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부활주일설교] "내가 주를 보았다"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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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49:1-3, 고린도후서 5:14-17, 요한복음 20:11-18 -

안식일 후 첫날, 그러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달력으로는 주일 일요일 아직 동이 트기도 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무슨 용기로 거기를 향했을까요? 그런데 무덤에 와서 보니 무덤 문을 막고 있던 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너무 놀란 막달라 마리아는 한걸음에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요한 20:2) 일렀습니다. 깜짝 놀란 베드로와 요한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음질하여 무덤에 이르러보니 정말로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고]"(요한 20:9)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의 이야기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20:11-18절은 성서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게 묘사되는 이야기의 하나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이야기를 일컬어 모든 문학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후(邂逅)의 장면이라고 불렀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울면서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서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었지만, 눈물이 빗물처럼 흐르는 마리아의 눈에는 천사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한 20:14)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뒤에 서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돌이켜 그가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그분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더라"라고 성서는 기록합니다. 어떻게 마리아가 예수님을 몰라볼 수 있을까요? 한평생 그만 바라보고 따라온 마리아 아닙니까.

아마도 눈물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단순하지만 마음을 찌르는 사실입니다. 마리아는 눈물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눈물이 그의 눈을 가리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 마음속에 깊은 슬픔이 깃들고 속이 텅 빈 듯한 상실함에 몸부림칩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흐릅니다. 아동문학가 정채봉 선생의 말처럼 이 세상에 슬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백두산 천지에 올라서 "아! / 이렇게 웅장한 산도 / 이렇게 큰 눈물샘을 안고 있다는 것을 / 이제야 알았습니다"(<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 백두산 천지에서>)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때문에 흐느끼고, 상실감에 웁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우리의 슬픔이 자기 자신을 위한 슬픔임을 압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웁니다. 자기 슬픔에 웁니다. 자기 연민에 웁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때론 그 눈물이 우리의 앞을 가립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잃어버린 충격과 슬픔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셔도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만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답합니다.(요한 20:15) 아니, 자기 혼자 힘으로 그 무거운 시신을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겠다는 말입니까! 그의 무모함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너무도 깊었기에 그분을 잃어버린 슬픔에 지금 마리아는 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2천 년 역사에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왜곡된 인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딸을 낳으면 흔히 짓는 이름이 있었습니다. 마리아입니다. 복음서에는 여러 명의 마리아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마르다의 여동생 마리아,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 마리아, 요셉의 어머니 글로바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등입니다. 성서에 의하면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었다가 예수님에 의해 고침을 받고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습니다.(누가 8:2) 이후 인생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그분을 따라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는 골고다 현장까지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모든 남자 제자들이 다 도망친 이후에도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와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복음서가 모두 입을 모아 증언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도 미처 깨닫지 못한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증언하며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된, 사도 중의 사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마리아를 심하게 왜곡시킨 사람이 있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Magnus, 540~604)입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기 전까지 성경은 너무도 귀하고 비싼 책이었습니다. 오직 사제와 학자들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직접 볼 수 없는 일반인들은 사제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서기 591년에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설교하면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40개의 설교> 중 제33번) 그가 '일곱 귀신' 들린 것은 일곱 가지 큰 죄를 지었다는 뜻이고, 그중에서 가장 큰 죄는 창녀로서 지은 성적 문란이었다고 해석했습니다. 교황은 마르다의 여동생 마리아, 갈릴리 나인성 근처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인(누가 7:37), 그리고 베다니 한센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마태 26:7)을 혼합하여 성서와 전혀 상관없는 가공(架空) 마리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귀신들림을 음란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경우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절대로 틀릴 수 없다고 믿던 사람들은 이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 결과 초대교회 위대한 지도자요,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인 막달라 마리아는 졸지에 창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 이후 1,400년 동안 오명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이나 멜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뿐만 아니라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도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묘사했습니다.

다행히 지난 2018년에 개봉한 가스 데이비스(Garth Davis) 감독의 <막달라 마리아 : 부활의 첫 증인>은 달랐습니다. 작은 어촌 마을 막달라에 사는 마리아에게 가족은 정혼을 강요합니다. 마리아가 거부하자 가족은 마리아에게 마귀가 씌었다고 판단해 고문에 가까운 퇴마의식을 행합니다. 그래도 마리아에게 변화가 없자 가족은 기적을 행하기로 유명한 랍비 예수님을 불러옵니다. 자신이 악령에 시달린다는 마리아의 말에 "넌 악령에 씌운 게 아니다, 마리아야"라고 말해주는 예수님에게 감동한 마리아는 이후 평생 그를 따라 다닙니다. 그동안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해석은 성녀(聖女)/창녀(娼女)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마리아를 예수님의 아내로까지 해석했는데 이 역시 같은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데이비스 감독의 영화처럼 막달라 마리아를 그저 베드로와 똑같은 사도로 해석하기 위해 무려 2천 년이나 걸렸다는 사실이 마음 아픕니다. 교황청은 2016년이 되어서야 마리아를 '사도 중의 사도'로, 부활한 예수의 첫 증인으로 인정했습니다.

자기 슬픔을 못 이겨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주님은 "마리아야"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요한 20:16) 그때야 비로소 마리아가 그를 알아보고 "랍오니"라고 부르니 이른 '선생님'이라는 뜻이라고 요한은 해설합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왜 울고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가 아니라 "마리아야"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그가 주님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라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 그 목소리가 마리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저 멀리 있는 '우주의 주재자(主宰者)'에게 관심을 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주와 신의 관계와 다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오셔서 가장 친밀한 방식으로 우리 삶의 구석구석까지 보살펴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구약성서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는]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이사야 49:1)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 10:14-15)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한 10:3)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지금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마리아 단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호칭으로 그를 그의 슬픔으로부터 그 슬픔 밖으로 불러내셨습니다. "마리아야!"

미국의 흑인 철학자 제임스 볼드윈이 1961년에 쓴 책 <Nobody Knows My Name>을 보면 백인 문화가 지배하는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경험하는 아픔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것은 정확히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의 이름을 알지 못하거나 불러주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공동체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하지만 자기의 이름이 알려지고 불리면 그는 그 안에 속하게 됩니다. 이화의 김옥길 총장님도 그렇게 학생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셨다고 하지요. 불시에 총장님에게 자기 이름이 불린 학생은 하나같이 자기 존재의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고 말았습니다. 사실 교회라는 이 '부활절 공동체'도 그 구성원들이 선한 목자가 그들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듣는 공동체입니다. 부활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닙니다. 부활은 다시 사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부활은 인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부활은 마리아처럼 체험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빈 무덤은 사망 권세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라는 추상적인 진실을 넘어섭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의 빈 무덤은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만나는 영생의 자리가 됩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처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고린도전서 15:14-15a)라고 천명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부활은 여전히 건조한 교리적 신앙고백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신앙의 문제는 마지막 때의 부활만 아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베다니의 마르다가 고백한 교과서적인 요리문답과 비슷합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 찾아오셔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한 11:24)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분명 부활을 믿었지만 마지막 날 때라고만 알았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를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 11:25-26)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생명은 마지막 때에 가서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생명은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지금 여기에서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능력과 체험하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의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죽은 다음에야 새롭게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부활의 능력으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신약서신 말씀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Christ is risen! Christ is risen indeed!) 이것이 부활절의 인사입니다. 이 기쁜 소식이 오늘 우리의 인사입니다. 빈 무덤 앞에서 주님의 현존을 체험한 막달라 마리아는 드디어 "내가 주를 보았다"(I have seen the Lord)라고 고백합니다.(요한 20:18) 예수 부활의 선포는 막달라 마리아의 "내가 주를 보았다"라는 바로 이 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이 말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논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보편적 이념이나 추상적 교리나 유령과 같은 모습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의 지각을 뚫고 우리의 슬픔을 지나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으로 오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슬픔과 아픔 그리고 자기연민에 몸부림치고 계십니까.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분 뒤에 서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의 입에서도 부활의 첫 증인이 된 막달라 마리아처럼 "내가 주를 보았다"라는 경이로운 고백이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가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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