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그 한 사람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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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50:7-9, 로마서 8:1-2, 31-34, 38-39, 마가복음 3:1-6

설교문

언젠가 제가 인도 마드라스(Madras)의 한 시장을 걷던 때의 일입니다. 수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시장 길에서 갑자기 뒤쪽에서 딸랑딸랑 종을 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돌아보니 행색이 무척 남루한, 걸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자그마한 종을 치며 인파 사이를 뚫고 오고 있었습니다. 동행하던 인도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고 왜 종을 치는가?" 그가 말했습니다. "He is the Dalit, the untouchable!" (저 사람이 바로 달리트야, 불가촉천민!) 힌두교의 카스트(caste) 시스템에 의해 거대한 인도 인구의 약 4분의 1인 2억 명 이상이 태어나면서부터 부정(不淨)한 죄인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왜 인파 속에서 종을 치는지는 몰랐습니다. "나를 피해가시오, 나는 더럽고 오염된 존재요, 이렇게 미리 알렸으니 행여 나와 몸이 닿았다고 나를 때리거나 죽이지 마시고 어서 나를 피해 가시오!"라는 뜻이라고 내 친구는 일러주었습니다. 그때 받은 문화적 충격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21세기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아직도 이런 세상이 있다니요!

2천 년 전 이스라엘 사회에도 오늘날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비슷한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정결법(淨潔法, purity code)입니다. 유대인의 정결법은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그리고 의인과 죄인을 분리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은 '죄인'이었습니다. 장애인도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인지, 즉 자기의 죄인지 그의 부모의 죄인지 물을 정도였습니다.(요한 9:1-2) 한마디로 정결법은 '정죄'(定罪)의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죄는 우리말 사전에서 '죄가 있다고 단정함' 혹은 '전생에 이미 정해진 죄'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서는 이를 "condemnation"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유죄 판결'이나 '심한 비난'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정죄는 죄가 아님에도 죄라도 미리 판정하여 비난하는 것입니다.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somebody", 즉 누군가 소중한 한 사람을 "nobody", 즉 몸(body)이 없는(no) 사람으로, 하찮은 사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마가는 이스라엘이 당면한 모든 문제의 본질이 정결법에 있다고 보고 이와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그 대표적 본문이 오늘 복음서의 말씀인 마가복음 3:1-6입니다. 이 본문은 이스라엘에서 수백 년간 이어진 정결법 논쟁에 대한 마가의 결론이자, 약하고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폭력의 법에 맞서 죽기까지 한없는 자비와 긍휼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사랑에 대한 뜨거운 증언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한 논문을 기초로 풀어보려 합니다. 얼마 전 강현석 박사가 그의 논문 한 편을 선물로 보내주었습니다. 권위 있는 학술지 「神學思想」 제193집(2021 여름)에 실린 "두려움의 시대, 사람의 마음 - 마가의 문제의식 : 마가복음 3:1-6의 번역과 해석"이라는 제목의 논문 별쇄본입니다. 이 작은 논문이 저에게 선물처럼 여겨진 것은 그것이 3년 전 제가 참여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고려대학에 출강 중입니다.

그의 학위 논문은 성서해석의 역사에서 큰 논쟁이 있었던 마가복음의 마지막 구절(16:8)을 인상적으로 재해석한 논문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마가복음의 결말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세 여인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듣고 무덤을 나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려움 속에서 침묵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서 이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 개역개정) 하지만 풍부한 언어적 감각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판소리를 참고한 연구자는 마가복음이 구술문화가 지배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눈으로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리 내어 읽기' 위해서 쓰였음에 주목하고 맨 마지막 문장, 즉 여인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έφοβουντο γάρ, 에포분토 가르)를 한국어의 토를 달아 "두려워졌다 아이가!"라고 해석함으로써 마가복음의 이른바 '이상한' 결말은 사실 마가가 의도적으로 청중으로 하여금 두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의 길을 따라 산 여인들의 삶에 공감하도록 만들었음을 논증하였습니다. (강현석, 「Γάρ 종결의 결말 해석을 위한 마가복음의 입말체 문장 연구」, 서강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8.)

실로 성서는 눈으로 읽으라고 쓴 책이 아닙니다. 학교 교육이 없던 그 옛날엔 오늘날 우리처럼 성서를 묵독(默讀)하는, 즉 소리를 내지 않고 속으로 읽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라고 말한 것처럼, 성서는 눈으로 읽는 문자 언어가 아니라 귀로 듣는 소리 언어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 집단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그 집단만이 느낄 수 있는 '표현 에너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상도 말 '우야꼬'에는 다른 말로 쉽게 번역될 수 없는 독특한 표현 에너지가 있습니다. 만약 이 단어를 영어로 "What Can I Do?"나 "Oh My God!"으로 번역한다면 '우야꼬'라는 말소리에 담긴 정감과 표현 에너지는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고 합니다. "강물은 흐른다"와 "강물이 흐른다"라는 두 문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두 문장은 '은'과 '이'라는 작음 음절 하나의 차이만을 가집니다. 하지만 "강물은 흐른다"는 무언가 선언적이면서 장엄한 심상(心象, imagery)을 전달합니다. 이와 달리 "강물이 흐른다"는 담담하고 나직한 심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렇듯 눈으로 읽는 글이 아니라 입에서 발화(發話)되는 말소리는 강역, 고저, 그리고 장단을 통해 서로 다른 에너지를 표현합니다. 신약성서가 쓰인 그리스어 문법에도 작은 음절 하나마다 서로 다른 고유한 힘이 있다고 합니다. 『혼불』의 저자 최명희는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의 시대를 살며 복음서를 썼던 마가의 마음이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 무엇을 깊이 새겨놓았을까요. 3장 1절부터 읽어봅니다. 원문을 순차대로, 우리말에 가장 가까운 어감의 입말체[口語體]로 번역한 강현석 박사의 번역을 따라 다시 읽어봅니다.

예수는 다시 들어갔고 / 회당 안으로

그곳에는 한 사람이 있었어 / 말라버린 한 손을 가진

마치 카메라가 이동하며 대상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앵글이 '회당 → 한 사람 → 말라버린 손'의 순서로 점차 클로즈업됩니다. 이를 듣는 청중은 단락의 시작부터 회당에 있는 어느 한 사람과 그의 손에 집중하게 됩니다. "예수는 다시 들어갔고 / 회당 안으로 // 그곳에는 한 사람이 있었어 / 말라버린 한 손을 가진." 이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한쪽 손이 말라 죽어버린, 신체에 흠이 있는 이 병자를 마가는 '안트로포스'(ἅνθρωπος), 즉 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구약의 전통에 의하면 신체에 흠이 있는 사람은 제단과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레위기 21:17-24) 그에게 회당 출입은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회당에 나와 있는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해서는 안 되는, 그러니까 함께 있지만 함께 있는 것이 아닌 유령 같은 존재였습니다. 있으나 없는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마가는 이 존재가 '안트로포스' 즉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이를 위해 3장 1절의 바로 앞 두 구절에서 마가는 의도적으로 '안트로포스'라는 같은 단어를 두 번이나 반복해 사용하면서 이 사람의 출현을 예고합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안트로포스'(사람)를 위하여 있는 것이요 '안트로포스'(사람)가 안식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안트로포스'(사람)의 아들은 안식에도 주인이니라."(마가 2:27-28) 여기에 바로 이어서 마가는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안트로포스'(사람)가 거기 있는지라"(3:1)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청중은 '사람 - 사람의 아들 - 사람'의 순서로 '안트로포스'를 반복해 듣습니다. 마가는 이렇게 복음서를 듣고 있는 청중에게 '안트로포스'(사람)의 문제 문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회당에 나와 있으면서도 사람들과의 접촉이 끊긴 한 손 마른 사람, 우리의 앞에 존재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의 문제를 마가는 첫 구절에서 우리에게 제기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주시하고 있었어 / 안식일에 그를 고치는지

예수를 고발하기 위해

3장 2절입니다. 회당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적대자들로서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치유하면 이를 빌미로 그를 고발하려고 두 눈 부릅뜨고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집단은 '서기관들'(scribes)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Torah)를 읽고 해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을 넘어 재판 과정과 판결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자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검사나 판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더 많이 언급하며 비판하는 마태나 누가와 달리 마가는 서기관들을 더 많이 언급하면서 그들에게 비판을 집중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 귀신에 들렸다고 비난했고(3:22),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사람들을 투입했으며(14:43), 그를 직접 심문하고(14:53), 예수님을 사형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몄으며(15:1), 심지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마저 그 아래서 예수님을 조롱했던 집단입니다.(15:31) 그런데 이들은 지금 한쪽 손 마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예수가 법을 어기는지 안 어기는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손 마른 사람은 "nobody"일 뿐입니다. 그 병들고 지친 사람은 단지 예수를 고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예수가 바로 그 한 손이 말라버린 사람에게 말하는 거야

일어나요 가운데로 와요

3장 3절입니다. 한글 성서들은 이 구절을 "일어서라"(개역개정), "일어나서 나오너라"(공동번역, 새번역) 등 권위적이고 단호한 말투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라 죽어버린 손을 숨긴 채 회당 한쪽에 숨죽여 앉아 있던 그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을 고려한다면 "일어나요"와 같이 따뜻한 느낌의 번역이 더 어울립니다. "일어서요 가운데로 와요"라는 말씀 안에는 회당의 구석진 한 귀퉁이에 숨죽이고 있던 그 사람에 대한 '격려'와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일상의 공간으로의 '초대'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격려와 초대는 이 병자에게 죄가 없음을 선언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정결법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는 마가복음 2장에서 한 중풍 병자를 고치시며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가 2:5 - 개역개정)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문장은 "아이야 너는 죄가 없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번역된 단어인 '아피엔타이'(άΦίενταί)는 완료 시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오랫동안 앓아왔던 병의 완치를 선언하는 의사가 환자에게 "암세포가 다 없어졌습니다"라는 완료 시제의 말 대신 "깨끗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피엔타이'는 과거에는 죄가 있었고 지금은 '용서를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너에게는 죄가 '없다'라는 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아이야, 아픈 너는 죄가 없다. 아픈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병자를 죄인으로 모든 정결법의 정죄로부터 그를 해방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이 서기관들에게는 이스라엘 사회와 율법 체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말로 들렸고, 예수는 마땅히 죽어야만 하는 '신성모독의 죄'(마가 2:7)를 지었다고 판단하게 것입니다. 마가는 이제 다음 구절을 통해 예수를 고발하려고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는 이들의 정체를 폭로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하는 거야 / 안식일에 당연한 게

선을 행하는 겁니까 / 악행하는 겁니까?

생명을 구하는 겁니까 / 살해하는 겁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었어

예수께서 너무 열 받아서 그들을 둘러보는데

슬퍼진 거야

그들의 굳어버린 그 마음에

3장 4~5절입니다. 이 구절을 다른 한글 성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개역개정)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옳다'라는 말보다 '당연하다'라는 말이 더 원래의 뜻을 잘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기보다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너무도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이 일마저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몰아치십니다. 마가는 예수님 질문을 단어를 축약하고 길이를 조절하면서 역동적으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당연한 게 "선을 행하는 겁니까 아니면 악을 행하는 겁니까"라고 묻지 않으시고 "선을 행하는 겁니까 악행하는 겁니까"라고 축약해서 물으셨습니다. "생명을 구하는 겁니까 아니면 생명을 죽이는 겁니까"라고 묻지 않으시고 "생명을 구하는 겁니까 살해하는 겁니까"라고 역시 축약해서 물으셨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마저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너무도 쉬운 질문이지만 그들은 답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의 침묵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기만 하면 그를 잡아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렇듯 그들의 안중에는 끝까지 손 마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침묵은 사실 한쪽 손이 마른 그 사람에 대한 침묵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질병과 장애 그리고 사회적 격리로 고통받는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법과 질서와 상식을 논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법과 질서와 상식은 그 한 사람을 놓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을 향하지 않는 법과 질서와 상식은 모두를 위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정의와 정결을 흉내 냈지만 거룩함의 탈을 쓴 종교적 사기꾼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이들의 마음이 '굳어버렸다'라고 말합니다. 실로 그들의 마음은 "완고하고"(공동번역), "고집스러워"(현대인의 성경) 차가운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슬퍼졌습니다. "예수께서 너무 열 받아서 그들을 (찬찬히) 둘러보는데 / 슬퍼진 거야 / 그들의 굳어버린 그 마음에."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뒤틀려버린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을 마주하신 주님은 슬퍼지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에게 말하는 거야

그 손을 내밀어요 / 그는 내밀었고

그의 손을 회복되었어

3장 5절입니다. 마가는 여기서도 특유의 표현 기법으로 손을 시각적으로 클로즈업합니다. "그 손을 내밀어요 / 그는 내밀었고." 같은 동사의 '내밀어요'와 '내밀었고'는 연속적이고 즉각적인 동작을 보여줍니다. 기어코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를 고치기만 하면 그걸 빌미로 자신을 잡아넣으려고 적대자들이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는 상황인데도, 그 위험한 순간에 예수님의 안중에는 오직 '그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그 한 사람만 보였습니다. 질병과 장애와 단절로 고통 받는 그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안식일에 선이 아니라 악을 행해도,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여도 그것이 옳다고 침묵으로 강변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잠시도 고통 받는 사람의 치유를 미루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밖으로 나갔고 /

바리새인들은 즉시 헤롯당과 연합해 예수에 대해 결의했어

어떻게 그를 죽일지

마지막 구절인 3장 6절입니다. 이 이야기의 맨 끝에 "어떻게 그를 죽일지"라는 문장이 위치하는데, 이 문장을 마지막으로 들으며 청중은 섬뜩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기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평소에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이해관계가 달랐던 이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살렸다는 이유로 순식간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병들고, 지치고, 고통 받는 한 사람(안트로포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들은 법과 질서와 상식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린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정말 그 한 사람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은 온 우주의 죽음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합니다.(마태 16:26) 그러므로 수백만의 죽음도 있지만 한 사람의 죽음은 온 천하의 죽음입니다. 아니 한 사람도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한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숫자와 통계 안에는 언제나 '그 한 사람'이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는 언제나 한 사람씩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그 사랑의 신비를 오늘의 공동기도문(마더 테레사, <한 번에 한 사람>)이 노래합니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 다만 한 사람을 바라볼 뿐입니다 /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 나도 시작하는 것입니다 / 난 한 사람을 붙잡습니다 /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 난 4만 2천 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습니다 /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 바다는 그 한 방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 당신의 가족에게도, /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단지 시작하는 것입니다 / 한 번에 한 사람씩."

이스라엘은 지중해로부터 서풍이 붑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 동쪽 기드론 골짜기 인근과 감람산 비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덤이 밀집되어 있습니다. 무덤이 예루살렘 성의 동쪽에 위치한 이유는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전이 부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의 미드라시(Midrash)에는 바람이 불 때 문둥병자의 동쪽으로는 4큐빗(cubit, 약 2미터) 이내,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100큐빗(cubit, 약 50미터) 이내로 걷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마저 무서운 시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 앞에서 이와 비슷한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체포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베다니에 머무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성 동쪽 감람산 비탈에 있는 묘지들을 지나, 더 동쪽에 있는 감람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나병 환자들과 유출병자들의 수용소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부는 서풍으로 인해 무덤과 부정한 것들이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어야 했지만, 이른바 '죄인'이라는 나병 환자들이 사는 베다니는 이보다 더 동쪽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 성의 동쪽은 변방의 변방, 저주받은 땅이었습니다. 나사로와 나병 환자 시몬 등이 여기에 살았습니다. 병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격리되어야 했던 사람들이 거기에 살았습니다.

이 베다니가 있는 감람산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기 직전에 여기에서 그 아름다운 성전을 마주 보고 계셨습니다. 가장 거룩한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가장 부정하다는 여겨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베다니에서 주님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 성과 그 안에 있는 화려한 성전을 마주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그 배신의 날에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일이 무엇인지 이렇게 스쳐 지나가듯 담담한 문장으로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셨다]."(마가복음 14:3 - 개역개정) 주님은 잡히시던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가장 가난했던 사람들과 함께하시며 가장 부정하다 여겨진 한 나병 환자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저 멀리 지중해에서 불러오는 바람에도 오염될까 두려워 무덤보다 더 동쪽에 있던 나병환자의 마을 베다니, 하지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소위 '죄인'이라 불린 병자들이 함께 비스듬히 누워 정겹게 식사하던 그 시몬의 집이 사실은 가장 거룩한 성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성전은 화려한 건물과 의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큰 소리로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한 찬송가(438장)의 가사처럼 "내 주 예수 모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 성전입니다. 그가 임재하고 현존하는 곳이 가장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래서 정결법과 용갑하게 맞서 싸우는 마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에 예루살렘 성전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마가 15:38)라고 말합니다. 천년이나 지탱해온 이스라엘의 성전 체제와 정결법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무너졌다고 말합니다. 실로 예수께서 예고하신 대로 성전이라는 그 큰 건물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졌습니다]."(마가 13:2) 사람들의 무지와 두려움을 숙주(宿主) 삼아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리하고 의인과 죄인을 분리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장애 입은 사람들을 '정죄'하던 정결법도 성전과 함께 무너졌습니다. 대신 요한의 증언대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19) 말씀하신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우리의 새로운 성전이 되셨습니다. 그 이후로 그 주님이 계신 곳이 우리에게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요 참 성전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하셨습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이사야 50:8-9)라고 이사야 예언자는 외쳤습니다. 이 외침이 오늘 여러분의 외침이 되고 여러분의 자존감의 근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모든 정죄에서 해방하시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로마서 8:38-39) 했습니다. 이 사도 바울의 이 확신과 믿음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희망과 감동과 용기를 주기 바랍니다. 주께서 시작하셨습니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우리도 주를 따라 한 번에 한 사람씩 사랑하고 섬기며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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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니체의 시각에서 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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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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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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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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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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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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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