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브니엘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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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창세기 32:24-30, 에베소서 5:1-8, 마태복음 5:1-3

설교문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두 번째 맞이하는 추석입니다. 추석(秋夕)은 음력으로 8월 15일인데, 한가위 혹은 중추절(仲秋節)이라고도 합니다. 한가위란 '크다'라는 뜻의 '한'과 '가운데'라는 뜻의 '가위'가 합쳐진 말로, 8월의 한가운데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예로부터 "일 년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는데, 일 년 동안 정성으로 기른 곡식과 과일을 거두어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이웃과 나누어 먹으며 하루 종일 즐겁게 지냈기 때문에 생긴 말 같습니다.

성서에도 이런 한가위와 같은 기쁨을 표현한 구절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31:12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귀환할 것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예레미야 31:12) 사실 이스라엘이 바라는 '여호와의 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은 "거기 곧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의 가족이 즐거워"(신명기 12:7)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참 소박한 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복'(福, blessing)이라고 합니까? 어떤 때 "복 받았다"라고 말합니까? 무병장수? 소원 성취? 만사형통? 사업 번창? 입학과 취업? 흔히 사람들은 일하지 않고도 큰 소득이 생겼을 때 횡재했다고, 복 받았다고 말합니다. 복권이라도 당첨되면 말 그대로 '대박'이라고, 복이 터졌다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성서가 말하는 복은 참 소박합니다. 시편 128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네 손으로 일한 만큼 네가 먹으니, 이것이 복이요 은혜이다."(시편 128:2 - 새번역) 서재경 목사가 이야기하듯이 ("복과 은혜", 「기독교사상」 2014년 5월호), 시편 128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사람과 그 가정에 주시는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노래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가 무엇입니까?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것"(개역개정)입니다. 자기 손으로 일하고 또 일한 만큼 먹는 것, 그것이 신앙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과 은혜입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복과 은혜는 '자다가 얻어먹는 떡'과 다릅니다. 자기 수고의 열매를 자기가 누리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하고 싱거운 말이지만 이 말이 성서 전체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복과 은혜이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입니다.

성서를 볼까요. 전도서 기자는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전도서 2:24 - 새번역)라고 말하며 그것이 '복된 삶'임을 강조합니다. 이사야는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이 돌아올 때 "곡식을 거둔 사람이 곡식을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거둔 것을 먹고, 주님을 찬송할 것이다. 거둔 사람이 자기가 거둔 것을 내 성소 뜰에서 마실 것이다"(이사야 62:9 - 새번역)라고 예언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임을 강조합니다. 아모스는 심판 후에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하나님의 구원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로잡힌 내 백성 이스라엘을 데려오겠다. 그들이 허물어진 성읍들을 다시 세워, 그 안에 살면서 포도원을 가꾸어서 그들이 짠 포도주를 마시며, 과수원을 만들어서 그들이 가꾼 과일을 먹을 것이다."(아모스 9:14) 미가는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미가 4:4)이라 예언하면서 그게 하나님 주시는 평화라고 말합니다.

왜 이렇듯 성서는 거듭해서 '자기가 일한 것을 자기가 누리는 것'이 구원이요 정의이며 평화라고 강조하는 것일까요?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특히 구약성서가 말하는 복과 은혜의 바탕에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이 깔려 있습니다. 자기가 일한 것을 자기가 먹지 못하고 다 빼앗겨야 했던 고통의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이집트에서의 노예살이입니다. 거기서 히브리인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뼈 빠지게 일하고도, 죽도록 고생하고도, 그 열매를 고스란히 빼앗겼습니다. 자기가 일한 만큼 먹기는커녕 채찍으로 얻어맞고 학대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울부짖던 히브리 노예들을 하나님께서 해방하셨습니다. 그것이 출애굽입니다. 모세가 파라오 앞에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라' 요구했을 때 그가 원했던 것은 정확히 이스라엘이 광야로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서 화목제를 드리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출애굽기 5:3, 8:25∼27) 화목제(和睦祭, fellowship offering)란 동물의 지방만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가족 혹은 공동체의 공동식사로 돌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이란 압제자의 밥상 아래서 먹는 모멸적인 식사가 아니라, 비록 허름한 식사여도 하나님 앞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순도순 함께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살겠다는 소망의 표현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말하고 소망하는 하나님의 복과 은혜의 원형(元型, archtype)입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그토록 '자기 손으로 일한 만큼 자기가 먹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요 또 정의와 평화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이것은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라는 식의 천박하고 오만한 주장이 아니라, 가난과 억압의 긴 고통의 시간 속에서 위로와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함께 일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겠다는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산 위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 5:2-3)라고 말씀하시며 여덟 가지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 5:3-10) 여기서 선포하신 여덟 가지 복을 '산상팔복'(山上八福), 혹은 이 여덟 가지 복들이 세상이 말하는 복이 아니라 참된(진짜) 복이라는 뜻에서 '진복팔단'(眞福八端)이라고도 합니다.

사실, 이덕주 교수가 말하듯이 (『(이덕주의 산상팔복 이야기) 八福』, 홍성사, 2021), 주님이 선포하신 여덟 가지 복은 이해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그 뜻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언뜻 동양 사람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복'에 관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복 있는 사람이라고 언급하신 사람들, 즉 옛날 성경의 한자어로 '허심자'(虛心者,) '애통자'(哀慟者,) '온유자'(溫柔者,) '기갈자'(飢渴者,) '긍휼자'(矜恤者,) '청심자'(淸心者,) '화목자'(和睦者,) 그리고 '군축자'(窘逐者)는 그동안 한국과 동양에서 복 받은 자로 여겼던 사람들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돈과 재물, 권력과 명예, 무병장수, 부귀다남(富貴多男), 소원 성취, 하다못해 치아가 건강한 것까지도 복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마음을 비우고 슬피 울며, 온유하고 겸손하며, 갈급하고 긍휼하며, 마음을 깨끗이 하여 화목하고,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말은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이 복들을 '진복팔단'(眞福八端), 즉 진짜 복 여덟 가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 5:3)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산상팔복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이 구절은 사실 서술문이 아니라 감탄문입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라는 서술문이 아니라 '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여!"라는 감탄문입니다. 이 문법적 표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선포하신 여덟 가지 복은 장차 미래에 주어질 축복에 대한 희미한 예언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찬란하게 타오르고 있는 현재의 복에 대한 발견과 감탄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가난'을 나타내는 말로 헬라어 '페네스'(penes)가 아니라 '프토코스'(ptochos)를 사용했습니다. 둘 다 가난이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페네스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프토코스는 절대적인 가난, 극빈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말의 어원은 '프토세인'(ptossein)으로 그 뜻은 '굽실거리다' 혹은 '움츠리다'인데, 그러므로 프토코스는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 빈궁을 말합니다. 페네스의 가난은 남아돌아가는 것은 없는 가난이지만, 프토코스의 가난은 아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이 말하는 '가난한 자'는 극빈자입니다. 절대적으로 빈곤한 자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심령이 절대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마태 5:3b)인 복이 이미 임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심령이 절대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구약성서의 야곱(Jacob) 이야기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의 이야기로 말입니다. 어찌나 복 받기를 원했던지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사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 형이 받아야 할 장자의 복을 가로채고,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의 천사를 가로막고 자기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목숨 걸고 씨름하다 허벅지 관절이 부러진 바로 그 야곱 말입니다. 어쩌면 성서 전체를 통해 가장 복 받기를 원했던 야곱을 통해 우리는 '심령이 절대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지금 주시는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삭(Isaac)은 매우 늦은 나이에 쌍둥이 아들을 얻었습니다. 아내 리브가(Rebecca)가 임신했는데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먼저 나오려고] 서로 싸[웠]"습니다.(창 25:22) 리브가는 임신 중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형에서(Esau)는 자라서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는데 아버지는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했습니다. 동생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거주하니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형을 두 번이나 속였습니다. 하루는 에서가 들에서 사냥하고 돌아와 심히 피곤하고 허기질 때 붉은 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 명분, 즉 상속권을 삽니다. 배고프다고 그걸 판 형 에서도 참 딱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속여 형이 받을 축복까지 가로챕니다. 염소 새끼 가죽을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은 야곱을 아버지 야곱은 에서인 줄 착각하고 이렇게 복의 복을 빌어줍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 27:29) 뒤늦게 이를 안 에서는 대성통곡하면서 앞선 축복을 취소하고 자기를 축복해 달라 했지만 한번 선포된 복은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에서는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죽을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창 27:41) 다짐합니다.

번뜩이는 살의를 느낀 야곱은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황급히 도주합니다. 가는 길에 해가 지므로 돌 하나를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잠을 청합니다. 얼마나 처량하고 무서웠겠습니까. 그런데 꿈속에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천사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야곱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신이 누워 있는 땅을 주시고 지켜주시겠다는 음성을 듣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라고 감탄하며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으며 그곳의 이름을 벧엘(Bethel), 즉 하나님의 집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이 복을 달라고 천사와 씨름하다 허벅지 관절이 부러진 사건이 외삼촌 집으로 도피하던 이 길 위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훨씬 이후에 다시 고향 집으로 돌아오던 길 위에서, 그것도 지금과 전혀 다른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 집에 들어가 외삼촌의 양을 치며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라반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야곱은 동생 라헬(Rachel)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라헬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라반을 위해 7년 동안 일해주기로 약속합니다. 하지만 외삼촌은 조카를 속입니다. 결혼식 날 밤 라헬 대신 큰딸 레아(Leah)를 침상에 들여보낸 것입니다.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창 29:26)가 외삼촌의 태연한 변명이었습니다. 야곱은 억울했지만, 다시 7년을 더 일해 주는 대가로 라헬과 결혼합니다.

도합 14년, 그 긴 세월 동안 야곱은 외삼촌의 부를 일구기 위해 일했습니다. 이번에는 야곱이 라반을 속입니다.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면서 속임수를 써서 튼튼한 양의 새끼는 자기의 소유가 되게 하고 연약한 양의 새끼는 라반의 소유가 되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의 소유가 크게 늘자 라반의 안색이 바뀌고 라반의 아들들, 즉 이종사촌들이 시기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목숨이 다시 위태로워진 것을 느낍니다. 그때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야곱은 외삼촌을 감쪽같이 속이고 온 식구를 거느리고 전 재산과 함께 야반도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향 땅이 보이는 얍복 강 앞에 이릅니다. 하지만 야곱은 두렵습니다. 형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몹시 두렵습니다. 그래서 먼저 시종들을 형에게 보냅니다. 하지만 에서를 만나고 돌아온 시종들은 그가 부하 사백 명을 데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고 알려줍니다. 야곱은 죽을까 봐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자기의 소유 중에서 엄청난 예물을 떼어내 형에게 보냅니다. 그것으로 형이 마음을 풀고 자기를 받아주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밤, 그 절체절명의 밤 야곱은 사랑하는 두 아내와 열한 아들 그리고 모든 식솔과 나머지 재산 모두를 얍복 강 건너로 보내고 자신은 홀로 남습니다. 나는 죽더라도 가족은 형이 해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오늘 읽은 구약성서 본문(창 32:24-30)이 그때 거기서 일어난 일을 상세히 알려줍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야곱은 복 받기 위해 일생을 싸우며 살았습니다. 형을 두 번이나 속였고 아버지를 속였고 외삼촌도 기만했습니다. 그는 정말이지 지독하게, 절박하게 복을 원했고 복에 집착했습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절실함으로 끝내 엄청난 부와 대가족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혼자 남았습니다.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형에게서 도망쳐 나와 외삼촌의 집에서 14년의 고된 노동을 바쳐 일궈낸 모든 것, 즉 사랑하는 두 아내와 열한 아들과 전 재산을 모두 강 너머로 보내고 홀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렇게 철저히 가난한 사람이 되었을 때 홀연히 주의 천사가 다가왔습니다. 야곱은 밤새 그와 씨름했습니다. 이제 그의 손은 텅 비었기에 그는 천사를 붙들고 복을 달라고 씨름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이름을 묻는 야곱에게 천사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이름을 모른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쩌면 야곱이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으면서도 밤새 붙잡고 씨름한 천사는, 이름 없는 천사는 형에 대한 죄책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외삼촌을 속인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미안함, 그리고 무엇보다 평생을 부정직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한 뼈저린 회한과 후회는 아니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거짓에서 출발했다는 그 불편한 진실을 부여잡고 그것과 씨름하며 밤새 용서를 빌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날 밤 얍복 강 앞에서 야곱이 싸운 것은 자기 자신 안의 어둠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홀로, 정직하게 자기 안의 깊은 어둠을 대면했을 때 야곱은 거기서 빛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대면했습니다.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브니엘(Bniel)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내면의 가장 깊은 곳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심령이 절대적으로 가난해졌을 때 천국이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밤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창 25:26) 불렸던 그의 이름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창 32:28)을 뜻하는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엘)을 이겼다(이스라)는 뜻입니다. 성서의 위대한 역사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퀘이커 신학자 토마스 켈리(Thomas R. Kelly)는 『거룩한 순종 A Testament of Devotion』(생명의 말씀사, 200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는 영혼의 성소(聖所), 신성한 중심, 그리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존재한다. 우리는 늘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영원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고, 세월에 찢긴 우리의 삶 속에 밀려들며, 놀라운 운명을 암시함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또 영원한 본향으로 우리는 인도한다. 이와 같은 설득에 순복하여 우리의 몸과 영혼을 '내면의 빛'에 온전히 맡기는 것이 곧 참된 삶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는 이 내면의 빛은 사람들의 얼굴에 새로운 영광을 드리운다. 그것은 영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현이며 임재이다. 우리 모두의 영혼 속에는 그리스도가 계신다." 오늘 읽은 신약서신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에베소서 5:13-14)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 5:1-3) 하셨습니다. '가난'으로 번역된 프로토스는 '절대적 빈곤'을 의미합니다. '절대 가난'을 의미합니다. 물질적인 궁핍만이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 밑바닥'에 떨어져 삶에 대한 어떤 희망도 아무 의욕도 없는 절대 절망의 상황, 완전 무기력의 상태입니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혼자 남은 야곱과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여!"라고 감탄사를 외치십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마태 5:3b)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가 그 가난한 마음에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서 브니엘, 곧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마음속에도 산이 있습니다. '영혼의 산'입니다. 성서에서 산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계시를 경험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래서 성서에서 '산에 오른다'라는 말은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간다', '하나님 뵈러 간다', '하나님 말씀 들으러 간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그 산에 오르십시오. 오늘 우리의 영혼의 산 위에서 주님이 '진복팔단'(眞福八端), 즉 여덟 가지 '진짜' 복을 선포하십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산을 오르십시오. 어느 산악인의 말처럼,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욱 낮아집니다. 내가 산을 오른 게 아니라 산이 나를 품었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높은 산에 오르면 눈물이 납니다. 나의 왜소함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거대한 산하 속에 나의 가난함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먼지와 같은 나를 찬란히 비춰주는 햇살이 온몸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눈물이 납니다. 이 좋은 명절에 갈 곳 없는 자, 혼자 밥 먹는 자, 먹을 것도 없는 자, 가족과 이별한 자, 외로운 자 모두 산에 오르십시오. 참 복을 선포하시는 주님의 산에 오르십시오. 거기서 "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여! 천국이 [이미] 너의 것임이라!"는 주님의 위로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부디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다시 맞이하는 이번 한가위에는 "거기 곧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의 가족이 즐거워[하는]"(신명기 12:7), 그래서 "일 년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으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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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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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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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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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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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