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에스겔 36:24-28, 로마서 8:1-6, 요한복음 14:12-18 -
성령강림주일입니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교회들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때처럼 오늘도 우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사도행전 2:4)를 사모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초자연적 현상이 아닙니다. 그런 현상을 일으키신 성령의 목적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서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는 것을 듣고 놀라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2:8, 11)라고 감탄했습니다. 성령은 가끔 특이한 현상을 일으키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인 성령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게 하는 영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성령은 히브리어로 '루아흐'(ruah)입니다.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어 '프뉴마'(pneuma)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루아흐는 영, 호흡, 혹은 바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함께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아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세기 1:2)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운행하셨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메라헤페트'(תפחרט)인데, 그 원뜻은 '계속해서 알을 품다'입니다. 어미 새가 따뜻하게 알을 품듯이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땅을 따뜻하게 품어 생명이 있게 하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호흡'인 성령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게 하실 때 그 코에 불어 넣으신 숨입니다.(창세기 2:7) 셋째로 하나님의 '바람'인 성령은 거대한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시고 땅 위의 물이 줄어들게 하시려고 불게 하신 바람입니다.(창세기 8:1)
이 성령은 신약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셨고(마태복음 1:20, 누가복음 1;35),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내려와 예수님 위에 임하셨으며(마태복음 3:16, 마가복음 1;10, 누가복음 3:22),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40일간 시험을 받게 하셨고(마태복음 4:1, 마가복음 1:12, 누가복음 4:1),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그리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으로 거기 사람 위에 임하셨습니다. 이처럼 성서에서 성령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은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십자가 생명의 바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주로 믿고 고백하십니까? 성서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2:3) 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은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로마서 8:16) 하신다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십니까? 성서에 하나님께서는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에스겔 36:27)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그 안에 이미 성령이 계십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복음을 친구들에게 전하신 적이 있습니까? 성서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리라"(사도행전 1:8) 했습니다. 예수를 증언하는 사람은 이미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드리려 교회당을 찾거나 각 처소에서 온라인에 접속하신 분들은 어쩌다, 우연히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화와 인도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성령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이 여러분을 이리로 이끌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이 성령은 인간의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와 구원(救援)에만 관심을 기울이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오늘의 교독문인 시편 104편이 노래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땅의 기초를 놓으시고,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며, 날마다 땅이 결실을 맺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24절)라고 감탄하며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30절)라고 고백합니다. 땅에 가득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땅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 주님의 영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북유럽의 아름다운 나라 덴마크는 지금부터 150년 전에 황폐한 나라였습니다. 1864년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덴마크는 곡창지대였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chtein) 땅을 잃어버리고 황무지 유틀란드 반도로 쫓겨났습니다. 수많은 국민이 좌절했고 절망에 빠져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덴마크를 살려낸 사람은 그룬트비 목사였습니다. 그룬트비 목사의 가르침은 3가지였습니다. 첫째 하나님 사랑, 둘째 이웃사랑, 그리고 셋째 자연사랑이었습니다. 그룬트비 목사가 강조한 자연사랑은 땅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황무지 유틀란드를 사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 땅을 개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북해의 찬 바람을 막기 위해 방풍림을 세웠고, 전국에 국민대학을 세워 청년들을 교육했습니다. 이로 인해 마침내 덴마크는 세계 제일의 낙농국이 되었습니다. 그룬트비 목사는, 시편 104편 기자처럼, 주님의 영이 땅의 모든 것을 지으시고 땅을 새롭게 하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 영에 이끌려 그는 자신의 나라를 새롭게 바꾸었습니다. 오늘날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죽어가는 땅과 지구를 아파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며 땅을 살리려 힘쓰는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와 새 창조의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어떤 이는 방언이 성령의 증거라 주장하고, 또 어떤 이는 특별한 영적 체험을 강조합니다. 과연 성서가 말하는 성령의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늘의 신약서신 본문인 로마서 8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로마서 8:5-6)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 즉 '영을 따르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생각의 변화'라는 사실입니다.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고 이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육신 vs 영'의 이원론자가 아닙니다. 그는 육체와 물질세계를 경멸하고 영혼과 천상의 세계만 바라본 영지주의자가 아닙니다. 그에게 '육신 vs 영'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 vs 이후'를 뜻합니다. 바울의 많은 서신 가운데 로마서 7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로마서 7:5-6) 여기서 그가 말하는 "육신에 있을 때"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입니다. 그리고 "영의 새로운 것"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입니다. 바울에 육신과 영을 구분하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before)과 이후(after)입니다. 그에게 그리스도인이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갈라디아서 5:24) 사람입니다. 즉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에베소서 4:22-24)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옛사람, 즉 '육신을 따르는 자'의 생각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새 사람, 즉 '영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생각과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선이 된 사람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그의 삶의 기도가 된 사람입니다.
일본 잉어는 '코이'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키워봐서 압니다만, 이 물고기에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만약 이 잉어를 자그마한 어항에 넣으면 그것은 5~8cm 길이로만 자랍니다. 좀 더 큰 어항이나 조그마한 연못에 넣으면 15~25cm 크기로 자랍니다. 만약 더 큰 연못에 넣으면 어른 발 크기까지 자랍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이 잉어를 커다란 호수에 놓아주면 그것은 1m까지도 자랍니다. 이 물고기의 크기는 자기가 자라는 공간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인간의 생각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사유는 그의 세상의 크기와 비례합니다. 한 가족만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가족의 크기 이상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속한 지역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 지역의 경계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한 도시, 한 국가, 한 인종, 한 계층, 한 문화, 한 언어, 한 전통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 도시, 그 국가, 그 인종, 그 계층, 그 문화, 그 언어, 그리고 그 전통의 경계선 안에 갇힐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세계와 하나님이라는 커다란 호수 속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생각의 크기가 그 호수의 크기와 비례해 자라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주관과 기준에 따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를 가름합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되면 성공이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라고 말합니다. 너무나 좁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우리의 시야를 넓혀 땅의 기초를 놓으시고,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며, 날마다 땅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눈을 들어 바라보십시오. 인생의 성공과 실패, 단맛과 쓴맛의 정의는 달라질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영광과 부끄러움의 잣대가 달라질 것입니다. '육신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나에게 이익인가?'가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물으십시오. 생각의 기준이 바뀌어야 합니다. 생각의 크기가 커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던 옛사람이 죽고 이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생각하는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아의 작은 어항을 넘어 저 커다란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로 힘차게 노 저어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과 생명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로 알려진 앨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또한 훌륭한 성서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특히 '역사의 예수'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평생의 연구 끝에 그가 얻은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은 '생명을 사랑하는 정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이라는 그의 유명한 말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정신', 바로 그것이 '영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맨 먼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를 사랑하는 정신은 어쩌다,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받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처럼 비둘기와 같이 온유한 성령께서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우리 심령에 거룩한 사랑의 불꽃을 피워주"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환히 밝혀줄 구세주의 사랑을 널리 전파하며 오"시는 분입니다.(아이작 와츠, <오소서, 비둘기 같은 성령이여>) 그러므로 내 안에 그분의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모든 생명을 아파하고 사랑하는 그분의 정신이 있다면 나는 벌써 성령에 충만한 사람입니다.
요즘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유행합니다. 무언가 거대한 변화가 오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큰 변화가 오고 나는 거기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그리 유쾌한 생각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교회도 이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도태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립니다. <세계경제포럼>에 의하면 4차 산업혁명이란 "디지털 혁명에 기반하여 물리적 공간, 디지털적 공간, 생물학적 공간의 경계가 희석되는 기술융합의 시대"입니다. 이 용어를 처음 제안한 클라우스 슈밥(Klaus M. Schwab의 말을 직접 들어보면 4차 산업혁명은 "디지털을 기반으로 이전에는 분리되어 있는 다양한 과학기술들을 융합해서 사회, 경제, 문화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큰 변화"입니다. 다 듣고 보니 제4차 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디지털 기술'입니다. 사실 디지털 기술은 이미 3차 산업혁명을 특징짓는 기술이었습니다. 슈밥이 하려던 말은 이 기술을 토대로 '초연결'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이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초연결 사회란 무엇입니까? 사물인터넷이 한 예입니다. 스마트폰과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등이 연결되어 인간이 일일이 간섭하고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때가 되면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척척 일을 수행합니다. 이것이 4차 산업혁명이 말하는 초연결 사회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보니 슈밥이 말하는 초연결은 인간이 아닌 기계들 사이의 연결을 일컫는 말인 것 같습니다. 과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사람도 더 깊이 연결될까요?
김용섭은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를 엮어서 지금 우리의 시대를 '언컨택트'(un-contact) 시대라 불렀습니다. 그의 책 『언컨택트』의 부제는 "더 많은 연결을 위한 새로운 시대 진화 코드"입니다. 그에 의하면 한국 사회는 '과잉' 컨택트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불평한 소통' 보다는 '편안한 분리'를 택합니다. 이것은 코로나19가 갑자기 만든 새로운 트렌드가 아니라 이미 있었고 확장되려는 트렌드라고 합니다. 20년 전 앨빈 토플러가 이미 『제3의 물결』에서 재택근무와 원격근무를 예견하지 않았습니까. "언컨택트는 서로 단절되어 고립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연결되기 위해서 선택된 트렌드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사람끼리 연결되고 함께 살고 일하는, 서로가 필요한 사회적 동물이다." 이것이 이 책의 요지입니다.
사실 사람은 더 깊이 연결되고, 더 깊이 소통하길 원합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든, 코로나 시대든 인간은 공감하고 소통하고 연결되길 원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게 존재의 본질적 욕망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인터넷으로 24시간 연결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점점 더 고립되는 것 같습니다. 지구 뒤편의 모르는 사람과는 연결되어 있으나 바로 옆집의 이웃과는 소통하지 않습니다. 디지털 소통의 시대에 오히려 끼리끼리 문화는 더 강화될 것 같습니다. '언컨텍트로 인한 양극화'(uncontact divide)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 같습니다. 심지어 앞으로는 생명까지도 양극화될 것 수 있습니다. 인간은 소통을 원합니다. 공감을 원합니다. 하지만 과학기술만으로 소통이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일 것입니다. 소통은 존재의 갈망입니다. 소통과 연결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삼위일체(Trinity) 하나님의 핵심은 '사랑의 소통'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사랑 안에서 서로 안에 거하십니다.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이 계시고, 성부 안에 성자와 성령이 계시며,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거하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소통이 넘쳐흐른 결과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과 소통을, 사랑의 소통을 갈망합니다. 분열되고 단절된 이웃과의 진정한 공감과 연결을 원합니다. 인간의 환경파괴로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는"(로마서 8:22) 온갖 피조물도 경계를 넘어 사랑의 소통을 원합니다.
성령은 '교통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가장 큰 은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맨 마지막을 우리 귀에 너무도 익숙한 이 유명한 축복의 인사로 마무리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린도후서 13:13) 예수 그리스도에게 '은혜'가, 하나님에게 '사랑'이 그 대표적 속성으로 헌정되었다면 바울은 성령의 '교통하심'을 그분의 가장 중요한 은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교통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소드'(sod)는 서로 막힘이 없는 관계를 뜻합니다. 영어 성경은 이를 "fellowship"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서로 교제하며 사귀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교통하시는 분입니다. 서로 교제하고 사귀어 막힘이 없는 관계를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소통하시는 분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든 장벽을 허물고 경계를 넘어 만물을 사랑으로 연결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성령을 간구하십시오. 혹 여러분 자신과 스스로 불화하고 계십니까? 혹 여러분의 가정 안에 화목이 없습니까? 혹 이웃과 높은 장벽으로 막혀 있습니까?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에베소서 4:3, 새번역)주시는 성령을 오늘 간구해야 합니다.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와 디지털 양극화(digital divide)로 인해 깊이 갈라진 오늘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사물의 초연결만이 아니라 사람 연결, 사랑의 소통, 생명의 공감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말하고 꿈꿔야 하는 '5차 영적 혁명', 즉 성령의 교통하심에 힘입은 사랑의 소통이라는 혁명이 될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제자들과 이별하시면서 우리에게 '보혜사'(保惠師) 성령을 보내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한복음 14: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란 '상담자'(counselor), '위로자'(comforter), 혹은 '돕는 자'(helper)라는 뜻입니다. 살면서 나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하며 돕는 자를 만나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한복음 14:18)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최고의 상담자, 최고의 위로자, 최고의 돕는 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가 바로 보혜사 성령입니다. 그가 지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로마서 8:26)하십니다. 성령은 일년에 한번, 특별한 날에만, 특이한 경험으로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생명의 바람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우리가 한목소리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고 행하게 하시는 분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게 하시며,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게 힘주시는 성령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우리 심령에 거룩한 사랑의 불꽃을 피워주시고 사랑으로 소통하게 하시는 성령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 성령에 충만한 사람으로 세상 끝까지 날마다 기쁘게 순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