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 66:1-2, 22; 디모데전서 3:14-16, 요한복음 2:19-21
설교문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 속에서 두 번째 맞이하는 대학교회 창립기념주일입니다. 1935년에 세워졌으니, 이화 대학교회는 올해로 창립 86주년이 되었습니다. 생일날은 내가 태어난 것을 축하받는 날이기도 하지만, 나를 낳아주신 분에게 감사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 땅에 이화와 또 대학교회가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감사하고,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이 "하나님의 교회[와] 진리의 기둥과 터"(디모데전서 3:15)를 닦기 위해 헌신하신 믿음의 선배들의 노고를 기억하는 날이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19는 모여야 살 수 있었던 인간 사회를 반대로 보이면 위험한 사회로 만들었습니다. 과거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는데, 이젠 '흩어져야 산다'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쓰니라"(사도행전 2:46) 했고, 히브리서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25) 권고했지만, 이 엄혹한 코로나 재난 속에서 교회는 '흩어지기'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되는 황망한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교회, 사찰에 [꼭] 가야만 신앙생활인가... 코로나19가 던진 '빅 퀘스천'." 코로나 세계적 대유행이 시작됐을 때 작년 어느 일간지가 뽑은 기사 제목입니다.(경향신문, 2020.3.12., 도재기 선임기자) 잘 뽑은 제목 같습니다. 실로 코로나19는 우리에게 큰 질문을 던졌습니다. 꼭 교회당이나 성당이나 사찰에 가야만 신앙생활인가요? 온라인 예배, 온라인 미사, 온라인 법회는 모든 종교의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모여 하나 되는 오프라인 신앙생활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지만, 과연 신앙생활이 '특정한 장소에 모여야만 하는가?' 등 그동안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특정한 공간에 모여야만 하지 않는다면 이제 교회당과 성당과 사찰이 지니는 의미와 기능은 무엇입니까?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가 설계한 <빛의 교회>를 가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한 번쯤 사진으로는 보았을 것 같습니다. 건축을 모르는 사람도 큰 경이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사실, 이 건물은 교회 한가운데 십자가 창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건물입니다. 그런데도 이 건물이 노틀담 사원과 맞먹는 건축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회 건축의 역사 2천 년 가운데 처음으로 교회의 두 대표적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와 '빛'을 하나로 합쳤기 때문입니다. 교회 건축에서 십자가와 빛은 늘 따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도 다다오는 벽을 파서 자연광으로 십자가가 만들어지게 했습니다. 빛으로 십자가가 만들어지게 했습니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은 건축비가 모자라서였습니다. 이 교회는 공사비가 모자라서 지붕을 올리지 못한 교회입니다. 돈이 없어서 콘크리트를 지지하던 거푸집 널빤지를 뜯어 까만 페인트를 칠해 장의자로 재활용했습니다. 안도 다다오의 친구가 이 교회의 집사였는데 공사비가 너무 없어도 해보겠느냐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온갖 제약 속에서 예술적 힌트 하나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작품을 만들어낸 게 이 유명한 <빛의 교회>입니다. 제약은 항상 새 창조를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홍익대 건축학과의 유현준 교수가 말하듯이, 안도 다다오는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으나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 한 가지에 끝까지 집중한 사람입니다. 건축공간의 프로토타입(prototype), 즉 원형(原型)의 추구가 그의 철학입니다. 그는 모든 장식을 배제합니다. 재료까지 걷어냅니다. 뼈대만 가지고 건축합니다. 그래서 그의 건물은 다 '구조체'입니다. 우리가 유럽의 고딕 성당에 가서 감동하는 이유는 마감재와 건축 구조체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외장 마감재와 인테리어 마감재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고딕 성당은 이 둘이 다 돌입니다. 그것이 주는 감동이 있습니다. 현대 건축에서 많이 사라졌던 '순수한 구조의 미'가 안도 다다오에게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는 선택과 집중, 그리고 본질에 대한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빛의 교회>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프로토타입(원형)은 무엇입니까? 그건 어떤 구조의 미로 빛납니까?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의 한 사람인 승효상 선생이 작은 시골 마을에 아주 작은 교회 하나를 무료로 설계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강지원 기자, "대형교회 보란 듯... 승효상, 시골에 15평 '교회다운 교회' 짓다, 2019.4.30.) 인구 2만 7천 명의 작은 마을인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 2019년 초 완공한 <하양 무학로 교회>입니다. 그는 첨탑이나 네온사인 십자가를 달지 않고, 인류 최초의 건축 자재인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네모난 회갈색 건물을 지었습니다. 창도, 간판도 없는 작은 단층 벽돌 건물입니다. 하늘을 찌르며 치솟는 대도시 대형교회와는 180도 다른 외관입니다. 무엇보다 주변의 풍경을 압도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교회임을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한쪽 외벽에 붙어 있는 작은 철제 십자가가 이곳이 교회임을 알려주는 유일한 표식입니다.
승효상 선생은 이 교회를 무료로 설계해주었습니다. 건축 업계 물정을 잘 모르던 이 교회 담임목사님이 지역 문화유산 세미나에서 만나 알고 지내던 승효상 선생에게 대뜸 "7천만 원으로 교회를 새로 짓고 싶은데, 가능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금액은 신도들이 한 푼 두 푼 모은 건축 헌금이었지만, 건축 업계 시세로 따지면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였습니다. 하지만 승효상 선생은 "네, 됩니다!"라고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그때 마침 그는 "정말로 교회다운 교회를 건축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차"였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교회일수록 절박하고, 절박할수록 본질을 추구할 수 있다"라고 생각해 설계비 한 푼 받지 않고 지어주기로 흔쾌히 수락했던 것입니다.
승효상 선생이 구상한 '교회다운 교회'의 핵심은 '절제'(節制, self-control)입니다.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 출입문부터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냈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단출한 예배당이 나오는데, 연 면적 15평에 겨우 50명이 다닥다닥 붙어 앉을 수 있는 크기입니다. 이 교회는 앞으로 '커지는 것', 즉 성장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목사의 자리를 한껏 높이는 여느 교회들과 달리 설교 단상과 신도석 그리고 찬양대석 모두를 수평으로 배치했습니다. 방송 장비는 아예 들이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조명도 없습니다. 다만 얇고 길게 뚫린 천장으로 들어오는 빛이 십자가가 걸린 벽면을 비추며 포근히 공간을 채울 뿐입니다. 이렇게 완공된 예배당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눈물이 줄줄 나오기 시작합니다. 설계자는 "교회 공간의 본질인 성찰과 참회의 기회를 준 것 같아 건축가로서 큰 위안이 됐다"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쇼핑센터나 회사 건물처럼 생기면 되겠느냐"고 그는 반문하면서 "교회는 누구나 들어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만든 집이므로 그 기능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본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본질적인 것만 남겨둠으로써 자신을 성찰하고 신과 대화할 수 있게 한 공간이야말로 교회다운 교회"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본질에 집중하고 원형을 추구하는 안도 다다오와 일맥상통하는 미학이고 철학입니다. 그래서 경북 경산시 하양읍의 <하양 무학로 교회>도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원형은 무엇입니까? 또 묻습니다. 삶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모든 걸 다 버려도 마지막 한 가지, 나 자신과 내 살과 우리 가정과 우리 학교에서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은 단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종교 건축은 건축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다"라고 이탈리아의 건축가 지오 폰티(Gio Ponti)는 말했습니다. 지난 세기 위대한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교회 건축은 또 다른 신학의 언어이며, 일종의 '돌로 지은 신학' 혹은 '돌로 쓴 설교'라고 말했습니다. 역시 '예술신학'(theology of arts)을 처음 연 사람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화의 대학교회 건축은 어떤 신학, 어떤 설교를 말하고 있습니까?
저는 지금도 <뉴스앤조이>의 주원규 기자가 3년 전에 쓴 "예배당 건축 기행 기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교회 :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를 보는 한 시선"(3028.3.11.)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대학교회 구성원이 아닌 그가 한국 그리스도교의 전체 지형 안에서 이화 대학교회를 어떻게 보는지 그 관점이 신선하고 독특해서 이 글을 오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를 구분 짓는 방식은 '대형교회' 아니면 '작은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주 기자는 여기에 한 가지 빠뜨려선 안 되는 새로운 유형의 교회로 '대학교회'가 있다고 제시합니다. 대학교회는 일반교회와 달리 대학의 관계자들이 주체가 되어 설립한 교회입니다. 학문의 최일선에 선 이들이 학문과 신앙의 성숙한 조화를 위해 스스로 세운 교회가 대학교회입니다. 물론 학원선교가 대학교회 기능의 한 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대학교회의 본질적 정신은 깊은 신학적 성찰 속에서 '교회다운 교회', 교회의 새로운 존재 양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실제로 대학교회는 조직 면에서 간소하고 기능 면에서 '미니멀'(minimal)한 특성이 있습니다. 전도와 성장을 교회의 존재 이유와 목적으로까지 생각하는 일반교회가 조직을 확장하고 기능을 확대하는 것과 달리, 대학교회는 오히려 조직을 간소화하고 기능을 축소하는 가운데 확보되는 '여백'에 대학이라는 지성 공동체가 가진 풍부한 지적, 인적 자원을 활용해 신학과 신앙의 성숙한 조화를 추구하며 교회의 본질적 존재 양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주원규 기자는 우리나라의 다른 대학교회들과 달리 이화의 대학교회가 80년 이상의 긴 역사 속에서 단순히 학교 내 교회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족과 국가를 향해 예언자적 지성의 통로로 활약한 사실에 주목합니다. 또 대한민국 최초의 대학교회인 이화 대학교회가 여자대학 안에서 태어나 여성의 인권과 여성의 신학 발전에 기여한 것에 주목합니다. 그는 초교파적이고 탈권위주의적인 입장을 표방하며 남녀의 차별이 여전한 한국 사회에서 하나님 혁신의 통로로 쓰임 받았다는 점에서 이화대학교회는 다른 대학교회들과 다른 확실한 존재가치를 지녔다고 말합니다. 그가 보기에 이화대학교회의 독특한 힘은 '미니멀리즘의 맥락'에서 나옵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란 최소의 것을 지향해 사물의 가장 근원적인 것, 사물 그 자체의 리얼리즘을 찾으려는 미학 사조를 말합니다. 이런 미니멀리즘은 단지 예술과 미학에서만이 아니라 종교에서도 구현될 수 있습니다. 5백여 년 전에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개신교회가 바로 이런 미니멀리즘의 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의 핵심적 정체성의 하나는 의식(儀式)의 화려함보다는 '오직 믿음'이라는 정신적 일체감입니다. 그렇기에 종교에서의 미니멀리즘은 의식과 예전의 형식적 요소를 걷어내고 공간의 단순함을 통해 본질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종교적 예식과 예전에 거품처럼 따라붙는 허위와 위선의 과잉을 선제적으로 걷어냅니다. 그런 미니멀리즘은 공간 구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주원규 기자가 보기에 이화대학교회의 건축과 그 안 예배 공간은 바로 이 '미니멀리즘의 향연'이라 부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언뜻 보면 대학교회 건물은 주변 환경의 전체적 흐름과 부조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의 관점으로 보면 오히려 소통과 성찰의 가능성이 눈에 띕니다. 대학교회의 내부 예배당은 무채색 계열의 마감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하는 회중이 화려한 배후 장식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예배 감정의 고조를 최대한 억제합니다. 대형 십자가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큰 공간 안에서 제단 위 십자가는 초라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회중은 이를 미니멀리즘의 흔적으로 체감합니다. 대학교회 건물의 대표적 특징은 전체 규모에 비해 매우 협소한 폭을 지닌 직사각형 모양의 창의 틈새입니다. 가로세로, 기하학적으로 분할된 이 창은 빛의 틈입을 섬세히 통제합니다. 이를 통해 역설적으로 황홀하리만치 철저한 '빛의 신비'를 강조합니다. 이렇게 빛을 최소화하고 예배 감정을 공감각적으로 선동하는 색채나 장식을 철저히 배제합니다. 그럼으로써 대학교회 건축은 신 앞에 선 인간의 실존을 더없이 최소화합니다.
주 기자의 말을 직접 인용해봅니다. "무궁한 자연, 창조의 중심 앞에 선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창조주의 임재를 느끼는 순간, 인간에게는 무엇이 다가올까. 신의 위엄에 대한 맹목적 두려움일까. 아니다. 신, 곧 하나님의 무한한 포용과 끌어안음이다. 최초의 대학교회, 여성 젠더를 향한 치열한 인식을 지속하는 이화여자대학교회가 이끌어내는 여성성의 궁극은 권력, 계급, 욕망이 최소화한 미니멀한 공간에서 오직 신의 임재만을 느끼는 인간 이해, 하나님 이해인 것이다." 제가 오래전 이화대학교회 예배에 참여했을 때 받은 느낌도 정확히 이것이었습니다. 공간과 예전을 절제하니, 더하지 않고 비우고 또 비우니 그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만이 더욱 오롯이 드러났던 첫 예배의 감동을 저는 아직도 따뜻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화대학교회>는 <빛의 교회>나 <하양 무학로 교회>처럼 본질과 원형에 집중하여 순수한 구조의 아름다움이 빛나는 교회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화의 대학교회 건축 기행을 마치면서 주원규 기자는 이화대학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필자는 진정 묻고 싶다. 최소주의 의지를 피력한 이화여자대학교회의 미니멀리즘은 한갖 공간의 유희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기독교 학교임을 주장하며 한국 근현대사에 여성 젠더의 발전과 선도를 이끈 대학의 기본 정신을 다잡아 주는 최후 성찰의 보루였던 대학교회는 그저 허울뿐인 구색맞추기[로 남을 것인가]. 이는 비단 필자 혼자만의 질문이 아닐 것이다. 이 땅의 대학교회가 지성과 영성의 건강한 보루로 남아주길 바라는 한국 크리스천 모두의 질문인 것이다. 이제 이화여자대학교회는 한국 크리스천 모두에게 대답할 때가 되었다. 대학교회 건축물과 예배당이 보여준 것과 같이 진리와 본질에만 집중하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영적 가치를 보여줄 것인지, 아님 잔해만 남아버린 상아탑, 비루한 과거 영광에만 사로잡힌 노욕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인지 말이다."
승효상 선생은 자신의 건축 철학을 '빈자의 미학'(Beauty of Poverty)이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매우 기독교적인 언어입니다. '가난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빈자의 미학이 무엇인지 이렇게 한마디로 말합니다. "빈자의 미학, 여기에선 가짐보다는 쓰임이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중요하다."(Beauty of Poverty: Here, it is more important to use than to have, to share than to add, to empty than to fill.) 건축가 민현식은 이런 "빈자의 미학은 물리적으로 빈한한 자의 어쩌지 못하는 퇴행적 미학이라기보다 스스로 빈자이고자 하는 자의 실천적 미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이 자발적 가난의 아름다움의 원형(prototype)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 6-8) 신의 자기 비움(kenosis), 그것이 바로 모든 미의 원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혹한 십자가 앞에서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라고 눈물을 흘리며 찬송(1442장)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윤리학자 송용섭의 말처럼, 교회는 사치스러운 대형 건축의 욕망과 물량주의 기복신앙의 유혹에서 벗어나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겸손하고 가난한 아름다움', 즉 빈자의 미학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을 잃고 화려한 외향만 남은 교회는 껍질만 남은 교회입니다. 우리는 "형태보다는 공간, 채움보다는 비움을 통해"(새문안교회의 설계자 이은석 교수)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과 임재가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득 찬 것을 좋아하고 빈 것은 싫어합니다. 빈 지갑, 빈 통장, 빈 곡간은 질색입니다. 사람도 빈털터리면 어디가 대접을 못 받습니다. 이렇게 빈 것을 얕보는 버릇이 있어서 사람들은 허공까지 무시합니다. 그러나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은 "허공(虛空)이야말로 모든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라 말하며 "빈탕[즉 허공]이 존재 전체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절대공을 사모한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라야 참이다. 이 허공이 하나님이다... 우주가 허공 없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피리는 속이 다 비어야 깊은 소리를 내지요.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자신을 비우고 '빈탕' 즉 허공이 되었을 때 온 세상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피리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자신을 비우심으로 예수님은 이 차갑고 어두운 세상을 하나님 진리와 은총의 빛으로 가득 채우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가난하고 겸손한 비움의 아름다움을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화의 대학교회에 거룩한 숨결을 불어넣으시어 세상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피리로 연주하실 것입니다. 그때 비로서 이화대학교회는 오늘의 신약서신 말씀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디모데전서 3:15)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교회 건축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손호현 교수의 제안대로 (손호현 외, 『한국 교회 건축과 공공선』, 동연, 2014 중에서), '인생 건축'도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이 구약성서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이사야 66:1) 하셨습니다. <빛의 교회>든, <하양 무학로 교회>든, 혹은 <이화대학교회>든 어느 교회 건물도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시는 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김교신 선생은 온 천하 자연이 예배당이라 보고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 예배당의 벽은 북한산성이요, 천정은 화성, 목성이 달린 청공(靑空)이요, 좌석은 임간(林間)의 반석(盤石)이요, 주악(奏樂)은 골목을 진동하는 청계(淸溪)의 물소리요, 찬양대는 꿩과 뻐꾹새와 온갖 멧새들이다." 이런 정신과 기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서 온 것입니다. 주님은 웅장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 건물 앞에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19)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듣고 발끈한 유대인들이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무슨 수로] 일으키겠느냐"(요한 2:20) 반문햇으나 요한은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한 2:21)라고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곧 성전이고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고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6-7)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교회 건물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도 새로 건축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거룩한 가난함[聖貧]'의 기초 위에 나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세워가야 합니다.
경애하는 대학교회 교우 여러분, 코로나 재난 속에서 두 번째로 맞이하는 대학교회 창립기념주일입니다. 모이기에 힘쓰기는커녕 흩어지기에 힘써야 하는 이 당황스러운시간 속에서 오늘 우리는 대학교회 창립86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오늘도 텅 빈 이 예배당에서 저는 교우님들을 그리워합니다. 교우님들도 이 교회당을 그리워하시는지요. 오늘 대학교회 생일 잔칫상은 먹고 마시는 음식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유안진 시인의 <그리운 종소리>를 읽어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교회의 본질과 신앙의 원형을 진한 그리움으로 사모하게 합니다. 뿔뿔이 흩어져 예배를 드리는 모든 교우님에게도 오늘 이화대학교회에서 울리는 '그리운 종소리'가 귓가에 닿기를 바랍니다.
"교회 마을 십리 밖에 / 나는 살았다 / 잠결인지 꿈결인지 / 새벽이면 들려오는 // 댕그랑앙앙아아 댕그랑앙아 // 문풍지 소리만큼 / 여린 숨소리를 / 잠귀가 밝았을까 / 나는 들었다. // 일어나아아아 일어나아아아 // 귀에 익은 어린 음성 / 소년 예수가 / 내 귓불에다 / 그렇게 소곤댔다. // 일어나도 잠에 취하여 / 베개에 얼굴 묻고 / 무어라 기도했나 / 생각하지 않지만 // 아직도 생생한 40년 전 종소리 / 창호문에 배어드는 새벽물벌 같은 / 파르스름 열리는 / 소년의 숨결이여 // 십리길 멀다 않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 까망머리 덮고 자는 내 소라귀로 / 새벽마다 달려오던 / 그 맑은 숨소리여 // 서울까진 못 오는가 / 안동군 엄동면 장터마을 중평교회 / 나의 첫교회의 / 그리운 그 종소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