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유럽인들이 내 이름을 틀리게 불렀다. 내 이름은 여영, 유정이 아니라 여정이다. 하지만 오늘 다 용서한다."
현지시간 25일(월) 열린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배우가 남긴 재치 있는 수상 소감이다.
배우 윤여정은 앞서 현지시간 지난 11일(일)엔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여우주연상도 받았는데, 이때도 "고상한 척 하는 영국인들이 날 알아봐 줘 고맙다"는 유머 가득한 수상 소감으로 화제를 남겼다.
윤여정은 아시아계 배우론 처음으로 아카데미 영화제 연기부문에서 수상해 그야말로 한국 영화는 물론 세계 영화사에 새 역사를 썼다.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기생충>은 비영어권 영화론 아카데미 사상 처음으로 작품상을 수상했다. 연출자인 봉 감독도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올해 한국 배우가 최초로 연기상을 수상했으니, 오늘만큼은 국뽕(?)에 취해도 좋겠다.
사실 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수상은 일정 수준 예상할 수 있었다. 앞서 미국 배우 조합상 영화부문 여우조연상,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여우조연상 등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쓸어 담다'시피했고 오스카 트로피는 최종 종착역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지 않다. 윤여정이 출연한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 온 한인 가정의 이야기다. 당시 한국은 그야말로 이민 러시였다.
기자는 그때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중학교 3학년 때 단짝친구가 부모님 따라 이민을 떠났고 다음해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수학 선생님이 교사를 그만두고 역시 미국으로 떠났다. 아마 그 시절 성장기를 보낸 이들이라면 이런 경험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주인공 제이콥(스티븐 연)은 한인 이민인구가 급증하는 데 주목한다. 제이콥은 농장을 개척해 고추 등 한국인이 주로 먹는 채소를 재배하려 한다.
처음엔 일이 쉽게 풀리는 듯 했다. 그러나 이내 지하수는 바닥 나 버려 집에서 쓸 물을 농장에 댄다. 겨우 작물을 수확했지만, 이번엔 판로를 약속했던 한인이 거래선을 막아 버린다. 이러자 제이콥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쏘아 붙인다.
"대도시 사는 한인들은 믿을 존재가 못돼!"
아내 모니카(한예리)는 외로움을 달래려 현지 교회에 나간다. 그러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안 나가느니만 못해 보인다. 무엇보다 백인 교인의 차별적인 시선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모니카는 차라리 공장 일을 나가기로 결심한다. 아이들만이라도 교회에 보내지만, 이것도 신앙이 이유가 아니라 딱히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어서다.
질긴 생명력 보여준 한인들
이렇게 영화 <미나리>는 고국을 떠나 낯선 미국 땅에 온 이민 1세대의 삶을 제이콥·모니카 가정을 통해 보여준다. 극중에서 제이콥과 모니카는 자주 갈등한다.
둘의 갈등은 이민 생활의 신산함에다 서로를 의지하면서도 언제 척질지 몰라 불안한 마음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한인 공동체의 부조리에서 비롯된다. 그런데도 한인들은 특유의 억척스러움으로 미국 땅에 정착했다. 흡사 질긴 생명력을 가진 ‘미나리'처럼.
지금 미국 한인 공동체는 80년대와는 비교 불가다. 이게 다 영화 속 제이콥·모니카 가정이 낯선 미국에서 온갖 신산함을 견디며 일군데 따른 열매다. 이 영화 <미나리>의 가치는 80년대 이민 러시로 미국에 와 뿌리내린 한인 사회를 조명한 데 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다루는 한국 언론의 관심은 온통 배우 윤여정의 각종 영화제 수상 소식뿐이다. 그와 정비례해 한인들이 낯선 땅에서 얼마나 불안하고 때론 위험천만한 삶을 살았는지는 관심 밖인 듯하다. 그래서 아쉽다.
한인 이민자 사회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진 점도 아쉽다. 극중 모니카는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한인 동료에게 한인교회를 개척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묻는다. 이때 동료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는다. 한인교회에 상처 받은 이들이 영화의 배경인 아칸소주로 온다는 것이다.
한인 사회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크다. 교회는 단순히 예배드리러 가는 곳이 아닌 한인들의 사랑방이나 다름없다. 그곳에서 이민 생활의 고단함도 달래고, 정보교환도 하고, 고향의 추억을 나누며 인간관계를 다져나간다. 그러나 문제가 터지는 곳도 바로 교회다. 교민 사회에서 벌어지는 불화나 갈등, 부조리의 진원지가 사실상 교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영화가 한인교회에서 마음 다친 이들의 아픔을 조명해 줬다면 고국의 관객에게 더 큰 여운을 남겼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지우기 어렵다.
배우 윤여정의 연기는 한국 할머니 특유의 정서를 잘 표현해 냈고, 그래서 극찬 받을 만 하다. 여기에 영화를 보는 한국 관객들이 8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동포 한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이 영화를 통해 주목해 주었으면, 그래서 동포애를 느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인미답의 영역을 개척한 배우 윤여정, 그리고 한 세대 전 낯선 이국에서 온갖 차별을 감내하며 한국인 특유의 ‘질긴' 생명력을 보여준 교민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