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살과 피를 가진 신을 바라는 인간의 감정에 대하여
인간은 의지의 차원에서 만난 도덕적 완전자로서의 신이 초래하는 죄의식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길 원했다.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신 안에서 자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의지적 차원에서의 투사에서 만난 신은 엄격한 도덕적 명령을 내리는 신으로 인간 위에 군림하며 당위와 현실 사이에서 인간의 죄의식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죄의식을 해소시킬 수 있는 신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는 인간을 넉넉히 품어줄 용서와 화해의 속성을 지닌 사랑의 신을 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성과 의지의 차원에 이어 감정의 차원에서 투사가 벌어지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다시 말해 감정의 차원에서 투사된 신 안에서 비로소 인간은 필연성과 완전성을 거쳐 장구한 세월 그토록 바랐던 자기 확인 욕구 충족과 더불어 어머니 품에 안긴 것 같은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사랑의 신이어야만 했을까? 그것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범한 죄를 능히 사해주고 품어줄 수 있는 신은 인간과 유리된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마찬가지로 "살과 피를 가진 사랑"(<기독교의 본질>, 123)의 신이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살과 피를 가진 사랑만이 죄의식으로 고통 받고 있는 죄인을 용서하고 죄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해방시킬 수 있는 구원의 사건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포이어바흐는 이러한 사랑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 또는 신과의 화해를 이룰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보았다.(<기독교의 본질>, 122) 인간은 지성의 차원에서의 신에서 겪는 이질감을 극복하고 의지적 차원에서의 신에서 겪는 괴리감을 해소해 화해를 이룰 수 있는 터전을 감정의 차원에서 만난 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포이어바흐가 아래와 같이 제시하는 율법과 사랑의 대비는 왜 인간이 사랑의 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도덕적인 본질은 도덕률에 위배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 율법이 거부하는 것은 율법 자체에 의해서 부정된다. 인간적인 피를 판결에 섞지 않는 도덕적인 판관은 죄인을 무자비하게 판결한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하는 본질로 직관되면서 신은 비도덕적인, 비도덕적이면서 초도덕적인 본질로,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본질로 정립된 것이다. 죄의 폐기는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의로움의 폐기며 사랑, 자비, 감정의 승인이다."(<기독교의 본질>, 123)
신적인 사랑의 의식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이 감정적 차원의 투사를 거쳐 사랑의 신으로 정립되고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포이어바흐는 인간 자체의 본질로서의 신에 대한 직관이 곧 신의 육화의 비밀이라고 했으며 특히 이 성육신 사건에 대해 "인간화된 신은 신화되는 인간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으로 격하되기 전에 인간이 신으로 고양되는 일이 필연적으로 선행하기 때문"(<기독교의 본질>, 125)이라고 주장했다. 신의 인간화 보다 인간의 신격화가 순서상 앞서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는 신이 자신을 위하여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 인간이 되었다는 그의 언명에서도 재차 확인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신의 인간화 이면을 살펴보니 인간의 요구가 전제로 깔려 있었고 그에 따른 인간의 신격화가 비밀리에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신의 육화에서 신의 인간화만을 도출해 내면 그것은 성육신의 반쪽만을 들추어낸 것에 불과한 것이 될 수 있다. 왕이기만 한 왕은 신하의 속사정을 이해할 수 없고 돌볼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신이기만 한 신은 인간을 알지 못하고 돌볼 수가 없다. 신의 인간화는 신 안에 이미 인간이 있었기에 다시 말해 인간의 신격화가 전제 되었고 가능조건으로 작동했기에 이뤄질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공히 성육신의 나머지 반쪽은 인간의 신격화로 짝 지어야 함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순서적으로 따진다면 인간의 신격화가 우선이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은 성육신 사건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살피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는 왜 성육신 사건에서 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신의 인간화라는 반쪽만 집요하게 붙들며 인간의 심성에서 촉발된 인간의 신격화라는 나머지 반쪽을 은폐하려 했던 것인가? 포이어바흐는 "종교의 진리에서 근거가 되는 것은 종교를 의식하는 과정에서 결과로서 규정된다"(<기독교의 본질>, 126)는 종교적 원리를 그 이유로 들었다. 신의 사랑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중요치 않다. 다만 신의 사랑이 아니, 사랑의 신이 인간에게 나타난 성육신이란 결과에 주목할 뿐이다.
이처럼 성육신 사건에서의 신의 인간화와 인간의 신격화로 나타나는 감정적 차원에서의 투사가 그려낸 신은 죄의식에 눌린 인간을 용서하고 화해시키는 사랑의 신으로서 임재한다. 여기서 사랑이 주는 무게는 지성의 차원에서의 필연성이 주는 신성 혹은 의지의 차원에서의 완전성이 주는 도덕성과 비교 불가한데 대체 무엇이 이토록 사랑의 무게를 무겁게 하여 여타 신성 및 도덕성마저 포기하게 만든다는 말인가? 이 물음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신은 사랑이다'라는 명제에서 주어가 되는 신성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술어인 사랑으로부터 신성의 부정이 나왔다. 그러므로 사랑은 신성보다도 더 높은 힘이며 진리다. 사랑은 신을 극복한다. 사랑을 위해 신은 자기 신의 신적 존엄성을 희생했다."(<기독교의 본질>, 129)
신은 사랑이기에 신이란 말이다. 사랑이 술어이지만 규정성의 차원에서 놓고 볼 때 신 보다 더 높은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놓여 있기에 그렇다. 때문에 포이어바흐는 신이 사랑이기에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랑이 아닌 신을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이 아니라 미워하는 신이 가능할까? 인간은 사랑이 아닌 신은 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이미 신에 대한 앎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포이어바흐의 입장일 것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 가능하다. 사랑이 아닌 신은 자기 확인 욕구와 죄의식의 늪에 빠져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인간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지극한 관심을 갖고 있는 신이어야만 하며 인간에게 인간적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너무나 인간적이며 실제로 인간의 육체를 가진 살과 피를 가진 사랑의 신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감정의 차원에서 벌어진 투사에서 확인되는 사랑의 우선성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무엇보다 이 사랑이라는 심성적 본질이 인간의 기도와 신의 섭리의 함수관계에 대한 신학적 난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정재현, 『신학은 인간학이다』, 348) 기도의 응답은 영원으로부터 이미 정해져 있으며 세계창조의 계획 속에 근원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주장에 대해 포이어바흐는 종교의 본질에 절대적으로 모순되는 기계적인 사고방식의 공허하고 무미건조한 환상이라고 일갈한다.(『기독교의 본질』, 131)
정재현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인간의 기도는 신의 섭리에 미리 계획된 바에 부합해야 하는 것으로 기계론적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이런 기계론적 결정론 안에서 신의 섭리란 다만 인간의 운명론의 구도를 강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이러한 신의 섭리 안에서는 신이 인간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해서는 그저 자비롭고 용서해주는 신이 고통은 모르지만 동정은 모르질 않아서 그렇다는 궤변을 늘어놓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이어바흐는 이 동정마저도 같은 본질을 전제해야 가능한 것이라고 분명히 하며 신이 인간과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는 것의 표현이 육화며 섭리며 기도임을 역설한다. 인간의 말을 들어주고 인간의 일을 측은하게 여기는 신은 인간의 고통에 동감하고 있는 신이기에 인간의 모든 기도야말로 실제로는 신의 육화에 다름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렇듯 신이 인간을 사랑하기에 고통 받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삼위일체와 어떤 마찰도 빚어질 이유가 없게 된다.(『신학은 인간학이다』, 348)
오히려 그리스도의 수난은 신의 본질이 심정적 투사의 핵심인 사랑이라는 것을 확증할 뿐이다. 라버터를 인용하여 포이어바흐가 선언했듯이 우리는 다만 "자의적인 신"을 곧 "변덕스런 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기독교의 본질』, 131) 인간의 고통이 안중에도 없는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무감정한 신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어떠한 수난이라도 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신 그리고 기도하고 있는 인간의 고통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요건을 만족해 주는 신은 오로지 감정의 차원에서 투사된 사랑의 신 밖에 없다. 포이어바흐에게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이란 사건은 그리스도의 나고 죽으심의 전 과정을 설명해 줄 감정의 차원에서 투사된 신의 사랑의 근거가 다름 아닌 투사 주체인 인간의 심성, 즉 인간이 지닌 사랑의 감정에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신의 대상이라면 인간은 신 안에서 자기자신에게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만일 신이 사랑이고 그 사랑의 본질적인 내용이 인간이라면 신적인 본질의 내용은 인간적 본질이 아닌가? 종교의 근거며 중심점이 되는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인간의 자기자신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그 사랑이 인간의 최고 진리, 최고 본질로서 대상화되어 직관된 것이 아닌가?"(<기독교의 본질>, 135)
"신은 사랑이다"라는 기독교의 최고 명제는 인간 심정의 자기 확신을 표현하는 말로 유일하게 정당하고 신적인 힘으로서 인간적 심정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는 말에 해당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 사랑의 신에서 유독 철저하게 인간중심적인 신을 만나게 되는데 신이 사랑의 내용으로 오직 인간만을 채우고 있기에 더더욱 그렇다고 하겠다. 자기만을 돌봐 줄 것을 요구하는 인간에게는 가장 잘 부합하는 신 이미지로 부상한 셈이다. 지성에서 의지 그리고 감정으로 투사의 준거가 옮겨감에 있어 인간의 자기중심주의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감정의 차원의 투사에서 일어나는 인간과 신의 만남은 어떤 모습을 띠미 이뤄지는 것일까? 앞서 잠시 언급되었듯 감정적 투사의 차원에서 인간은 기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어떤 모양의 기도이기에 감정의 차원에서 투사된 신을 만나는 인간 모습의 주된 내용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