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변증가로 잘 알려진 C.S루이스의 주요 작품을 번역한 홍종락 작가가 최근 기윤실 '좋은나무'에 기고한 글에서 루이스가 프시케와 큐피드 신화를 자기식으로 고쳐 쓴 작품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를 살펴보면서 루이스의 신화에 대한 입장을 분석해 눈길을 끌었다.
그에 따르면 루이스는 신화를 단순한 역사나 악마적 몽상 혹은 성직자들의 사기 따위로 생각하지 않았다. 신화에도 수준이 있다면 루이스에게 최고의 신화는 "비록 미광이지만 어떤 참된 신적 진리의 과언이 인간의 상상력에 떨어진 것"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신화를 실재와 맞닿게 하는 유용한 도구로 여기는데 홍 작가는 "순수 수학은 성공한 사유의 전형이다. 하지만 우리가 체험하는 실재들은 모두 구체적인 고통, 쾌락, 개, 사람이다"라며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고통을 참고 그 쾌락을 즐기는 동안에는 쾌락, 고통, 인간성을 지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적 파악 작업을 시작하면 구체적인 실재들은 사례나 실례의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했다.
홍 작가에 의하면 실재를 개념으로 파악할 때 나타나는 이러한 비극적 딜레마를 부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로 루이스는 신화를 들고 있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위대한 신화를 즐기는 가운데 추상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구체적인 대상으로 체험하는 상태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는 입장이다.
홍 작가는 "루이스는 프시케 이야기도 그런 위대한 신화의 하나라고 본 것 같다. 앞에서 루이스가 프시케 이야기의 작가 "아풀레이우스의 이면을 파고든다"라든가 "아풀레이우스는 이 이야기의 창작자가 아니라 전달자"라고 한 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라며 "그는 이 이야기가 "구체적인 상황에 매이지 않는" 보편적인 어떤 실재를 전달하고 (한편으로는 가리고) 있으며,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비틀어 바로 그 실재를 밝히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라고 했다.
또 루이스는 기독교의 핵심을 신화라고 보는데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그는 "죽는 신을 다룬 옛 신화가 여전히 신화인 채로 전설과 상상의 하늘에서 역사의 땅으로 내려온다. 그 일은 구체적인 시간, 구체적인 장소에서 벌어지고, 정의할 수 있는 역사적 결과들이 그 뒤를 따른다. 언제 어디서 죽는지 아무도 모르는 발데르나 오시리스 같은 신을 지나 (모두 순서에 따라)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역사적 인물에게 이릅니다. 그것은 사실이 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신화로 존재한다...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역사적 사실에 동의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가 모든 신화에 부여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미 사실이 되어버린) 그 신화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홍 작가는 이에 "적어도 루이스에게 있어서 신화를 받아들이고 그 매력에 빠지는 경험은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준비 과정이 되어주었다"며 "어릴 때부터 기독교의 복음을 정답으로 '주입받은' 사람의 경우에도 이전의 모든 신화를 완성하고 "이전의 모든 신화적 종교들을 온전히 구현하는" 신화로서의 기독교를 볼 수 있다면, 그가 받아들인 기독교를 더욱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고, 그가 그것의 매력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거부할 여지는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또 "사실, 율법이나 신화만이 아니라 그 외의 많은 면에서도, 모든 세대, 모든 개인은 진리를 새롭게 재발견해야 한다"며 "선대에 밝혀지고 드러난 '정답'을 후대가 그대로 물려받으면 좋겠지만, 그게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역사가 되풀이되고 오류가 반복되고 깨달음과 재발견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대목에서 루이스가 남긴 아래의 글을 인용했다.
"산다는 건, 너무나 오래되고 단순해서 말로 풀어놓으면 시시하고 뻔한 소리처럼 들리는 진리들을 알아가는 과정이지 싶네.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들릴 수밖에 없지.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진리들은 실제로 가르칠 수가 없고 각 세대가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거라네."(『당신의 벗, 루이스』, 84-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