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자라게 하시는 이"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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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전도서 3:9-14, 고린도전서 3:3-7, 마태복음 6:26

1620년 9월 6일,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을 떠난 청교도 102명은 그해 11월 16일 아메리카 대륙에 당도합니다. 하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강풍과 눈보라 치는 혹독한 겨울, 질병과 식량 부족, 들짐승들의 위협, 그리고 거할 집조차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절반 가까운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생존법을 익힌 청교도들은 필사적인 노력으로 1년을 보냅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621년 가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0년 전 이때, 정착지에서 거둔 첫 결실을 기념해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고 잔치를 열었습니다. 추수한 첫 곡식과 채소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골라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의 시작입니다.

최일환 님의 기도시 <첫 열매>입니다. 한국의 추수감사절 모습입니다. "장독 뒤에 열린 / 그 많은 앵두알도 / 먼저 익은 것을 / 할머니는 / 잘 알고 있다 // 몇 번 껍질을 벗겨야 / 알맹이가 보인 옥수수도 / 먼저 익은 것을 / 할머니는 / 잘 찾아낸다 // 토실토실 / 살쪄 가는 감자도 / 흙 속의 감자도 / 먼저 익은 것을 / 잘도 캐낸다 //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는 - // 뭐든지 첫 열매는 / 하나님이 미리 알아 / 곱게 만들어놓으면 / 첫 열매는 뭐든지 / 할머니가 미리 알아 / 정성스럽게 따서 / 예배당으로 가지고 간다 // 제단에 올려놓고 / 기도 드린 뒤 /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 하나하나 나누어준다 // 할머니 눈에는 / 그럼 그렇지 / 귀여운 아이들이 / 주일학교 아이들이 / 하늘 나라의 첫 열매로 보인다." 오늘 제단 앞에 모인 추수감사헌물은 '뭐든지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오랜 전통의 상징입니다.

풍요의 시대입니다. 물질이 넘쳐나서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우리네 삶의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한 한 인터넷의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높은 빌딩과 더 넓은 고속도로를 가지고 있지만 성질은 더 급해지고 시야는 더 좁아졌습니다... 일은 더 대충대충 넘겨도 시간은 늘 모자라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지혜는 줄었습니다. 약은 더 먹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습니다... 말은 많이 하지만 사랑은 적게 합니다. 달나라에도 갔다 왔지만 이웃집에는 누가 사는지도 모릅니다. 우주의 외계는 정복했는지 모르지만 우리 내면의 세계는 잃어버렸습니다... 음식은 많지만 영양가는 적습니다. 호사스런 결혼식이 많지만 더 비싼 대가를 치루는 이혼은 늘었습니다. 집은 훌륭해졌지만 더 많은 가정이 깨지고 있습니다."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옛날 우리 조상 농부들은 콩을 심을 때에 세 알씩 심었다고 합니다. 한 알은 땅속에 사는 곤충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중의 새를 위한 것이며, 나머지 한 알은 자신의 몫으로 삼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농부의 마음은 '공존과 나눔'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선한 마음씨가 땅에 뿌려져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않았어도 행복한 삶, 넉넉한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물질적으로 엄청난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행복하지 않은 것은 '콩 세 알'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공생과 나눔이라는 선한 마음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지향 시인은 <추수감사절 아침에> 이런 기도를 드렸나 봅니다. "이 아침 / 당신의 제단 앞에 쌓인 / 침묵으로 열매를 익히던 / 나무들의 무게를 보면서 / 문득 우리는 부끄러워집니다 / 우리는 쉽게 일을 열어 / 우리의 성취를 자랑했습니다 / 명예와 권세와 부귀를 / 지식과 지혜와 총명을 / 날마다 사람 앞에 흔들어대며 / 자랑을 쉬지 않았던 / 우리의 교만이 부끄러워집니다. // 이 감사절 아침 주의 제단 앞에서 / 비로소 깨닫고 뉘우치는 / 우리의 회개가 / 성령의 뜨거운 열매로 변화되게 하소서."

하버드의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는 "지금 서 있는 그 자리, 정말 당신의 능력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내가 가진 재능과, 사회로부터 받은 대가는 과연 온전히 내 몫인가?"라고 물었습니다.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 그는 "우리가 스스로 자수성가한 사람 또는 자기충족적인 사람으로 볼수록 감사와 겸손을 배우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감사와 겸손과 같은] 그런 감성이 없다면 공동선에 대한 배려도 힘들어지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대신 "내가 받은 사회적 명성과 대가가 행운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겸손해진다"라며 "이런 겸손의 정신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시민적 덕성"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는 "능력 경쟁을 위해 무장한 사람들보다는, 학위가 없지만 우리 사회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사람들, 자신의 일을 통해 부양가족과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노동력은 있는데 노동자가 안 보이는 노동입니다. 이 노동은 아무리 해도 표가 안 난다는 게 특징입니다. 가사와 육아 등의 집안일이 대표적입니다. "애 본 공은 없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나 봅니다. 하지만 빨래와 설거지를 하루만 안 해도 온 가족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설거지를 아무리 깨끗이 해도 성과급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을 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나의 당연함이 누군가의 노동이라는 사실을 잊습니다.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은 원래 오스트리아의 사상가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처음 한 말입니다. 신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학을 공부하고 사제 서품을 받아 신부가 되었으나 교황청과 잦은 마찰을 빚던 그는 스스로 사제직을 던지고 괴딩엔 대학 등에서 가르치며 평생 저술에 힘썼습니다. 『그림자 노동』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일리치는 역사상 출현했던 노동의 형태들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무보수의 자기충족적 생산 활동인 자급자족 노동입니다. 둘째는 보수를 받긴 하지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 생산을 위해 일하는 임금 노동입니다. 셋째는 무보수이면서 오로지 임금 노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는 그림자 노동입니다. 그림자 노동은 근대의 임금 노동과 더불어 나타난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림자 노동이 임금 노동보다 훨씬 근본적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임금 노동은 그림자 노동 없이는 결코 지속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급자족적 삶이 어떻게 근대적인 성장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밝히기 위해 쓴 이 책에서 이반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을 먹고 자라온 현대사회의 뿌리와 비밀을 폭로합니다. 그럼으로써 나의 당연함이 누군가의 노동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께서도 일하실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실까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신은 순수 형상의 신으로서 이 신은 자기 스스로 일할 수 없습니다. 이 신은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子'(unmoved mover), 즉 자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 신은 일을 하지 않을뿐더러 수고와 고통도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은 땅에 묶여 있으면서 일하고 수고하고 고통도 받는 존재입니다. 매우 그럴듯한 대비입니다. 하지만 성서의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노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노동입니다. 이 광활한 우주의 창조는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수고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이 세세히 기록하는 대로 하나님은 빛을 만드셨고, 하늘이라 부르신 궁창(穹蒼)을 만드셨고, 천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뭍이 드러나게 하셔서 땅과 바다를 지으셨고,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지으셨고,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을 지으셨으며, 하늘의 궁창을 나는 새들과 바다의 짐승들을 지으셨고, 땅 위에 가축과 짐승들을 지으셨으며, 마지막으로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세기 2:2)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림자처럼 일하시는 분입니다.

예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예루살렘의 양문(羊門)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서른여덟 해 된 병자를 고치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며 격렬하게 항의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My Father is still working, and I also am working - 요한복음 5:17)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하시던 모든 일을 일곱째 날에 그치시고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세기 2:3) 목숨보다도 소중하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인데 예수께서 그 하나님이 "이제까지"(안식일까지) 일하신다고 말씀하시니 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한 5:18)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세계를 지키시고 돌보시며 보존하시는 일을 멈추신다면 과연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까요? 만일 하나님께서 한순간이라도 생명을 주시고, 살리시며, 고치시고 치유하시는 일을 그만두신다면 땅 위 생명이 존속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림자처럼 일하십니다. 안 하시는 듯 안 하시는 게 없으시고, 안 보이지만 모든 걸 하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일을 멈추시면 지구의 자전과 공전도 멈출 것입니다. 태양도 빛을 잃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고하고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계가 당신의 사랑으로 만드신 세계이기에 오늘도 하나님은 '사랑의 수고'를 그치지 않으십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수고로 우리가 매일 잠에서 깨어나 먹고 마시며 일하고 즐기고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명의 빛과 새소리가 / 창문 너머로 들려오고, / 빛과 새소리에 잠든 몸 깨어나 / 뜰로 나가니, / 초록 생명마다 영롱한 이슬을 달고 / 저마다 빛난다. / 자연은 밤새 / 이런 아침을 정성껏 지었고, / 나는 그들을 온몸에 모신다. / 그리하여 그들은, 내 영혼의 밥이 되고, / 내 육신의 피가 된다." 김민수 님의 「2021 창조절 묵상집」에 나오는 명상입니다. 그는 지난밤 곤히 잠들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새벽에 일어나보니 지연이 밤새 영롱한 아침을 정성껏 지었음을 발견하고 감동합니다. 내 수고와 내 땀방울 전혀 없었는데 내 앞에 주어진 여명의 빛과 초록 생명들 앞에서 그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시편 92편의 저자도 이런 마음으로 "아침에 주의 사랑[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알리는 일이 좋습니다."(시편 92:2 - 새번역)라고 노래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당연함은 누군가의 노동입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이 생명과 복은 지금도 하나님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자 노동이, 그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쌀을 씻어 밥을 지어 드셨습니까? 우리가 매일 접하는 것이 밥이고 쌀인데, 과연 '쌀 한 톨의 무게'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관심을 갖고 달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쓰는 도량형으로 살 한 톨의 무게는 약 0.02g 정도입니다. 그 한 톨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오늘의 시장 거래가치로 환산해보니 약 0.036원 정도 됩니다. 정말 미미한 무게와 소소한 가치입니다. 하지만 그 작디작은 쌀 한 톨에서 온 우주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스펠 가수 홍순관 님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쌀만이 아닙니다.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을 보고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이렇게 우리가 일상에서 예사로이 먹는 쌀 할 톨과 대추 한 알에는 온 우주가 들었는데도 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할까요. 날마다 따스한 밥을 지어 먹으면서도 행복하지 않을까요.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의 수고와 무관하게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수고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들은 대부분 소중한 것들입니다. '너무 귀해서 아예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price-less) 것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수고하지 않았어도 존재하면서 우리를 살아가게 해 주는 것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풍요의 시대에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감사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나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의 그림자 노동이 있어 일상을 유지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수고가 내 생명과 우주를 지탱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삶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길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길에는 선명한 발자국이 찍혀있었는데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걸어간 흔적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두 사람이 함께 걸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반대로 홀로 걸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발자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사랑하고 의지하는 신의 발자국이었습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신이시여, 제 삶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엔 어디에 계셨습니까?" "너와 함께 있었다." "그런데 왜 발자국이 하나뿐입니까?" "그땐 내가 너를 업고 걸어갔단다." 그랬습니다. 김민수 님이 말하는 것처럼,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헌신과 노동을 우리는 '그림자 노동'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그림자 노동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드린 공동의 기도문은 이제는 고인이 되신 고훈 목사님이 드린 <감사>라는 제목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복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잘 짚어 올라가는 명시입니다. "거둘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 그보다 먼저 / 뿌린 씨를 자랄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 그보다 먼저 / 시기를 잃지 않고 뿌리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 그보다 먼저 / 뿌릴 수 이는 씨앗을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 그보다 먼저 / 뿌릴 수 있는 땅을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 그보다 먼저 / 우리는 아무런 수고를 한 것이 없기에 / 이 모든 수고한 사람들을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 그보다 먼저 / 이 모든 추수의 근원이신 우리 야훼께 감사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은 땅속의 뿌리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주렁주렁 보기 좋게 맺힌 열매들도 땅속의 뿌리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화려한 꽃과 튼실한 열매에 대해서만 찬가를 부르던 이들은 오늘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은 곳에서 그 모든 수고를 다 한 뿌리에 대해서 찬가를 불러야 합니다. 내 삶의 토대가 되어주는 것에, 나를 나로 있게 한 어머니의 사랑에, 이름 모르는 수많은 이들의 헌신과 수고에, 그리고 "모든 추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그림자 노동에 감사의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린도전서 15:10)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또 바울파와 아볼로파로 나뉘어 시기와 분쟁이 그치지 않던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린도전서 3:6-7)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라는 바울의 고백이 그리스도교 감사 신앙의 정수(精髓)입니다. 이 신앙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어린아이와 같이 "내꺼야! 내꺼야! 내꺼야!"라고 외치며 움켜쥐려는 탐욕의 인간을 회개하게 하는 신앙입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사람인 파블로 피카소는 "주여,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 주소서"(Lord, protect me from what I want)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것이 성공이라고 가르치는 세상에서 바울의 이 감사의 신앙은 우리를 '내가 원하는 것들'의 횡포에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도록 지켜줄 것입니다.

바울의 이 감사의 신앙은 또 이 지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무상의 선물임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정교회(Orthodox Church)의 바르톨로메오스 세계총대주교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 생태적 위기는 "지구를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지구를 무신론적으로 다루는" 우리의 태도의 위기라고 그 본질을 간파했습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이 말하는 대로,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전도서 3:13)입니다. 감사의 신앙은 이 선물을 누리고, 맛보고, 향유하게 할 것입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라는 바울의 감사의 신앙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가장 의존적인 존재임을 겸손히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지구에서 사라지고 난 뒤, 4년 안에 지구는 멸망한다"라고 예언했습니다. 인류가 먹는 모든 식품의 3분의 1이 곤충의 수분(受粉) 덕분인데 이 중 80%를 꿀벌이 담당합니다. 그러니까 인류가 아무리 최첨단 지식 정보 사회로 진입해도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꿀벌 없이는 잠시도 생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감사의 신앙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 오직 내 능력 때문이다"라고 자아도취에 빠진 오만한 인간들을 겸손의 자리로 되돌려 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감사의 신앙은 진정한 행복을 주는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돈과 지위와 완벽한 직업과 같은 소유를 복이라고 생각하며 살다가 결국 소유의 노예가 되어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늘 불행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라는 믿음의 고백은 우리가 움켜쥐지 않고도 넉넉할 수 있는, 그리고 비교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족(自足)할 수 있는 참다운 행복을 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6:26). 또 말씀하셨습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태복음 6:28-30)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 했습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당연한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헌신과 사랑의 수고가 맺은 결과임을 마음의 돌에 깊이 새기십시오. 스스로 풍요에 취해서 더 좋은 것과 더 많은 걸 탐내다가 하나님을 잊지 않았나 오늘 뒤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들을 스스로 쟁취한 것인 양 교만하지 않았나 오늘 뒤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잔이 넘칠 때에도 날 위해 묵묵히 헌신한 손길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잔이 비었을 때에도, 여러분이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에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그 분의 손길을 기억하십시오. 그 분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린도후서 12:9) 이 말씀으로 힘을 얻어 세상의 고난과 역경 다 이기고 생명과 은혜의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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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