 새로운 움이 돋는 것을 보고서 희망을 봅니다.(욥기 14:7-9) 에스겔은 각종 새가 가지 그늘에 깃들이는 거대한 백향목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와 같다고 예시했습니다.(에스겔 17:22-24)

신약성서에서는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나무에 비유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요한 15:5) 일찍이 이사야는 이 메시아의 오심을 예언하면서 그는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이사야 53:2) 같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군중 속에서 예수님을 보고자 돌무화과나무에 올랐다가 그와 그의 집이 구원을 받는 복을 누렸습니다.(누가 19장) 성서 시대 돌무화과나무는 사람을 지정해 관리할 정도로 귀한 나무였는데, 높이가 10~13m로 크게 자라는 이 나무는 고맙게도 밑쪽에서부터 가지가 나 있어 키 작은 사람들도 쉽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돌무화과나무가 자신의 몸을 빌려주었기에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그의 인생이 변화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돌감람나무와 같은 우리가 참감람나무인 예수님께 접붙임을 받아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로마서 11:17)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서의 맨 마지막 요한계시록에는 생명나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스겔(47장)처럼 요한은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흐르는 "수정같인 맑은 생명수의 강"을 봅니다. 그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요한계시록 22:1-2)하는 것을 봅니다. 여기서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보십시오. 성서는 이렇게 창세기의 생명나무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로 끝납니다. 성서의 기자들은 깊은 생태적 감수성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생명의 역사를 나무를 통해 이야기합니다.(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성경 속 나무로 느끼는 하나님의 현존> 참조)

성서는 우리도 나무처럼 푸르게 살라고 말합니다. 시편 1편의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편 1:1-3) 예레미야는 복 있는 사람이 '물가에 심어진 나무'라고 말합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 본문에서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예레미야 17:8)라고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와 예레미야는 구체적으로 어떤 나무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 혹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라고 했을까요?

학자들은 그 나무가 버드나무일 것으로 봅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버드나무는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처럼 뜨거운 나라에서도 잘 자라는, 생명력이 대단한 나무입니다. 실로 구약성서에는 버드나무가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레위기 23:40, 에스겔 17:5-6, 욥기 40:22 등) 그중에서 대표적인 곳은 이사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시며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이사야 44:3-4)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나무는 뿌리가 물속이나 진펄과 같이 공기가 부족한 곳에서는 견디지 못합니다. 하지만 버드나무는 예외입니다. 버드나무는 강기슭에서 뿌리 일부가 물에 씻겨도 끄떡없고 오히려 더 잘 삽니다. 줄기만 손상되지 않으면 가지를 아무리 잘라내어도 또다시 돋아나서 절대 말라 죽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기독교 복음의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최영전, <성서의 식물> 중에서) 우리나라에도 43종이나 있는 버드나무는 풍치수(風致樹)로도 매력적입니다.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은 유명했습니다. 예로부터 이 나무는 피부병이나 통증 완화제로 많이 썼고 문학 작품과 그림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과거에는 버드나무 가지, 즉 양지(楊枝)로 양치질도 하고, 겨울에 아이들이 팽이치기 채찍으로도 사용했습니다. 버들피리도 즐거운 놀잇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 버드나무가 바로 성서가 말하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물가에 심어진 나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화의 창립자인 스크랜튼 선생님을 비롯하여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온 수많은 선교사가 묻힌 곳도 양화진이라는 사실이 기억납니다. 양화진(楊花津), 글자 그대로 이 이름은 버드나무가 우거져 버들꽃이 필 무렵 장관을 이루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바로 그곳에 성서가 말하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혹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신앙의 선각자들이 계신다는 사실이 오늘 아침 참 감동적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나무입니까? "시냇가에 심은 나무"(시편 1편)입니까? "물가에 심어진 나무"(예레미야 17장)입니까?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변]"(요한계시록 22장)에 심긴 나무입니까? 태백의 검룡소와 오대산의 우통수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나와 남한강을 이루고, 내금강의 단발령에서부터 흘러내린 물이 북한강을 이루어 둘이 만나 큰 한강을 이루듯이, 여러분도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온 유장한 생명의 강변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사철 푸르른 생명의 나무로, 하나님의 의의 나무로 살아가는 존재입니까?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이사야 61:3)입니까?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올리브]나무"(시편 52:8)입니까? "여호와의 집에 심[겨]...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시편 92:13)하는 나무입니까?

사람이 노년에도 종려나무와 백향목처럼 사철 푸르고, 수액이 넘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행복이겠습니까. 더욱이 백향목처럼 하나님의 성전의 재목이 되고, 종려나무처럼 메시아 예수를 맞이하는 쓰임새가 된다면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그런 삶을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생명 시냇가에 심기는 것입니다. 생명의 강변에 심어진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에 심겨, 하나님의 뜰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심겨 있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느니라]."(마태 7:16-17) 우리는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는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겨울 차가운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두 손 펼치고 서 있는 겨울나무는 마치 기도의 본을 보여주는 수도사들 같습니다. 봄 나무는 생명에 대한 외경과 부활의 기쁨을 가르칩니다. 우리 예수님은 목수이셨습니다. 모든 나무를 아시고 일일이 쓸어안아 그 향도 아시고 나뭇결에 패인 사연과 옹이진 아픔까지 아시고 그것을 어루만져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무에 못 박히신 채 잘리고 휘고 깎이고 패인 나무들의 상처를 당신의 보혈로 덮어주신 분입니다. 이 봄 부활절 오기 전에 중앙도서관 앞 산딸나무 아래에서 그분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봄 아름다운 이화동산에서 각자의 사연을 가진 많은 나무 친구들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오늘 부른 개회 찬송가(32장)처럼, "화려한 동산 무성한 저 수목 다 아름답고 묘하나 순전한 예수 더 아름다워 봄 같은 기쁨 주시네"라는 찬송이 절로 입에서 나오기를 바랍니다.

"의로운 사람아,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송백처럼 치솟아라. 우리 야훼의 집안에 심어진 자들아, 하느님의 뜰에 뿌리를 내리고 우거지거라. 늙어도 여전히 열매 맺으며 물기 또한 마르지 말고 항상 푸르러라. 그리하여 나의 반석이신 야훼께서 굽은 데 없이 올바르심을 널리 알려라."(시편 92:12-15, 공동번역) 시편 기자가 선포하는 이 축복의 말씀이 오늘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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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