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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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46:3-7, 베드로전서 5:1-7, 마태복음 15:1-6

설교문

우리나라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2019년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은 83.3세입니다. 남자는 80.3년이고, 여자는 86.3세로 남자보다 평균 6년이 더 깁니다. 전 세계에서 여자의 평균 기대수명이 가장 높은 국가는 일본(87.3년)으로 한국보다 단 1년이 많을 뿐이고, 남자의 평균 기대수명이 세계에서 가장 긴 국가는 스위스(81.9년)인데 한국보다 단 1.6년이 많을 뿐입니다. 이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장수하는 나라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한국은 고령사회로 진입했습니다. UN은 65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인구의 7%를 차지하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1% 이상이면 초고령 사회로 구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14%를 넘어 이미 고령사회가 되었고, 오는 2030년이면 24.3%로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며, 2060년에는 일본까지 앞질러 세계 최장수 국가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제는 단지 '잘 사는 것'(well-being)과 '잘 죽는 것'(well-dying)만이 아니라 '잘 늙어가는 것'(well-aging)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할 때입니다. 그래서 어버이 주일인 오늘은 '나이듦'에 대해서 성서는 무어라 말씀하는지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우리나라 실학 사상가의 태두라 할 수 있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은 다음과 같이 "노인의 열 가지 좌절"이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낮에는 꾸벅꾸벅 졸지만, 밤에는 잠이 오지 않고, 곡할 때는 눈물이 없고, 웃을 때는 눈물이 나며, 30년 전 일은 기억하면서, 눈앞의 일은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는 없고, 이빨 사이에 다 끼고, 흰 얼굴은 검어지는데, 검은 머리는 희어지네." 그러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은 반대로 이런 것들이 실은 '좌절'이 아니라 '즐거움'이라고 다음과 같은 해학(諧謔, humor)을 보였습니다. "대머리가 되니 빗이 필요치 않고, 이가 없으니 치통이 사라지고, 눈이 어두우니 공부를 안 해 편안하고, 귀가 안 들려 세상 시비에서 멀어지며, 붓 가는 대로 글을 쓰니 손 볼 필요가 없으며, 하수들과 바둑을 두니 여유가 있어 좋다."

구약성서 창세기 5장의 족보에 의하면 노아 시대 이전 사람들은 아주 오래 살았습니다. 아담은 930세, 므두셀라는 969세, 노아는 950세까지 살았습니다.(창세기 7:6; 9:28-29)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인간의 수명을 120세로 제한하셨다고 성서는 말합니다.(창세기 6:3) 이후 시편 90편 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 슬피 노래했습니다. 레위기의 '서원에 관한 규정'(27:1-8)을 보면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노인은 60세부터였습니다. 역대기를 보면 유다를 다스린 14명의 왕의 평균 수명은 44세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서 나이듦은 대개 부정적으로 그려집니다. 히브리어로 '늙은' '자켄'(ןקז)인데 이것은 턱수염을 가리키는 '자칸'(zaqan)에서 파생된 말로 명사로 쓰일 때는 나이 든 사람, 즉 노인을 가리킵니다. 구약성서는 사람이 자켄이 되면 육체적인 힘이 쇠약해지고(시편 71:9), 시력이 약해며(창세기 27:1; 48:10, 사무엘상 3:2; 4:15), 맛이나 소리의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고(사무엘하 19:35), 생식 능력이 없어진다(창세기 18:11-12, 열왕기하 4:14, 룻기 1:12-13)라고 말합니다. 인생이 덧없음을 가르치는 전도서에서는 청년들에게 장치 닥칠 '곤고한 날'(개역개정), 즉 '고생스러운 날'(새번역)과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개역개정), 즉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에 대해 경고하면서 젊을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도서 12:1) 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구약성서에는 나이듦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구절들도 많습니다. 육체적 힘은 쇠약해지나 세상의 질서와 인간의 본질을 통찰하는 지혜는 노인의 특징으로 봅니다. 특히 노인의 백발은 젊은이의 힘과 대비되는 아름다운 특징이 됩니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잠언 20:29)라고 합니다. 백발(白髮), 정확히 회백색의 모발을 이렇게 '아름다움'(히브리어 하다르, הדר - 영광)이라고 말하며 그것은 인생을 공의롭게 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이라고 말합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잠언 16:31)

그런데 성서는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되었다고 해서 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니라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인 <70인 역>에 포함된 집회서(Ecclasiasticus)에는 나이 든 사람이 해야 할 의무와 함께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젊었을 때 아무것도 모아두지 않은 네가 늙어서 무엇을 찾을 수 있으랴?"(집회서 25:3) 여기서 말하는 '젊을 때 모아둘 것'은 재물이 아니라 인생의 경험입니다. 젊어서 풍부한 인생의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늙어서 젊은이에게 지혜로운 충고를 해줄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사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모두 어른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삶의 아픔과 깊이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 시련과 인내의 시간, 그리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선 경험이 없는 사람은 젊은이들에게 삶의 안내자가 되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집회서는 노인들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연장자여, 분별있게 이야기하되 음악을 방해하지 말라."(집회서 32:3) 노인은 젊은이에게 좋은 충고와 지혜를 들려줄 의무가 있지만 '분별있게' 이야기해야 하고 자신의 연설로 분위기를 망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입니다. 소위 라떼, 즉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경험담으로 젊은이들의 사고를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공동기도문 안에는 집회서의 이 말씀을 깊이 새겨들은 <어느 17세기 수녀의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정말로 늙어 버릴 것을 저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저로 하여금 말 많은 늙은이가 되지 않게 하시고 특히 아무 때나 무엇에나 한마디 해야 한다고 나서는 치명적인 버릇에 걸리지 않게 하소서. 모든 사람의 삶을 바로잡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저를 사려 깊으나 시무룩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남에게 도움을 주되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제가 가진 크나큰 지혜의 창조를 다 이용하지 못하는 건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만 저도 결국엔 친구가 몇 명 남아 있어야 하겠지요. 끝없이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지 않고 곧장 요점으로 날아가는 날개를 주소서... 제 기억력을 좋게 해주십사고 감히 청할 순 없사오나 제게 겸손된 마음을 주시어 제 기억이 다른 사람의 기억과 부딪칠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들게 하소서. 나도 가끔 틀릴 수 있다는 영광된 가르침을 주소서... 제가 눈이 점점 어두워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저로 하여금 뜻하지 않은 곳에서 선한 것을 보고 뜻밖의 사람에게서 좋은 재능을 발견하는 능력을 주소서. 그리고 그들에게 그것을 선뜻 말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주소서. 아멘." 이런 기도를 드리는 노인이라면 젊은이들이 먼저 다가와 고민을 털어놓을 것 같습니다.

욥기도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은 아니"(욥기 32:9)라고 말합니다. 노인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전통적 지혜가 항상 옳은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욥기는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다]"(욥기 12:13)라고 말합니다.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에 노인들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지혜가 항상 옳다고 여기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도 오늘의 복음서 말씀에서 "장로들의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질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5:1-11). 우리는 "장로들의 전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도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늙은 자들의 판단을 빼앗[기도]"(욥기 12:20b)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교독문인 시편 71편 기자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수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편 71:18)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노년의 베드로와 노년의 바울을 통해 성서가 말하는 건강한 나이듦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본문인 베드로전서 5장은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노인이 되어 초대교회의 장로들(프로스뷔테로스, πρεσβύτερος), 즉 세상 경험과 연륜이 풍부한 교회의 연장자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베드로전서 5:1-3) 베드로는 여기서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로, 연장자들이 맡은 무리는 특정인의 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양 무리'임을 분명히 하면서 연장자들은 주님의 양을 돌보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양 무리를 돌보는 일은 기꺼이, 자발적으로 하는 즐거운 헌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지시하고 명령하고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본이 되라"는 것, 즉 삶으로 모범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노년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지요. 노인은 자연스레 자신이 이룬 업적과 무용담을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평생 복음을 전하며 많은 교회를 세운 바울은 노년이 되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며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형제[자매]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을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12-14) 평소 좋아하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 바울의 인생 황혼기의 고백이라는 점이 놀랍습니다.

사람은 노년이 되면 배움을 쉽게 놓아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자신의 경험담으로 하나님을 가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인은 노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모범을 보여줍니다. 밤을 새워 인생 무용담을 펼쳐도 모자랄 바울이지만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을]... 향하여... 달려가노라" 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새로운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자랑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자랑은 모든 것을 이미 성취했다는 자만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년의 바울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아직도 달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인생의 노년은 이전의 자랑과 추억에 사는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 주님을 새롭게 경험하며 날마다 새로운 존재가 되어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린도후서 5:17)이라고 선언한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2-24)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에서는 나이를 '먹는다'라고 합니다. 이 지구상에는 약 3천 종의 언어가 있는데 나이를 밥처럼 먹는다고 말하는 민족은 아마 우리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다'라는 말 역시 '먹는다'에서 나온 것입니다. '들다'의 높임말로 '드시다'와 '잡수시다'가 있는데 이 역시 '먹는다'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여섯 대의 컴퓨터를 동시에 켜놓고 시대를 읽은 이어령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는다. 그리고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 같은 동양 문화권인데도 중국 사람들은 나이를 '첨'(添)한다고 하고 일본 사람들은 '도루'[取]한다고 하는데 유독 우리만이 먹는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무시무시한 시간의 신이지만 한국에 오면 별 수 없이 떡국과 함께 먹혀 버린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한국인은 밥과 나이만 먹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한국인은 마음도 '먹습니다.' 다시 이어령 선생님의 통찰입니다. "그렇다. 음식이나 시간만이 아니다. 한국인은 마음도 먹는다.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무엇이든 먹을 수가 있다. 돈도 먹고, 욕도 먹고, 때로는 챔피온도 먹는다. 전 세계가 '한 점 잃었다(로스트)'고 하는 축구 경기에서도 우리 '붉은 악마'는 '한 골 먹었다'고 한다. 어디에서든 먹는다는 말은 다 통한다. 심리면에서는 '겁 먹고', '애먹는다', 소통면에서는 '말이 먹힌다', '안 먹힌다', 경제면에서는 또 경비가 '얼마 먹었다', '먹혔다'고 한다. 사회면에서는 '사횟물을 먹었다' 한다."

아마도 우리의 어버이(조상)들은 무척 배고픈 삶을 살았기에 나이도 먹고, 마음도 먹는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말 안에 인생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나이도 먹고, 마음도 먹는다면 나이듦은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나이를 '먹는가'는 어떤 마음을 '먹는가'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성서는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명기 34:7)라고 했습니다. 사명을 가진 자는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늙었을 때가 아니라 사명을 완수했을 때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먹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지나간 추억 속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갈 것인지는 여전히 내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의사 빅터 프랭클은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사명, 특히 매우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사명을 가졌음을 자각하는 노인들은 정신적으로 건강할 뿐 아니라 육체적 질병에도 잘 안 걸리고 그래서 의욕 없는 생활과 거리가 멀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살아야 합니다. 늙어서도 열매를 맺으며 마르지 않는 '늘 푸른 나무'처럼 살아야 합니다. 시편 92편 기자가 노래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집에 심겨진 종려나무와 같이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한]"(시편 92:14) 의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구약성서의 법규에는 부모, 특히 늙은 부모에 대한 명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법이라 불리는 출애굽기의 '언약 법전'(20:23-23:33) 가운데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 범죄로 부모에 대한 범죄가 두 번이나 언급됩니다. "부모를 경시하는 것"(21:15)과 "부모를 치는 것"(21:17)입니다. 기력이 떨어지고 경제적 능력이 없는 늙은 부모를 돌보지 않는 것, 그리고 부모를 쳐서 육체적 상해를 입히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사형에 처해야 할 중대 범죄였습니다. 왜냐하면, 늙은 부모는 그들의 자녀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에 의해 보호와 돌봄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서 사람 사이의 윤리적 계명 가운데 첫 번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애굽기 20:12)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모는 늙어서 일할 능력이 없는 나이든 부모를 의미하며,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포함됩니다. 그리고 십계명에서는 오직 이 부모 공경에 대한 계명에 축복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다른 모든 계명과 달리 오직 이 계명에만 하나님의 언약이 걸려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모님의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말로 '메아 베에세림'이라고 말합니다. '120수 하소서!'라는 말입니다. 120은 모세가 땅에서 살았던 나이입니다.(신명기 34:7) 작년에 이스라엘 최장수 노인이었던 슐로모 슐레이만이 117년 283일을 살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축구는 전반 45분, 후반 45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연장전 전후반 30분을 합쳐 도합 120분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아, 살아계신 우리의 부모님이 축구 경기처럼 건강하게 120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메아 베에세림!' 그리고 돌아가신 우리의 부모님은 자애로운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안식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잘 살고 잘 죽는 것'만큼이나 '잘 늙어가는 것'(well-aging)이 중요합니다. 비록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고린도후서 4:16)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슬기로운 노인생활'을 하는 방법입니다. 오히려 노년은 젊어서보다 더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가 가능한 시간입니다. 바쁜 세상살이로 주님보다 세상을 가까이했다면 이제는 세상보다 주님을 더 가까이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 바로 노년입니다. 출생과 젊음 못지않게, 노년도 하나님과 나를 진정으로 알아가게 하는 귀한 은총의 시간입니다. 설사 친구들이, 자녀들이, 젊은이들이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나의 작은 신음에도 귀 기울여 주시는 다정한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반복되는 투정도, 그리고 자랑도 언제나 처음 들으시는 것처럼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분과 더 가까이 지내십시오.

"나이듦은 하나님이 더 나은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준비하는 방법"(제임스 패커)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골로새서 3:1)라고 권면합니다. 노년의 베드로는 "우리가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베드로후서 3:13)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모든 수고는 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게 하시는]"(요한계시록 21:40) 하나님의 자애로운 손길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은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헤세드, hesed)에 대한 이사야의 선포입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이사야 46:3-4) 성경 전체에서 이 구절만큼 노인들을 축복하는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안고 업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이 들어 늙을 때까지 우리를 안고 업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백발이 되기까지" 우리를 품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그가 나를 지으셨으니 끝까지 업고, 품고, 구원하겠다 말씀하십니다. 한 찬송가(481장)의 가사처럼,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울 때, "내 사는 날이 속히 지"날 때, "이 육신 쇠해 눈을 감을 때"에도 "날 돕는 주" "변찮는 주" "사랑의 주" 그리고 "생명의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설교는 한국성서학연구소, 「성서마당」, 2020 가을, Vol. 135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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