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출애굽기 16:1-31, 갈라디아서 5:16-23, 요한복음 10:10 -
몹시 찌는 듯 견디기 어려운 더위, 즉 폭염(暴炎)입니다. 요즘 얼마나 힘드십니까! 2018년 여름은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으로, 2019년 여름은 연쇄적인 태풍으로, 그리고 작년 2020년 여름은 유례없는 긴 장마로 견디기 힘들었는데, 올여름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염려됩니다. 이젠 여름이 무섭습니다. 갖가지 재난들이 점차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사회의 약한 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간의 활동이 잠시 멈춘 사이 지구 곳곳에서는 반가운 소식들이 들려왔었습니다. 중국과 인도의 하늘이 깨끗해지고 공기의 질이 달라졌습니다. 베네치아의 물이 깨끗해지고 돌고래들이 돌아왔습니다. 인간이 움츠러드니 지구가 회복되었습니다. '코로나의 역설'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자연의 소생이 극히 한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며, 코로나가 끝나면 이전보다 더 심한 환경 파괴가 일어날 거라 경고합니다. 그동안 멈춰야 했던 수많은 공장이 몇 배나 더 가동될 것이고, 사람들은 보상심리에 따라 '보복적 소비'에 나설 것이며, 그러다 보면 순식간에 우리는 미세먼지로 숨쉬기도 어려웠던 '코로나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와 함께 『지구 정원사 가치 사전』(동연, 2021)을 출간한 이민형 교수의 말처럼, 잠시 멈추었던 인간이 다시 걸음을 내딛는 것을 부정적으로 볼 수만 없습니다. 누군가에겐 생존이 달린 일이고, 또 누군가에겐 정신적 우울감에서 해방될 기회이니까요. 사실 우리가 바라는 '일상의 회복'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손 맞잡고, 마주 보고, 함께 웃으며, 껴안는 소소(小小)한 일상의 회복이니까요. 하지만 소소한 것에 대한 간절함이 오늘의 이 재난에 대한 '큰 뉘우침'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재난을 낳은 코로나 이전으로 단순히 회귀하고 말 겁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아무 보람도 없이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기후변화와 또 사스, 에볼라, 코로나19 등의 신종 인수공통 감염병(zoonosis)은 모두 '숲의 파괴'에서 시작되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인간이 숲을 파괴해 야생동물의 서식지가 훼손되면서 이들을 숙주(宿主)로 하는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아왔고, 또 숲이 줄어든 결과 숲이 저장할 수 있는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더 많이 배출되면서 기후위기가 심해지는 악순환에 빠진 것입니다. 조천호 전 국립기상과학원장의 말처럼, "자본은 더 싼 자원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 오지에 들어가 서식지를 파괴하고 [또] 오염물질을 배출해도 규제가 없는 개발도상국에 공장을 [세웁니다]." 사실 절제를 모르는 자본의 역사 600년은 저렴해 보이지만 실은 저렴하지 않은 것들을, 즉 자연, 돈, 노동, 돌봄, 식량, 에너지, 그리고 생명을 저렴하게 만들어 엄청난 진보를 가져왔으나 그 진보의 대가가 미래 세대가 치러야 할 엄청난 환경비용으로 축적된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참조.) 현 인류의 문명은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와 같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사실 서구 산업문명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문학서입니다. 어린 왕자는 도도한 장미를 사랑하다가 지쳐 그 소행성을 떠나 일곱 개의 다른 소행성을 방문합니다. 그중 세 번째의 별에 도착했을 때 한 알코올 중독자를 만납니다. 그는 계속 술을 마십니다. 어린 왕자가 왜 마시냐고 묻자 "술을 마시는 사실을 잊기 위해 마신다"라고 대답합니다. 참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무서운 자기합리화입니다. 모든 중독이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인류는 욕망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경제성장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내성(耐性)이 생겨 그것이 중독인지도 모릅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단인 미연합감리교(UMC)는 일찍 이 중독을 영혼의 '부자병'(Affluenza = Affluence + Influenza)이라 부르고 퇴치 캠페인을 펼치고 있습니다. 부자병이란 "남보다 잘사는 것을 과시하려 애를 쓰지만 도저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감정" 혹은 "경제성장에 물리칠 수 없는 중독 증세"입니다. 바로 이 영혼의 질병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커다란 상처를 내어 지금 우리가 고통 받는 기후위기나 코로나와 같은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오늘 읽은 신약서신(갈라디아서 5:16-26)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욕망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육체의 소욕(所欲)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절) 바울은 육체의 욕망과 성령의 일을 극명하게 대비시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 때 나타나는 15가지의 악한 열매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방탕]과 우상 숭배와 주술[마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분쟁]과 분열함과 이단[파당]과 투기[질투]와 술 취함과 방탕함[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놀음]"(19-21절)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9가지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데 그것은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인내]과 자비[친절]와 양선[선함]과 충성[신실]과 온유와 절제"(22절)입니다. 이 유명한 성령의 열매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절제로 끝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중 맨 마지막 열매인 '절제'(節制, self-control)의 열매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맨 나중에 나오기 때문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한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배경이 되는 오스트리아 해군 명문 집안 폰 트랩(von Trapp) 가(家)에는 7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그중 가장 어린 막내는 가족을 소개할 때마다 늘 자신을 맨 마지막에 소개한다고 불만입니다. 어느 날 온 가족이 합창대회에 나갔을 때 또 자기를 맨 끝에 소개하자 참지 않고 그 이유를 묻습니다. 친절하고 재치 있는 사회자는 "왜냐하면, 그건 네가 제일 소중하기 때문이야!"라고 말해줍니다. 아이는 "아하!"하고 너무 기뻐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절제가 맨 끝에 있는 이유는 그것이 결코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제일 소중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입니다. 그건 무게가 2~3톤 나가는 무거운 고철 덩어리 흉기입니다. 마찬가지로 브레이크가 없는 인간의 문명은 위험합니다. 절제라는 브레이크가 없는 인간의 욕망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하는 무서운 흉기가 됩니다. 예수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이야기의 끝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누가복음 12:21)라고 짚어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은 재물에 대하여 부요한 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입니까? 또 예수께서는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누가 16:13)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우리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가로막는 것은 아마 재물, 그 재물에 대한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주님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누가 6:20)이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태 10:9-10) 하시면서 자발적 가난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탐욕(貪慾, avarice)을 가장 경계하셨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를 가벼이 여기지만 탐욕은 성서가 말하는 가장 큰 죄의 하나입니다. 탐욕은 우리 생각 안에 숨어 무서운 힘을 발휘합니다. 탐욕의 주머니는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절대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오히려 더 부족합니다. 탐욕이라는 주머니는 늘 터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탐욕은 바닷물과 같습니다. 바다에서 배가 고장 나 표류하게 될 때 아무리 목이 말라도 마시면 안 되는 것이 있지요. 바로 바닷물입니다. 그 끝은 죽음입니다. 존재의 허기를 소유로 채우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존재의 허기를 탐욕으로 채우는 일은 목이 마르다고 계속해서 바닷물을 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탐욕을 다스릴 수 없으면 우리는 은총의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자손이 신(Zin) 광야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이렇게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애굽기 16:3) 철저히 어리석은 백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원망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아침에는 만나를 보내 그들이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침에 일어나 진 주위를 보니 이슬이 있다가 마른 후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출 16:14)이 생겼는데 모양은 "깟씨(coriander seed)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출 16:31)와 같았습니다. 바로 만나(Manna)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만나를 "먹을 만큼만"(출 16:16) 거두라고 엄히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도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출 16:18) 했습니다. 필요에 따라서만 거두고 비축(備蓄)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말씀을 따르니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으며]"(출 16:18) 날마다 신선한 만나를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광야의 경제는 '절제의 경제'였습니다. 광제의 경제는 '은혜의 경제'였습니다. 파라오의 지배를 거부하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은 만나를 축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용할 양만 가지고 있어야 했고, 남는 것을 모아 놓았다가 팔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축적이 아닌 하루의 필요를 따라 사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매일 비우는 삶은 그들의 고된 여정을 가볍게 했을 것입니다. 만약 미래에 대비한답시고 긁어모으면 누군가는 많은 것을 짊어지고 누군가는 없어서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만약 만나가 비축 가능한 음식이었다면 은총의 땅으로 가는 광야의 길에서조차 이집트에서와 똑같이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 사이의 지배와 종속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음도 없고 부족함도 없는 만나는 절제와 은혜의 경제 속에 '파라오의 노예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다시 이 출애굽의 여정을 떠나야 합니다. 1년 반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코로나 재난 상황은 결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간으로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저는 코로나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코로나와의 이 힘겨운 싸움이 아무 가치 없는 싸움이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입니다. 오늘 우리의 이 고난에도 필시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로마서 8:22) 하지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로마서 8:18) 우리는 지금의 이 재앙을 불러온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단순히 복귀할 수는 없습니다. "애굽 땅의 고기 가마 곁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광야 길에 서 있습니다.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뜨거운 광야 길에서 고난 받는 이유는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라고 말했다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코로나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이것이 아무 의미 없는 고통이 아니라 파라오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생명 시냇가로 나아가는 연단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2018년 10월 인천의 송도에서는 유엔(UN)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가 열렸습니다. 여기서는 인류가 전 세계적인 비상사태에 직면하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지구의 기온이 산업화 이전 수준보다 이미 섭씨 1도가 올랐는데 그것을 1.5도 안에서 잡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피하려면 오는 2030년까지 지구온난화 가스의 배출량을 2010년 수준에서 약 절반가량(45%)으로 줄여야 한다고 강력히 제안했습니다. ('지구온난화 1.5도 특별보고서') 그 일을 해내야 하는 시간이 고작 12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었습니다. (지금은 겨우 9년 남았습니다). 이렇게 2030년을 거쳐 2050년에는 전 세계가 '탄소 제로' 사회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로드맵(road map)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경제와 사회 그리고 삶의 방식을 인간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방식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기 위해 뼈를 깎는 개혁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과연 이 일에 우리가 성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이제, now] 생명을 택하[라]"(신명기 30:19)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도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손이 살기(생존하기) 위해서 앞으로 약 30년, 즉 한 세대 안에 탄소 제로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21세기 출애굽이 될 것입니다.
이 출애굽 여정은 우리가 '필요'(必要, need) 이상을 욕망할 때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은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를 보면서 인간의 충족 불가능한 욕망을 가리켜 '상상의 굶주림'이라고 말했습니다. (곽호철 교수, 『지구 정원사 가치 사전』)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강제로 만들어야 했고, 늘 바라보아야 했던 피라미드는 상상의 굶주림을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를 탈출했어도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떡을 배불리 먹던 때"를 그리워했습니다. 오늘날 소비문화가 가져다주는 상상의 굶주림은 피라미드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 거대한 피라미드보다 더 과시적인 삶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비싼 것을 소비해야 더 나은 인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더 많고, 더 비싸고, 더 화려한 것을 소유하고 소비하려는 욕망은 늘 비교급이기 때문에 결코 만족시킬 수 없고 그칠 수도 없습니다. 욕망은 언제나 터진 주머니와 같고, 마실수록 목이 마른 바닷물과 같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 안식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안식과 평화는 이 땅에서의 무한한 소유가 아니라 오직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즉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될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의 '필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태 6:10)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셨습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입니다.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입니다. '무한한'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를 금하셨습니다. 대신 간결하게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는 보통 무차별적으로 우리의 욕망을 하나님에게 쏟아내고 표출하는 중언부언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참된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선언'하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없는 것을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비우고 선언하고 감사하는 것이 참 기도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계속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고 부추깁니다. 더 가져야 한다고 광고합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같은 상상의 굶주림이 여전히 우리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오호라! 우리는 아직도 파라오의 노예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의 복음서 말씀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 10:10)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생명'(life abundant)으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생명은 어떤 생명일까요. 우리는 이 유명한 구절이 들어있는 요한복음 10장이 유대인들의 수전절(하누카)을 배경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현태 교수, 『지구 정원사 가치 사전』) 수전절(修殿節; feast of dedication)은 주전 164년에 일어난 '성전 정화사건'을 기념하여 드리는 절기입니다. 주전 168년에 헬라 문화와 종교를 강력하게 추진했던 로마 황제 안티오코스 4세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제우스 제단을 세우고 돼지를 희생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감행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유대인들이 저항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마침내 주전 164년에 '마카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하고 정화하여 다시 하나님께 봉헌했던 것입니다. 수전절은 이를 기념하는 역사적인 절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풍성한 생명'이 성전의 회복과 정화를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수전절을 통해 더러워진 예루살렘 성전이 정화되어 하나님께 봉헌된 것처럼, 탐욕으로 더러워진 우리 '내면의 성전'도 거룩하게 정화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지는 은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인 것입니다. '풍성한'의 그리스어 원형(περισός, 페릿소스)은 '남김이 없는' 즉 '불필요한 잉여가 없는'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탐욕으로 인한 축적과 과잉이 없는 것, 즉 만나와 같이 일용할 양식으로 넉넉한 삶이 진정으로 풍성한 생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버리고, 포기하고, 또 비워야 합니다. 내 안이 텅 비어야 주님이 주시는 새 생명이 가득 찰 수 있습니다. 오늘 선택한 공동기도문을 다시 읽어봅니다. "버리게 하소서 / 내 안에 가득한 / 부패한 것들을 / 미련 없이 / 버리게 하소서 // 포기하게 하소서 / 황금 송아지와 / 높은 의자를 / 눈 딱 감고 / 포기하게 하소서 // 비워주소서 / 북처럼 / 텅 빈 가슴 되어 / 당신의 북채로 / 울리게 하소서 // 당신 손 끝에 / 한마다 / 신명나게 / 두들겨 맞고 //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 죄를 토해내고 // 둥둥둥 / 해가 질 때까지 / 울리는 / 북 / 북이 되게 하소서."(김소엽, <북>)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또한 택하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베드로후서 1:4, 10)라고 성서가 말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십니다. "애굽 땅의 고기 가마 곁"에서 가나안 땅의 생명 시냇가로 부르시고, 파라오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십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절제'의 열매로 이 광야를 지나 저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교독문처럼, 다시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시며] [우리가]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의 백성이 즐겁게 나오게 하시며 그의 택한 자는 노래하며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시편 105:39-43) 그러므로 즐겁게, 노래하며 이 광야 길을 걸어갑시다. "둥둥둥 / 해가 질 때까지 / 울리는 / [하나님의] 북"이 되어 이 길에서 지치고 낙오한 자들을 북돋웁시다.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는 이 거룩한 여정에 하나님께서 끝까지 함께하시고 동행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