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창세기 50:15-21, 로마서 12:17-21, 마태복음 5:43-44
오늘은 광복 76주년, 분단 7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광복과 분단의 숫자가 똑같다니, 그것은 광복이 곧 분단이었던 우리 역사의 아픔을 상징합니다. 오늘은 전 세계교회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예년과 달리 올해는 남과 북의 교회가 합의한 공동기도문이 없습니다. 한반도가 대결과 반목의 길이 아니라 화해와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할 텐데 오히려 거꾸로 가는 건 아닌지 두렵습니다.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쥔 박찬욱 감독은 과거 '복수 3부작' 영화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2002년 <복수는 나의 것>, 2003년 <올드보이>, 그리고 2005년 <친절한 금자 씨>가 바로 그것입니다. <친절한 금자 씨>는 당시 <대장금>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이영애 씨가 주연배우를 맡아 큰 기대를 모았습니다. 영화에서 '금자'(이영애)는 스무 살에 죄를 짓고 감옥에 갑니다. 13년을 복역합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수감생활을 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친절하게 하나씩 도와주며 복역 생활을 무사히 마칩니다. 하지만 출소하는 순간, 금자는 그동안 치밀하게 준비해온 복수 계획을 실행합니다. 복수하려는 인물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백 선생(최민식)입니다. 금자는 그를 포박해 미리 물색해 둔 한적한 시골 폐교로 끌고 갑니다. 거기서 예정된 순서에 따라 모든 복수 절차를 제의처럼 엄숙하게 진행합니다. 그런데 복수에 성공한 '친절한 금자 씨'는 과연 행복했을까요? 멋지게 복수를 완성한 그의 얼굴엔 웃음과 울음이 뒤섞여 있습니다. 기자들이 박찬욱 감독에게 왜 이렇게 연속적으로 복수에 대한 영화를 만드느냐는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복수라는 주제는 일상의 분노를 억누르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흥미 있는 주제다."
그렇습니다. 복수에 대한 충동은 인간이 가진 본능입니다. 복수는 정당하지 않은 피해로부터 보상받고자 하는, 인간에 내재한 본능입니다. 심지어 성서 안에도, 과연 이런 말이 성서에 나와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적에 대한 무자비한 복수를 탄원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시편 69편입니다. 우리말로 가장 생생하게 번역된 공동번역 성서로 읽어봅니다. "야훼여, 당신 사랑 어지시오니, 들어주소서... 수치에 수치를 당하니 심장이 터지려고 합니다... 죽을 달라 하면 독을 타서 주고 목마르다 하면 초를 주는 자들, 잔치를 차려 먹다가 그 음식에 걸리고, 친교 제물을 나누어 먹다가 망하게 하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 보지 못하고 그 허리는 영원히 가누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이 사는 부락을 돌밭으로 만드시고 천막에는 아무도 없게 하소서... 그들의 이름을 생명의 책에서 지워버리시고 의인들의 명부에 올리지 마소서."(시편 69:1-28 중에서) 이 세상의 어느 문학이 이보다 더 리얼하게 인간이 가진 복수심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밤마다 복수의 충동에 시달리고 피 말리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복수를 금합니다. 엄격히 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9: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수 갚은 것은 내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신명기 32:35, 새번역)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 사도 바울도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로마서 12:19)라고 권면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38-44)
사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은 함무라비 법전에서 유래됐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무자비한 복수의 법이 아니라 거꾸로 복수의 한계를 설정하는 법입니다. 복수하는 사람은 작은 처벌을 가한다 해도 당하는 사람은 그것을 가혹하게 느껴 거기서 과잉보복을 또 보복하는 악순환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법칙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복수를 한정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법칙은 사사로운 개인이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법관에게 위임된 지침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이 법칙이 나타나기도 하지만(출애굽기 21:23-25, 레위기 24:19-20, 신명기 19:21) 이와 반대로 원수에게 자비를 보이라는 구절도 동시에 나옵니다.(레위기 19:18, 잠언 25:21, 잠언 24:29) 하지만 예수께서는 제한된 복수법인 옛 법을 깨끗이 폐지하시고, 원수에 대한 자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성서를 보다가 놀라게 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인간의 복수가 미쳐 날뛰는 것을 막는 데 여념이 없는 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복수의 악순환으로 생명이 짓밟히고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 애쓰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성서에 맨 처음 복수라는 용어가 나타나는 곳은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이야기(창세기 4:1-16)입니다. 하나님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에게 죽음을 내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의 이마에 '가인의 표'를 주어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셨고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게 하셨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직접 복수하지 못하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성서의 첫 책 창세기의 앞부분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만약 이 땅 위에 공정한 복수가 있으려면 그 복수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위임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인간도, 어느 권력도 인간이 저지른 악에 대해 복수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사랑하지만 성서를 읽다가 창세기가 단지 우주와 세상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인간 사회가 복수의 유혹과 악순환에서 벗어나 생명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가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종종 놓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창세기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 이야기가 바로 그것을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기원전 10세기의 솔로몬 시대에,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사이에 내전이 발생해 나라가 둘로 쪼개질 위기에 처했을 때 쓰인 요셉과 그의 형제들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손자이며 이삭의 아들인 야곱과 그의 가족이 어떻게 가나안 땅을 떠나 이집트에 이주하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그들이 4백 년 후에 모세의 지도력 아래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 이야기입니다. 들어보면 이 이야기는 결코 사랑 넘치는 한 모범적인 가족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반대로 한 가족 안에서 일어난 야비한 배신과 분열 그리고 화해와 치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라헬(Rachael)의 아들인 17세의 요셉은 친동생 벤자민과 함께 아버지 야곱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편애를 받은 요셉은 순진하게도 배다른 형제들 앞에서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 이야기를 합니다. 그 결과 "형들은, 아버지가 그를 자기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요셉을 미워하며, 그에게 말 한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창 37:4) 그리고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더 미워했[습니다]."(37:8) 대다수의 형들이 직접 요셉을 죽이려 했지만 르우벤과 유다는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이냐?"(창 37:26)라고 물으며 지나가는 노예무역상들에게 팔아버립니다. 하지만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은 그의 꿈이 예고했던 것처럼 "앞길이 잘 열[립니다]."(창 39:2) 한 차례 역경을 겪으나 오히려 더 크게 성공합니다. 파라오의 꿈을 잘 해몽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그는 이제 부와 권세와 가정 등 달콤한 열매를 누립니다.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누리는 행운은 과거의 앙심과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는 이유를 제공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첫 아이의 이름을 므낫세, 즉 '잊게 하다'라고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의 온갖 고난과 아버지 집 생각을 다 잊어버리게 하셨기"(창 41:51) 때문입니다. 얼마나 그 고통을 잊고 싶었으면 첫 아이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겠습니까.
하지만 요셉이 정말로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온갖 고난과 복수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이집트에 22년간 머물며 그의 나이는 39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가나안 땅까지도 황폐하게 만든 세계적인 기근을 타개하는 책임자였습니다. 그의 형들이 기아에 빠진 부족을 살리기 위해 식량을 구하러 옵니다. 그들은 요셉 앞에서 직접 도움을 호소하나 끝까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첫 만남에서 형들은 오히려 요셉 안에 있는 깊은 증오심과 맞부딪히게 됩니다. 요셉은 교활하게도 그의 형들이 이집트를 정탐하러 왔다고 비난합니다.(창 42:9) 이것은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안해 낸 여러 조치 중 첫 번째의 것입니다. 요셉은 과거에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복수의 충동에 몸을 떱니다. 이때 요셉의 친동생 벤자민은 가나안에 남아있었습니다. 요셉은 벤자민이 다시 보고 싶었든지, 아니면 배다른 형들에게 더 괴로움을 주려 했었든지, 벤자민을 이집트로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형들은 무시무시한 복수의 기운을 감지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히브리말을 못 알아듣는 줄 알고 그 앞에서 서로 이야기합니다. "그렇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벌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우리가 그 아이의 피값을 치르게 되었[구나]."(창 42:21-22) 아직도 형들에게 눈치채이지 못한 요셉은 혼란스러운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쏟으며 방에서 뛰쳐나갑니다.
이 '콩가루 집안'과 같은 가족에게 원한과 불신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다른 형들이 벤자민과 함께 돌아올 것을 보장받기 위해 시므온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행운'이 귀가하는 형들과 동행합니다. 곡식으로 가득 찬 자루 속에 그것을 사느라고 치른 돈이 도로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요셉은 이 선물 아닌 선물로 자신이 가진 힘을 표시하고 형들의 두려움을 가지고 노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형들은 "얼이 빠진 사람들처럼 떨었[습니다]."(창 42:48) 거대한 이집트의 총리가 보여준 호의는 분명 무언가 큰 속임수가 있는 게 분명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가져온 식량이 바닥날 때까지 이집트로 돌아오는 것을 미룹니다. 하지만 결국은 굶주림에 못 이겨 벤자민을 동행하고 다시 이집트로 옵니다. 이번에는 두 배의 돈과 사치스러운 선물을 싣고 옵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들을 저녁에 초대하자 형들은 다시 발작을 일으킵니다. "지난번 여기에 왔을 때, 우리가 낸 돈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루 속에 담겨 되돌아왔는데, 그 돈 때문에 우리가 이리로 끌려오는 것이다. 그 일로 그가 우리에게 달려들어서 나귀를 빼앗고, 노예로 삼으려는 것이 틀림없다."(창 43:18) 정확히, 바로 이것이 오래전에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상응하는 요셉의 복수였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연회장에서 그들에게 이렇게 태연히 대꾸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댁들을 돌보시는 하나님, 댁들의 조상을 돌보신 그 하나님이 그 자루에 보물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 나는 댁들이 낸 돈을 받았습니다."(창 43:23) 말 속에 가시가 있습니다. 말 속에 차가운 냉기가 흐릅니다. 요셉은 쉽게 복수를 끝낼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요셉은 바로 시므온을 풀어줍니다. 하지만 그의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들의 귀향길에 다시 속임수를 씁니다. 그들의 곡식 자루 안에, 이번에는 벤자민의 자루 안에 은잔 하나가 몰래 들어가 있습니다. 형들은 다시 요셉의 병사들에게 잡혀 그의 앞으로 끌려옵니다. 요셉은 절대로 이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때 형 중에서 유다가 벤자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해 요셉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만약 라헬의 둘째 아들이 죽는다면 늙은 아비 야곱의 마음이 슬픔으로 무너질 것이라고 탄원합니다. 감옥에서 막 풀려난 시므온도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님의 종으로 삼아서 여기에 머물게 하시고, 저 아이는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창 44:33) 간청합니다. 이제 이야기는 긴장의 절정을 향해 갑니다. 친동생 벤자민과 아버지 야곱에 대한 연민이 요셉의 적개심을 누릅니다. 복수의 충동에 피를 말리던 요셉에게 애정과 연민 그리고 슬픔의 문이 열립니다. 이 이야기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극적인 장면을 읽어봅니다.
"요셉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의 시중들에게 그만 '모두들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요셉은 드디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나서 한참 동안 울었다. 그 울음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밖으로 물러난 이집트 사람들에게도 들리고, 바로의 궁에도 들렸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신다고요?' 요셉이 이렇게 말했으나, 놀란 형제들은 어리둥절하여 요셉 앞에서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이리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니, 그제야 그들이 요셉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했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들보다 앞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요셉은 형들과 하나하나 입을 맞추고,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제야, 형들이 요셉과 말을 주고받았다."(창 45:1-15, 새번역)
25년 이상이나 오래 묵은 한 가족 안의 상처가 극적으로 치유되는 순간입니다. 요셉은 파라오의 동의를 얻어 야곱의 전 가족이 이집트에 "잠시 머물도록" 초청하고 고센 지방의 목초지를 차지하게 해줍니다. 늙은 아비 야곱은 자식들의 화해와 온 가족의 재회라는 큰 기쁨을 이후 17년 동안 누리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이 가나안으로 되돌아갈 것을 고대하며 이집트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뼈가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창 47:30) 이제 비로소 '새로운 민족'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12지파의 한 공동체가 탄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고야 말았을 폭력과 보복의 유혹을 물리치고 화해와 치유를 이룬 결과였습니다.
마침내 '용서'라는 말이 이 이야기의 맨 마지막에, 창세기의 맨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은 다음에 혹시라도 요셉이 앙갚음을 하면 어찌하나 고민하다 아버지의 유언을 요셉에게 상기시킵니다.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창 50:17) 요셉은 다시 웁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그 무거운 과거로부터 온 가족이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언제 가서야 형들의 눈이 열려 이 모든 과정 가운데 작용하고 계신 신비한 화해와 치유의 힘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요셉이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창 50:19-20) 창세기의 가장 유명한 구절의 하나입니다. 요셉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원수 갚은 것은 하나님의 일이니 그것이 자기의 권리가 아님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로써 분열된 이스라엘은 하나의 민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이렇듯 인간의 복수가 미쳐 날뛰어 공동체 안에서 생명이 짓밟히고 평화가 깨지는 것을 막는 데 여념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것이 창세기가 전하는 대단원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이 요셉과 그의 형제들 이야기는 도날드 W. 슈라이버 2세(Donald W. Shriver, Jr.)의 책 『적을 위한 윤리 An Ethic for Enemies』(이화여대출판부, 2001)에서 인용했습니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제가 존경하는 서광선 목사님과 함께 번역한 책입니다. 500페이지가 넘은 이 두꺼운 책은 제 인생 첫 번째 역서입니다. 오늘 저의 설교 제목도 이 책의 제목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적을 위한 윤리!" 20년이 지나 다시 읽어도 이 책의 제목 자체가 참 생경하고 낯섭니다. 이 세상에 '나'와 '우리'와 '이웃'을 위한 윤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적'을 위한 윤리라니요? 그런 게 과연 존재할 수나 있을까요? '정치에서의 용서'(Forgiveness in Politics)라는 원래의 부제목 또한 생경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는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었던가요? 그건 교회나 성당 혹은 사찰에서나 할 이야기지 '정치'에서의 용서라니요? 이 무슨 잠꼬대 같은 이야기란 말입니까! 하지만 저자는 지금까지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윤리의 영역으로 추방되어 있던 용서라는 개념을 과거에 저질러진 악과 그에 대한 보복의 악순환으로 고통 받고 있는 정치 현실 한가운데로 가지고 들어오면서 용서야말로 진정한 화해와 평화로 나아가는 가장 실질적인 방법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용서는 첫째로 망각이 아니라 반대로 기억에서 출발합니다. 무엇이 잘못되고 불의한 것인지 명확한 판단에서 시작합니다. 둘째로 용서는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수의 포기를 요구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자를 '처벌하는 정의'는 '회복시키는 정의'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셋째로 용서는 적도 나처럼 살고싶어하는 하나의 인간이라는, 적의 인간성(humanity)에 대한 공감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용서의 목표는 증오가 나은 분열을 적극적으로 치유하여 함께 사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슈라이버 박사는 지난 20세기 이전의 5천 년 동안 인류가 전쟁에서 살해한 사람들의 숫자를 전부 합친 것보다 20세기 한 세기에 벌어진 전쟁에서 더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는 끔찍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며 이제는 우리가 '죽음의 정치'에서 '생명의 정치'로 반드시 옮겨 가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고통으로 가득 찬 역사 안에서 과거의 악 앞에 용감하게 마주 서되, 보복하겠다는 유혹에 저항하면서, 고난 받는 자의 편에 서서 가해자 및 그의 후손들과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 바로 용서의 윤리적 용기가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도널드 슈라이버 박사님은 지난 7월 28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94세를 일기로 소천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기독교윤리학을 가르쳐준 스승입니다. 그는 미국 신학계의 거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를 잇는 대학자이고 제가 공부한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총장을 역임하셨습니다. 1975년부터 1991년까지, 학교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학교를 살려내고 발전시키셨습니다. 저명한 여성신학자들과 흑인신학자들을 교수로 영입하여 세계 신학교육의 중심으로 발전시키셨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 아버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사회적 불의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런 슈라이버 박사님을 미국의 대표적 흑인 지성의 하나인 코넬 웨스트(Cornel West) 교수는 "20세기 후반, 가장 예언자적인 신학대학 총장이었다"라고 추모했습니다.
슈라이버 박사님은 한국을 사랑하는 분이기도 했습니다. 군사정부 시절 많은 기독자 교수들이 해직당할 때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격려했습니다. 이화여대의 기독교학과의 기독교윤리 전공 현영학 교수님이 신군부의 압력으로 해직 당했을 때는 그를 한국 신학자로는 최초로 유니온의 석좌 초빙교수로 임명했습니다. 정부가 현영학 교수님의 여권 발급을 거부해 아예 출국하지 못하자, 슈라이버 총장님은 유니온 교수회의를 열 때마다 빈 의자를 총장 자리 옆에 놓고 그 자리가 현영학 교수 자리라고 하면서 계속 한국을 위해 기도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리고 1983년에는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님에게 '유니온 메달'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지 않는 유니온의 학칙을 따라 세계 각국의 저명인사에게 부여하는 '유니온 메달'을 수여한 것입니다. 김옥길 총장님은 유니온의 명예박사이시기도 하십니다.
아무쪼록 평생을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 예언자로, 그리고 미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윤리학자로 살아온 그분이 이제 하나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가 쓴 책 『적을 위한 윤리』가 분단과 전쟁으로 두 동강이 난 한반도에, 그리고 남북이 분단된 것도 모자라 동서로, 계층 간, 남녀로 찢긴 남한 사회에 한 가닥 새로운 빛줄기를 비춰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특히 항상 보복이 만연하고 진정한 회개와 사죄 없이 값싼 용서가 진짜 용서인 것처럼 행세하는 남한의 정치 현실에도 조금이나마 성찰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평생 슈라이버 박사님의 동반자로 하나님의 정의와 세계평화를 위해 함께 일한 부인 페기 슈라이버(Peggy L. Shriver) 여사는 시인입니다. 제가 감기에 걸려 아플 때 그분이 끓여주신 치킨 수프를 저는 잊지 못합니다. 그의 시집 『리버사이드 공원의 무용수들 The dancers of Riverside Park』에는 <전쟁의 걸프(만) War's Gulf>이라는 제목의 시가 인상적입니다. '걸프 전쟁'(Gulf War)의 두 글자를 앞뒤로 한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gulf)를 예리하게 노래한 시입니다. 평소 두 분의 삶과 기도가 무엇인지 잘 알려주는 시여서 제가 직접 번역해보았습니다. "내 집에 / 평화롭게 앉아서 / 접시에 남은 음식을 긁으면서 / 나는 매일 뉴스를 보고 / 죽음을 목격합니다 // 화면에서 레이저 십자선에 갇힌 / 탱크를 / 폭탄 조준경을 통해 봅니다 / 나는 그것이 밑에서부터 불타오르는 것을 / 꼼짝없이 지켜봅시다. // 감히 나를 / 그들의 전쟁에 연루시키다니요! / 나를 / 폭력의 관음증 환자로 / 만들다니요! / 생각이 멈춥니다 / 나는 눈을 감습니다 // 그러나 눈을 감으면 / 나 역시 / 완벽하지 않은 역할을 했던 / 빌라도가 됩니다 / TV로 방영되는 전쟁은 사라집니다 // 수많은 시청자가 / 살인을 목격하지만 / 숨 막히는 헐떡거림과 / 타는 비명을 / 아무도 / 듣는 이 없습니다 / 나는 기도합니다 /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고통 가운데 계시기를 // 주께서 그들을 구하시고 / 그리고 또 나 또한 구하시길."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베소서 2:14)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로마서 5:10) 그는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어]...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에베소서 2:14-16)하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이르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38, 44)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태복음 5:9) 복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복수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우리는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17-21) 악을 악으로 갚아 악과 똑같이 되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우리의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생명과 평화의 복음이 분단 76년 속에 아직도 진정한 광복(光復)을 맞이하지 못한 이 민족 위에, 그리고 요셉의 가족처럼 과거의 악과 상처로 풍비박산난 이 나라의 많은 가정 안에 또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서로 치고받는 이 사회 안에 영원토록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오늘의 공동기도문을 다시 묵상합니다. "주님, 저희들을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 어두움에 빛을, /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아멘."(아시시의 프란치스코, <평화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