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경청(傾聽)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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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28:23-29, 고린도전서 14:10-12, 마가복음 4:9

설교문

창조절(創造節, Season of Creation)이 시작됐습니다. 창조절은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인 1989년에 동방정교회 총대주교 디미트리오스 1세가 매년 9월 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제안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후 약 10여 년이 지나 유럽의 주요 개신교회들이 이를 수용하였고, 또다시 약 15년이 지나 프란치스코 교종(敎宗, Pope)도 이를 수용하여 가톨릭교회까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세계교회는 매년 9월 1일부터 10월 4일까지, 그러니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축일인 10월 4일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창조세계라는 선한 선물을 기념하는 절기를 지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드린 '공동의 기도'도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전 세계 많은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교인들이 똑같이 드린 기도문입니다. 서로 분열된 지구상 22억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한목소리로 기도드리니, 오늘은 하나님께서 '크리스천들이 왜 평소 안 하던 일을 하는가!' 가상하게 여기실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경청'(傾聽)입니다. '경'은 '기울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경청은 그냥 듣는 게 아니고 몸을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몸을 기울이고 눈을 맞추며 마음을 집중하여 귀로 듣는 것을 경청이라고 합니다. 이성호 교수가 말하듯이 (『지구정원사 가치 사전』) 우리는 조용한 중에도 남의 이야기를 듣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부모는 사람이 많은 광장에서도 자기 자녀의 모습, 자기 자녀가 외치는 소리를 한 번에 알아챌 수 있지요. 왜냐하면, 자녀를 늘 돌봐왔고, 부모와 자식 사이는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조용한 집 안에 있어도 부모가 자녀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직장과 가사에 바빠서 그럴 수도 있지만, 대개는 자녀의 속 이야기와 고민을 진심으로 들어줄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아서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들은 부모를 향한 마음을 닫게 되고, 결국은 가정불화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자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습니까? 직장과 친구 사이에서도 상대방의 이야기에 몸을 기울여 눈을 맞추며 마음을 집중하여 귀로 듣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아픔 중 하나는 우리가 자녀와 부모와 친구와 이웃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의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경청이라는 미덕을 인간관계에만 적용했지 인간 사이를 넘어 자연과의 관계로 확장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자신의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동료 피조물(fellow creatures)은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듣지 못할 뿐입니다. 아니 들으려 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의 구약성서 말씀(시편 19편)은 그리고 우리가 힘차게 부른 하이든 작곡의 저 유명한 찬송가(78장)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편 19:1-4)라고 선포합니다. 우리 귀에 들리는 소리 없으나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하나님]의 소리와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른다]" 했습니다. 이 무슨 신비의 말씀입니까.

주중에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에서 동물행동학을 연구한 마들렌 치게(Madlen Ziege)의 책 『숲은 고요하지 않다 Kein Schweigen Im Walde』 (흐름출판, 2021)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식물, 동물, 그리고 미생물[이 부르는] 경이로는 생명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은 책입니다. 부제대로 대자연의 모든 생명은 노래하고 대화하고 소통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저자는 자연이 내는 소리가 악기가 내는 소리와 흡사하다고 말합니다. 오케스트라에서 다양한 악기가 소리를 내는 것처럼, 자연의 생명체들도 다양한 물질을 진동시켜 소리를 냅니다. 자연에는 현악기와 타악기와 관악기 등 온갖 악기가 다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고함원숭이'는 이름대로 수 킬로미터 밖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아주 큰 소리를 냅니다. 큰 소리만이 아닙니다. 식물에도 귀를 기울여보면 아주 작으나 소리를 내는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물을 수송하는 통로에서 소리가 납니다. 특히 적은 물로 버텨야 하는 식물의 경우, 물 수송로에 종종 기포가 생기는데, 이 기포가 터질 때 작은 타악기를 치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납니다. 어린 옥수수(zea mays) 뿌리는 220헤르츠의 '딸깍' 소리를 내면서 땅속에서 길을 찾아 뻗어 나갑니다. 식물은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오이나 벼는 50헤르츠의 음을 들려주면 싹이 더 잘 발아합니다. 완두콩은 흐르는 물소리에 반응합니다.

이렇듯 모든 생명은 소리를 내고 소리를 듣습니다. 소리 기관이 없는 거미도 그냥 여덟 개 다리로 바닥을 때려 '비트'를 생성해 소통합니다. 왕거미는 온몸으로 잎사귀를 진동시켜 소리를 냅니다. 야생토끼는 '빠른 연타'의 전문가인데, 위험이 임박하면 강력한 뒷다리로 땅을 때리기 시작하는데, 이때의 생기는 음파가 땅속 깊은 곳까지 퍼져 동료들에게 안전한 집을 떠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의 모든 생명은 활발한 바이오커뮤니케이션(biocommunication)을 통해 서로 대화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정보와 대화와 의미로 가득 찬 세상입니다. 의사소통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간직한 능력이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심포니 대부분을 귀로 직접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귀는 오직 16헤르츠에서 2만헤르츠 영역의 음파만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음파의 하한선과 상한선이 모든 소리의 다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들을 수 없는 온갖 소리와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도 시편 19편 기자는 바로 이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최일환 님의 시 <풀잎의 귀>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읽어봅니다. "풀잎들에게는 / 작은 귀가 있다 // 하나님이 듣기 좋아하신 / 아이들의 이야기를 / 담아 듣는 초록색 귀 // 하나님이 보낸 / 실바람의 속삭임도 / 곱게 담아 듣는다 // 밤이면 풀벌레들은 / 서로 곱게 목청 다듬어 / 풀잎의 귀에 담기려 / 노래한다 // 그 고운 얘기를." 우리도 풀잎들처럼 이렇게 실바람의 속삭임도 곱게 담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질 수 있을까요?

언젠가 EBS(교육방송)의 방영한 <존재의 소리>라는 프로그램이 생각납니다. 산과 들, 바닷가를 무대 삼아 계절별로 일어나는 생태계의 움직임을 소리에 담은 인상적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노루 풀 뜯는 소리, 실베짱이 우는 소리, 기러기떼 소리, 눈 내리는 소리... 아무리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소리를 대형 집음기로 잡아냈습니다. 개미귀신이 쳐놓은 덫 속으로 빠져드는 개미들의 소리, 직박구리 둥지를 터는 뱀, 새끼를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싸우는 새들의 날개짓, 매미를 꿈꾸는 고치의 움직임, 홍시를 파먹는 까마귀, 물수리의 사냥, 바람에 부딪히는 갈대, 눈 덮인 산속에서 꿈틀대는 생명들, 비오리와 노랑 할미새가 새끼에게 쏟는 정성을 모두 소리로 표현했습니다. 효과음 하나 사용하지 않고 자연이 태어나고 사랑하고 죽는 그대로의 소리, 천연의 소리를 담아냈습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영상에만 의존하던 다큐멘터리의 영역을 소리로 넓힌 뛰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만든 제작진의 말이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무리 큰 소리도 신경을 쏟지 않으면 들리지 않고, 아무리 작은 소리도 들으려는 사람에겐 들리더군요."

이강학 교수가 저와 함께 펴낸 책 『지구정원사 가치 사전』에서 적절하게 비유를 드는 것처럼, 미하엘 엔데(Michael A. H. Ende)의 소설 『모모』에서 모모가 지닌 유일한 특기는 '경청'이었습니다. 모모는 경청을 통해 진정한 친구를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삶에 지친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삶의 기쁨을 회복하고 의미를 되찾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봅니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말끄러미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모모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거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문득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끔, 그렇게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모모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 무엇이었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즉 경청이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스스로 치유되고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모의 경청하는 태도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을 향해서도 일관되었습니다. 다시 책의 한 부분을 읽어봅니다. "모모는 이 세상 모든 것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개, 고양이, 귀뚜라미, 두꺼비, 심지어는 빗줄기와 나뭇가지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그들은 각각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모모에게 이야기를 했다."

모모처럼 자연을 경청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첫째로, 자연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일찍이 그리스도교의 교부(敎父, Church Fathers)들에게 자연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두 번째 책'이었습니다. 첫 번째 책은 성서이지요. 사도 바울은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로마서 1:20)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시편 19편 기자가 바울보다 훨씬 앞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감탄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연 만물에는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을 경청하면 자연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인 자연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있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스며들어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자연을 경청하면 우리는 만물이 하나님께서 함께 살라 지어주신 동료 피조물로 서로 형제자매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 몸을 기울여 온 존재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 이 땅의 모든 생명이 나와 함께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지으신 존엄한 존재요, 소중한 친구며, 자매와 형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 자연을 경청했다면 우리는 오늘날처럼 이렇게, 오늘의 공동 기도문이 고백하는 것처럼, "힘을 지니고 싶어 지구가 자신의 한계를 넘을 때까지 밀어붙[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우리는 지구의 자생력과 조화를 이루지도 않고, 순환에 맞추어 소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한때 생명과 유대관계로 가득했던 암초와 동굴, 높은 산과 깊은 바다는 건조한 사막이 되어 마치 창조 이전의 모습처럼 비어버렸습니다."

차옥혜 님의 시 <다 함께 친구로 살아요>를 읽어봅니다. "가시연꽃, 창포, 잉어, 소금쟁이, 논병아리 / 소나무, 억새, 패랭이꽃, 나비, 곰, 토끼, 사마귀 / 조개, 낙지, 망둥이, 게, 함초, 갯개미취 / 다 함께 친구로 살아요 / 그래야 사람이 살아요 나도 살아요 / 늪과 산과 갯벌 더 이상 죽이지 말아요 / 강과 바다와 벌판 더 이상 죽이지 말아요 / 지구는 사람만이 주인이 아니잖아요 / 만물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 만물의 영장이 아니어요 / 생이가래, 마, 피라미, 물방개, 논우렁, 노랑저어새 / 배추, 백일홍, 봉숭아, 쑥, 곰취, 날개하늘나리 / 여치, 땅강아지, 박쥐, 노루, 소쩍새, 청개구리, 붕어 / 갯메꽃, 갯질경이, 갯지렁이, 주꾸미, 바지락 / 다 함께 친구로 살아요 / 다 함께 친구로 살아요."

우리 시대의 위기를 영적으로 깊이 통찰한 토마스 베리(Thomas Barry) 신부는 그의 역작(力作) 『위대한 과업 Great Work』에서 오늘 우리 인간의 문제를 이렇게 짚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는 말하면서도 강물과는 이야기할 줄 모르며, 강물의 말도 들을 줄 모른다. 우리는 고귀한 대화를 상실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주를 상실했다... 이제 우리의 목소리를 낮추고, 우리의 기계론적 방식을 지구의 생물학적 과정에 강요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우리는 고립된 인간으로서의 위대함이 아니라, 보다 거대한 지구 공동체와의 친밀함 안에서 우리 자신을 성취해야 한다. 인간의 운명은 지구의 운명과 통합되어 있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자신이 들을 수 있는 소리만 소리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인간에게 사도 바울은 오늘의 신약서신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영적인 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린도전서 14:10-12) 우리는 이 영적인 것을 상실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을 상실했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와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분입니다. 시편 기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노래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편 40:1-2) 또 노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시편 66:19-20). 그리고 또 이렇게, 어쩌면 인간의 입에서 발화(發話)할 수 있는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말로 다시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편 116:1-2)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이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들으라'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이사야 55:1-3)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자연을 지혜로 경영하시는지에도 귀 기울여 들으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을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여서,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주의 깊게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씨를 뿌리려고 밭을 가는 농부가, 날마다 밭만 갈고 있겠느냐? 흙을 뒤집고 써레질만 하겠느냐? 밭을 고르고 나면, 소회향 씨를 뿌리거나 대회향 씨를 뿌리지 않겠느냐? 밀을 줄줄이 심고, 적당한 자리에 보리를 심지 않겠느냐? 밭 가장자리에는 귀리도 심지 않겠느냐? 농부에게 밭농사를 이렇게 짓도록 일러주시고 가르쳐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소회향을 도리깨로 쳐서 떨지 않는다. 대회향 위로는 수레바퀴를 굴리지 않는다. 소회향은 작대기로 가볍게 두드려서 떨고, 대회향도 막대기로 가볍게 두드려서 떤다. 사람이 곡식을 떨지만, 낟알이 바스러지도록 떨지는 않는다. 수레바퀴를 곡식 위에 굴릴 때에도, 말발굽이 그것을 으깨지는 않는다. 이것도 만군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마지막 구절은 개역개정으로 돌아갑니다]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이사야 28:23-29) 농법에 대한 '디테일'이 범상치 않습니다. 땅을 경영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기묘하며 광대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한복음 15:1)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농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대자연에 담긴 기묘하며 광대한 하나님의 지혜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가복음 4:9, 4:23; 마태복음 11:15, 13:9, 13:43; 누가복음 8:8)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요한계시록 2:7, 2:11, 2:17, 2:29, 3:6, 3:13, 3:22)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총명'(聰明)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총명하게' 키우고 싶어 합니다. 우리 자신도 '총명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원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이 단어를 살펴보니 귀가 밝을 '총'(聰)에 밝을 '명'(明)입니다. 그러니까 총명하다의 뜻은 귀로 잘 듣고 눈으로 잘 보는 것입니다.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려야 총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사람'을 넉 '사'(四) 자에 볼 '람'(覽) 자로 풀이한 적도 있습니다. '사람'[인간]이란 '사람'(四覽), 즉 귀와 눈과 코와 입 네 가지가 잘 열려야 진정한 사람이라는 풀이입니다. 귀로 잘 듣고, 눈으로 잘 보고, 코로 잘 숨 쉬고, 입으로 잘 말하는 사람이라야 진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총명한' 아이는 그저 머리만 좋은 아이가 아닙니다. 총명한 아이는, 그리고 총명한 사람은 잘 듣고, 잘 보고, 잘 숨 쉬고, 잘 말하는 사람, 그렇게 얼이 들어오고 나가는 굴, 즉 '얼굴'이 열린 아이이고 사람인 것입니다. 이번 창조절에는 우리 모두 이런 '총명한' 사람, '총명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총명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슬기로운 신앙생활'을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총, 균, 쇠』의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Jerad M. Diamond) 교수는 한 국내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2050년, 우리 문명은 이제 30년 남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050년 탄소중립'까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경고였습니다. 로컬경제 운동의 선구자이자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의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Helena Norberg Hodge)는 그래서 "왕처럼 행동하지 말고 속도를 늦춰보세요"라고 호소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왕'이 아닙니다. 하지만 마치 우리가 이 세계의 주인이나 신이라도 된 것처럼 교만하고 오만하게 굴었습니다. 그런 호모 사피엔스의 운명이 지금 백척간두(百尺竿頭) 위기에 서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를 1.5도로 억제하지 못하면 사피엔스의 문명은 더 이상 보장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는 세속의 예언자들을 통해 계속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들으십시오. 먼저 들어야 합니다. 듣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들립니다. 내 마음이 차분하고 고요해야 들립니다. 자녀들의 무언의 외침에 귀 기울이십시오. 이웃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십시오. 자연 만물을 향해 귀 기울이십시오. 하이든이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엄숙한 침묵 속에서 뭇별이 제 길 따르며 지구를 싸고 돌 때에 들리는 소리 업어도 내 마음 귀가 열리면 그 말씀 밝히 들[릴]" 것입니다. "우리를 지어내신 대주재(大主宰) 성부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릴 것입니다.(찬송가 78장 3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듯이]"(로마서 10:17), 우리의 구원도 말씀을 들음으로 시작됩니다. 들으십시오. 몸을 기울이고, 눈을 맞추며, 마음을 집중하여 귀로 들으십시오.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구원이 이 들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해인 님의 시 <귀를 기울이며>을 읽으며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귀로 듣고 / 몸으로 듣고 / 마음으로 듣고 / 전인적인 들음만이 / 사랑입니다 // 모든 불행은 / 듣지 않음에서 시작됨을 / 모르지 않으면서 / 잘 듣지 않고 / 말만 많이 하는 / 비극의 주인공이 / 바로 나였네요 // 아침에 일어나면 / 나에게 외칩니다 // 들어라 / 들어라 / 들어라 // 하루의 문을 닫는 / 한밤중에 / 나에게 외칩니다 // 들었니? / 들었니? / 들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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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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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