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살교] "잠잠하라 고요하라"

성경본문

시편 107:23-31, 히브리서 13:5-8, 마가복음 4:3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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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예수님이 갈릴리바다에서 폭풍우를 잠잠하게 하신 사건은 복음서에서 가장 친숙한 이야기의 하나입니다.(마가 4:35-41, 마태 13:53-58, 누가 4:16-30) 종일 무리를 가르치신 예수님은 피곤하셨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갈릴리바다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리로부터 벗어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배 안에는 적어도 네 명의 숙련된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신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일 것입니다.(마가 1:16-20) 그런데 곧바로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마가 4:37) 되었다고 본문이 말합니다. 갈릴리바다는 해수면보다 무려 180m 이상 낮은 곳에 있고, 고원과 협곡으로 둘러싸여 갑자기 돌풍이 몰아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졌습니다. 숙련된 어부들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1633년에 렘브란트가 그린 <갈릴리바다 폭풍 가운데 있는 예수와 제자들>(유화, 160 x 127cm)은 이때의 절박한 상황을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바다를 엄습하는 파도로 작은 돛단배의 뱃머리가 45도 정도 가량 들려 있습니다. 세찬 파도가 배에 부딪혀 하얀 거품으로 부서집니다. 이 배에는 모두 12명의 제자가 타고 있는데, 뱃머리에 있는 다섯 명의 제자는 돛대를 붙잡고 어떻게든 배를 살리려 사투를 벌이지만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배의 중앙에는 두 명의 제자가 보이는데 하나는 비겁하게 숨을 곳을 찾고 있고 다른 하나는 이 와중에 그것이 뭐라고 자신의 모자를 꼭 움켜쥐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화가 자신입니다.) 배의 후미에는 나머지 다섯 명의 제자들이 보이는데 하나는 겁에 질려 쳐다만 보고 있고, 다른 하나는 배멀미를 이기지 못해 배 밖으로 토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가까스로 배의 키를 잡고 있으나 배를 조정하진 못합니다. 그런데 나머지 둘 중 하나는 잠에서 막 깬 듯한 예수님의 몸을 붙잡고 흔드는데 얼굴이 험악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에게 다급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데, 둘 다 스승에 대해 공손한 태도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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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이화여대대학교회)
▲1633년에 렘브란트가 그린 <갈릴리바다 폭풍 가운데 있는 예수와 제자들>(유화, 160 x 127cm)

사실 이 와중에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곤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고물에서 베개[까지] 베고 주무[셨다]"(마가 4:38)라고 기록합니다. 종일 무리를 가르치시느라 피곤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이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숙련된 어부들이 아닙니까. 또 예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육지에 있을 때나 바다에 있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태연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과 제자들의 태도는 너무나 대조가 됩니다. 주무시는 스승을 흔들어 깨우며 제자들이 절규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Don't you care, if we drown - 마가 4:38) 비난이 짙게 서린 탄원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평소 우리가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입니다. 거친 바다의 항해와 같은 인생길에서 큰 폭풍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를 의심하며, '하나님이여 내가 죽게 되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라고 하나님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내 고통에 침묵하고 있는 것 같아 두려움과 배신감을 느끼며, 렘브란트의 그림에 나오는 그 제자처럼 주님의 몸을 붙들고 흔들며 항의합니다.

부끄러워하진 마십시오. 여러분만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서 특히 시편 기자들이 끊임없이 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편 10:1)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시편 74:1)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시편 88:14) 시편 기자만이 아닙니다. 아무 이유 없이 고난을 받는 욥도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욥기 13:24)라고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외국 군대의 침략으로 나라가 멸망했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예레미야애가 5:20)라고 탄식했습니다. 성서에는 이렇듯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에 침묵하시는지 묻는 수많은 질문이 나옵니다. 사실 매서운 폭풍이 몰아치던 갈릴리바다에서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제자들이 던진 질문은 이미 시편 44편 기자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던 기도입니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의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시편 44:23-26)

곤한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곧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졌다고 본문은 말합니다.(마가 4:39) 예수님은 단 두 마디만 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오늘 이 설교의 제목입니다.) 큰 광풍과 바다를 향한 이 단순하고 간결한 명령은 그가 이 모든 혼란을 통제할 수 있는 분임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잠잠하라'는 '이제 조용하라'(Quiet, Peace, Hush)는 뜻입니다. (과거 한 TV 사극에서 유행한 말 '그 입 다물라!'와 비슷합니다.) '고요하라'는 이제 '가만히 있으라'(Be still)는 뜻입니다. 사실 바다를 잠잠하고 고요하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의 증언입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시편 107:25, 28-29) 시편 107편은 바다에서 당하는 위험을 노래한 유일한 시편입니다. 하나님은 바다에서 광풍을 일으키기도 하시고 그것을 잠재우기도 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며'(그리스어 에피티마오, epitimao)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실 때에도 그 귀신을 '꾸짖으시며'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마가 1:25)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실 수 있고 더러운 귀신의 힘을 꺾을 수 있는 분이라고 마가는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마가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아닙니다. 본문에는 바다의 풍랑이 잔잔해진 것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설사 예수께서 주후 28년경 갈릴리바다의 큰 광풍을 실제로 잠재웠다 해도 그것은 오늘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단지 먼 옛날의 기적 이야기라면, 다만 기상학적인 폭풍을 잠재운 것뿐이라면 우리가 이렇게 이 이야기에 집중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기적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바람을 꾸짖어 바다를 잠잠하고 고요하게 하신 예수님은 곧바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이 질문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마가 4:40) 이 구절의 더 좋은 번역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입니다. 제자들은 '어찌하여' 자기들이 죽게 된 걸 주님이 돌보지 아니하시느냐 격하게 항의했는데, 주님은 이 질문을 고스란히 그들에게 되돌려주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풍랑 속에서도 곤히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으로 풍랑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이유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가복음의 기자는 곳곳에서 '두려움인가 아니면 믿음인가'라는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습니다.(5:36, 6:50, 10:32, 16:8) 마가복음 끝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도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여인들의 이야기로 끝납니다.(16:8) 눈앞의 증거를 보고도 확신보다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마가복음은 넘칩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이야기가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임을 곧 알아차립니다. 그렇습니다. 갈릴리바다에서 우리 주님과 그의 제자들을 태우고 큰 폭풍을 만난 연약한 쪽배는 우리 인생의 배입니다. 항해는 늘 위험하고, 우리의 쪽배는 부서지기 쉬우며, 우리는 밖에서 몰아치는 비바람뿐만 아니라 마음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두려움의 비바람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우리는 정말 주님을 흔들어 깨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한밤중에 무서운 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엄마가 우는 아이 방으로 달려와 아이를 번쩍 들어 품에 안고 토닥입니다. 엄마는 아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이렇게 속삭입니다. "괜찮아, 무서워할 거 하나도 없어!" 태초 이래 모든 엄마가 이렇게 자녀를 위로합니다. 그런데 하나 묻겠습니다. 엄마는 과연 아이에게 진실을 말한 걸까요? "괜찮아, 무서워할 거 하나도 없어!" 정말로 세상에는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나요?

우리는 종종 '무서워할 거 하나도 없다'와 '무서워하지 말라'라는 말이 매우 다른 것이라는 점을 놓치곤 합니다. 왜 세상에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까? 이 세상엔 무서운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고독, 고립, 고통, 허무, 무의미, 중독, 실연, 실직, 실업, 실패, 거부, 거절, 정죄, 비난, 배신, 이별, 사별, 질병, 죽음... 원하는 대로 말해보십시오. 세상에 왜 무서운 게 없습니까.

주님은 '무서워할 거 하나도 없다'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바다의 폭풍은 의심의 여지 없이 무서운 것이고, 우리의 인생을 위협하는 모든 비바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하여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명확하게 '두려움'과 '믿음'(신앙)이 상반 관계에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하는 믿음은 제자들이 결여하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던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던진 질문은 아마 이런 뜻일 겁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두려워하느냐? 아직도 너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느냐? 하나님이 저 광풍보다 더 강하시다는 것을 믿지 못하느냐? 하나님께서는 광풍을 일으키기도 하시고 그것을 고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모르느냐? 악이 너희를 정복할 최종적인 권세를 갖고 있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심을 믿지 못하느냐? 그 하나님이 언제나 너희와 함께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시편 96:10)라고 선언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이사야 2:7)라고 노래합니다. 절망과 죽음이 아니라 "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라는 이 고백이 전쟁과 기근과 역병으로 고통받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희망을 만들어갑니다. 비록 세상은 아직 하나님의 통치에 부합하지 못하지만 "그가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실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신앙은 지금 그의 통치 아래 살겠다는 결단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앙은 이 하나님이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엄마는 무서워하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무서운 거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무서워하지마,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갈릴리바다의 큰 광풍이 잠잠하게 된 것은 그 배 안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의 이름으로 불리신 예수(마태 1:23)께서 그 배에 제자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서의 처음과 끝은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한 대학병원 수술실의 천장에 환자가 볼 수 있게 쓰인 성경 구절입니다. 신명기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우리 중에 계시고(7:21), 우리와 함께하시고(20:1), 우리와 함께 가시며(31:6), 또 우리 옆에서 가시면서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31:8)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여호수아 1:9) 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 28:20)였습니다. 밧모(Patmos) 섬에 유배된 요한은 환상 중에서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요한계시록 1:17) 처음이요 마지막, 즉 그가 '알파'(Α)와 '오메가'(Ω)요, '에이'(A)와 '지'(Z)요, 기역(ㄱ)과 히읗(ㅎ)이기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신약서신의 말씀처럼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히브리서 13:6)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기 전에 반드시 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조율입니다. 모든 악기는 무대에 오르는 순간 조명과 사람들의 열기 그리고 습도와 온도 등의 영향으로 미리 조율해놓아도 미세하나마 상태가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연주하기 직전에 조율하지 않으면 그 연주는 소음을 내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조율은 자기 악기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연주자는 오보에를 따릅니다. 오보에 수석 주자가 '라'(A) 음을 불어줍니다. 그러면 관악기들이 먼저 거기에 맞춰 자기의 악기를 조율하고, 그다음에 현악기들이 따릅니다. 오보에는 겹 리드(reed)를 가지고 있어서 표준음을 내기에 적합합니다. 다른 악기에 비해 온도나 습도에 덜 민감하고 음높이가 안정적이며 소리가 맑고 투명합니다.

저는 오케스트라 연주 전에 오보에 수석 주자가 부는 그 맑고 청명한 '라'(A) 음이 혼란스러운 우리의 삶을 조율하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크고 우람할 것 같으나 부드럽고 조용합니다. 왕비 이세벨의 탄압을 피해 도망친 예언자 엘리야는 크고 강한 바람도 아니고 지진과 불 이후에 들리는 "세미한 소리"(열왕기상 19:12 /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새번역] / "a gentle whisper"[NIV])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난 바람을 꾸짖으시며 미친 바다를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신 예수님의 음성도 부드럽고 조용했을 것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요한 1:3) 그분은 소리지를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한 찬송가(371장)의 가사처럼 우리의 떨리는 마음은 꼭 저 광풍이 불어 큰 물결이 이는 바다와 같아서 늘 두려움과 불안에 싸여 삽니다. 거센 비바람은 내 연약한 쪽배를 흔들며 나를 두려움의 깊은 바닷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내 배 안에는 주님이 타고 계십니다. 그가 일어나 나를 향해 부드럽고 조용한 목소리로 "잠잠하라! 고요하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음성을 들으십니까.

2005년 가을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의 역사적인 도시 뉴올리언스를 강타했을 때 당시 언론은 이 도시 곳곳에서 성폭행과 총격 그리고 살인이 벌어졌다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오보로 드러났습니다. 시민들은 구조대를 조직해 식량과 의복과 의약품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이 속속 재난현장에 도착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도왔습니다.(뤼트허르 브레흐만, <휴먼카인드 :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 중에서.) 그런데 카트리나가 이 도시를 강타한 직후에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이 사진은 뉴올리언스의 한 공동묘지의 처참한 모습을 담고 있는데, 나무들은 부러져있고 땅 위에는 온갖 파편이 흩어져 있으며 묘지는 파손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폐허 속에 폭풍우가 건드리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동상이었습니다. 그 동상은 팔을 넓게 벌리고 서서 혼돈 가운데 있는 세상을 향해 평안의 축복을 내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비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성난 물결 큰 파도가 일렁이는 이 세상 속에서 늘 두려움에 눌려 사는 우리 모두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여러분, 이 음성이 들리십니까?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두려움과 염려는 믿음이 "없다는"(마가 4:40) 혹은 "작다는"(마태 8:26) 표시입니다. 주님은 오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누가 8:25)라고 물으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왜 '아직도' 이 믿음이 없으십니까? 저는 지금 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믿지 못하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이 주무시는 상황 속에서도, 곧 마치 하나님이 부재한 듯한 상황 속에서도 그분이 내 배 안에 계신다는 것을, 그래서 그분이 배에 있는 제자들과 운명을 같이 하신다는 것을 왜 신뢰하지 못하시느냐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 예수님은 깨어 있을 때 깨어 계셨고, 잠잘 때 잠잤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깨어 있을 때 잠을 잤고, (갈릴리바다에서) 주님이 주무실 때 깨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누가 8:25)라고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여러분, 이 음성이 들리십니까?

"마음과 삶이 소란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소음이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잡음과 씨름할 때가 아니라 주파수를 [하나님의 음성에] 맞출 때 잡음이 사라집니다."(한희철, <지킴 20 버림 20> 중에서) 교우 여러분, 두려울 때, 무서울 때, 외로울 때, 흔들릴 때, 막막할 때,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때 여러분의 영혼의 귀를 저 맑고 청명한 오보에의 '라' 음처럼 "잠잠하라! 고요하라!" 조용히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기울여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마가 4:41)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의 말씀에 조율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을 멋지게 연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의 공동기도문, 그레이스 놀 크로웨의 <빛을 위한 기도>를 다시 읽어봅니다.) "주님, 날이 어둡습니다 / 걸어가기에는 길이 너무 거칩니다 / 이 밤의 어둠 속에서 / 제 손에 들린 것이라고는 / 불을 켜지 않은 양초뿐입니다 // 주님, 저의 추켜올린 손안의 / 초를 보아 주십시오 / 그 초에 주님의 손을 대시어 / 당신의 거룩한 빛으로 타오르게 하십시오 / 이 가느다란 밀랍 양초는 저의 믿음입니다 // 주님, 당신의 밝은 불꽃으로 / 양초에 불을 지펴주십시오 / 그 불의 원(圓)이 제 발 아래 점점 넓어져 / 어둠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길이 드러날 때까지 / 저의 양초에 불을 지펴주십시오 / 저의 양초를 활활 태워주십시오 // 그러면 저는 이 미지의 땅을 통과해 /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 이제 그 길은 너무 어둡거나 / 너무 아득하지 않을 것입니다 / 제 손안에 / 주님의 빛이 들려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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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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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