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빛의 자녀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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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예레미야 애가 3:1-3; 19-23, 에베소서 5:8-14, 요한복음 1:1-5 -

대림절은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무엇을 기다립니까? 누구를 기다립니까? 우리는 '빛'을 기다립니다. 빛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이사야 9:2)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시자 마태는 이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이렇게 감격 속에 선언합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태 4:16)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요한 1:9)이라고고 증언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시며,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 8: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빛'은 진리의 메타포입니다. 신의 메타포입니다. 그 반대인 '어둠'은 당연히 거짓의 메타포입니다. 악의 메타포입니다. 밀턴의 <실낙원 Paradise Lost>에서 신에게 반기를 들어 쫓겨난 타락 천사들이 머물게 된 지옥의 특징은 완전한 흑암입니다. "적막하고 황량하며 음산한 벌판, 푸르스름한 화염들이 타오르면서 새어 나오는 창백하고 스산한 미광 외에는 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폐허의 땅"이 지옥이라고 밀턴은 썼습니다. 타락 천사들은 거기서 열패감과 절망감 그리고 신에 대한 질투에 불타 복수를 맹세합니다. 완전한 선(善)이신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로 악(惡)을 행하는 걸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는 존재가 됩니다. 악마는 바로 그런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적인 메타포는 <실낙원>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빛과 어둠의 극명한 이분법은 독일국가사회주의당, 곧 나치의 정치 선동 도구였습니다. 히틀러는 빛의 메타포를 선전 선동의 단골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1933년 뉘른베르크 나치당 대회에서 연출된 '리히트돔'(Lichtdom), 즉 '빛의 성당'이 그 전형적인 예입니다. 히틀러는 여기서 무려 152개의 방공 서치라이트를 12m 간격으로 행사장을 둘러 배치하고 밤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빛을 쏘아 올렸습니다. 리히트돔 안에 있던 사람들은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신비한 공간 한가운데 있는 듯한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밖에서 바라보던 이들은 초월적인 어떤 존재나 힘을 마주하고 있는 경외감에 젖었습니다.

나치의 리히트돔은 인간 세계를 빛과 어둠의 두 영역으로 가릅니다. 여기에 성서의 서사가 결합합니다. 성서에는 빛과 어둠의 분열이 한시적이고 결국은 빛이 어둠을 정복함으로써 끝날 것이라고 말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묵시록은 최후 심판의 날, 악에 대한 최종적인 징벌과 어둠의 완전한 소멸을 예언합니다. 성서의 이런 구절들과 결합하여 리히트돔은 단순한 만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분법적이고 투쟁적인 세계관을 독일인들의 의식에 주입했습니다. 제1차 대전의 패배 이후 가혹한 배상에 시달리던 독일인들에게 어둠에 대항하는 빛의 투쟁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신의 성스러운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라는 사명감을 불어넣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빛이고 절대 선이라고 주장한 나치가 1933년에 집권했을 때 유럽에는 지옥문이 열렸습니다.

성서에는 빛과 어둠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구절만 있는 게 아닙니다. 빛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첫째 날에 만드신 창조물입니다.(창세기 1:3) 하나님께서는 이날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습니다.(창세기 1:4-5)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셨다]"(이사야 45:7)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 74편 기자는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시편 74:16) 노래합니다. 시편 139편 기자는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다"(시편 139:12)라고 말합니다. 어둠도, 밤도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성서에서는 빛과 어둠이 반드시 '대극'(對極), 즉 반대의 극은 아닙니다.

인간의 삶은 대극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안과 밖, 위와 아래, 높고 낮음, 서쪽과 동쪽 등 공간적 위치가 대극적입니다. 선과 악,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등 삶의 근원적인 것도 대극적입니다. 강함과 약함, 아름다움과 추함, 성공과 실패 등 삶의 가치 역시 대극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극의 구조 속에서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습니다. 대개 우리는 긍정적으로 생각되는 쪽을 선택하고 반대쪽을 버립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선을 추구할수록 악에 대한 두려움은 강해지지 않던가요. 성공을 추구할수록 더욱 실패를 걱정하게 되지 않던가요. 무엇을 얻으면 그것을 잃을까 염려가 더 커지지 않았습니까.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융은 인간 내면의 어두움을 '그림자'라 불렀습니다. 그림자는 빛의 대극입니다. 예로부터 빛은 긍정의 상징이고, 그림자는 부정의 이미지입니다. 플라톤은 그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인간은 동굴 밖의 넓은 세계를 모른 채 동굴 안에 살고 있고 동굴의 뒤쪽 벽면에 비치는 그림자가 진실이라고 믿으며 어리석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그림자는 이데아에 반대되는 것이며 허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융은 인간 내면의 그림자를 버려야 할 게 아니라 대면하고 통합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림자는 절대 악이 아닙니다. 그림자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나'입니다. 그림자는 '또 다른 나'입니다. 곧 '내 안의 어두운 형제 혹은 자매'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그림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자신에게는 그림자가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그림자를 인지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남에게 투사(投射)합니다. 자신의 열등한 부분을 남에게 투사하여 그를 지나치게 비방하거나 증오합니다. 누군가에게 '나도 모르게' 혹은 '알 수 없게' 불편하고 경멸하는 마음이 든 적이 있습니까? '이유 없이' 친구가 싫거나 꺼려집니까? '왜인지 모르게' 비위를 거스르는 동료가 있습니까? 그리고 '나도 모르게' 화를 내게 되는 후배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 섞인 말투로 비판한 적이 있습니까? 그림자 투사가 일어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투사는 일시적인 안도감과 해방감을 줍니다. 자신은 착한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을 줍니다. 하지만 타인에게 큰 해를 끼치고 스스로는 황폐해집니다. 자기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통합하지 못한 부모는 자녀에게 그 그림자를 투사하여 야단치거나 통제하려 듭니다. 그림자란 대개 열등하고 부도덕한 경향을 나타내기 때문에 자녀의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에 대해 더욱 비난하고 힐난하여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악화하고 양쪽 다 불행해집니다. "자기 자신과 사이가 나쁘면 다른 사람들과도 사이가 나쁘게 된다"라는 발자크의 말이 꼭 맞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와 사이가 좋으십니까?

개인과 개인 사이만이 아닙니다. 집단과 개인 사이에도 '그림자 투사'가 일어납니다. 개인에 대한 집단적인 투사는 구성원 중 한 사람을 왕따로 만들고 그에게 공동체의 어두운 그림자를 씌워 홀로 감내하게 만듭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횡횡하는 일입니다. 집단과 집단 사이의 그림자 투사는 가장 위험합니다. 교활한 정치가는 이를 잘 이용해 집단의 단결력을 높입니다. 요즘 우리 정치가 그렇지 않나 염려됩니다. 체제의 문제점을 유대인들에게 돌림으로써 독일인들의 단결을 도모한 히틀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빛과 어둠'의 이원론을 정치에 잘 이용한 인간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전쟁입니다. 전쟁은 흔히 합법화된 집단폭력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는 그림자 투사라는 엄청난 죽음의 에너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 집단의 그림자가 상대 집단에 투사되면 상대는 인간이 아닌 괴물이거나 혹은 제거해야 할 악으로 보이고 따라서 죽여도 좋거나 아니 꼭 죽여야만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림자 투사는 개인을, 사회를, 세계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우리는 그림자와 대면해야 합니다. 내 안의 어두움과 정직하게 마주 앉아야 합니다. 의식이 빛이라면 무의식은 의식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에는 열등하고 어두운 부분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를 인지하고 포용하면 그 안에 창조적인 능력과 빛의 원천이 있다고 융은 말합니다. 형용모순(oxymoron)이지만 우리 안에는 '어두운 빛'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그림자 안에 숨어있는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대극의 마음을 통합하여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합니다. 자기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억압하고 남에게 투사할 것이 아니라 그와 화해하고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나'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내 마음과 세계의 평화를 이루는 길입니다.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기 안의 어두운 그림자를 잘 통합하여 희망을 일군 사람으로 보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으며]...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다]" 탄식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깊은 어둠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쓰디 쓴 쑥과 담즙 같은 그 어둠이 오히려 소망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옵니다]."(예레미야 애가 3:1-3, 19-21) 힘들었지만 그는 자신의 어둠을 기억하고 응시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이 오히려 그의 소망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신약서신 본문에서도 바울이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에베소서 5:8, 13) 책망을 받던 것, 즉 어둠이 주님의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빛'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지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요한 1:9)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낯선 진리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빛이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만물의 기원인 그분,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주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십니다. 우주의 가장 깊은 곳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을 고동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이 우주가 펼쳐질 때, 생명이 탄생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이 울려 퍼진 태초의 말씀은 사랑입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한복음 1:1-4) 이 빛이, 태초의 빛이 지금도 만물 안에서 고동칩니다. 사랑과 빛이, 생명이 빛이 만물 안에도 고동칩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빛 속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이 빛은 깊은 잠에서 우리를 깨워 우리를 우리 자신이 되게 합니다. 우리가 우리 아닌 다른 존재가 아니라 진정한 우리가 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의 빛은 우리를 우리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철저히 우리가 되게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너만이 너다' - 이보다 더 의미 있고 풍요로운 말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다른 사람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머튼 신부의 말처럼,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참된 기쁨은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공동기도문(홍수희, <사랑을 위한 기도>)처럼,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먼저 나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에 대한 실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듭되는 실패를 따뜻하게 보듬[고]... 어두운 나를 알아 [하나님] 앞에 한없이 낮아지는" 경험을 하게 해달라고 겸손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잘 아십니다. 주님은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다]"(예레미야 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을 너를 이끌었다"(예레미야 3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나를 찾아오십니다. 이 영원한 사랑이 안으로 분열된 나를 찾아오십니다. 이 생명의 빛이 쪼개지고 분열된 세계를 향해 평화의 왕으로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한 찬송가(381장)의 가사처럼, "온 세상 캄캄하여도 내 맘에 빛 있[습니다]... 사랑의 빛 오늘 내 맘에... 항상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죄 짐 벋은 후 마음 속에 항상 그 빛 있[습니다]." 그 사랑의 빛으로 우리는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빛으로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먼저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빛으로 너에게 나의 어둠을 투사하지 않기 위해 나의 그림자를 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나의 어둠 속으로 오십니다. 빛이신 그리스도가, 영원한 사랑과 생명의 빛이신 메시아가 나의 깊은 그림자 안으로 오십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내가 온전한 나가 되게 합니다. 빛과 어둠을 통합하여 이 세계의 평화를 이루십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태초에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습니다]."(고린도후서 4:6) 이것이 성탄입니다. 13세기 그리스도교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성탄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육체와 연합하는 것을 통해 빛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탄생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이사야 60:19-20)임을 믿습니다. 진실로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실]"(사무엘하 22:29)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기다립니다. 생명의 빛을 기다리며 마음속에 대림의 촛불을 하나씩 켭니다. 주님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살펴]보라"(누가복음 11:35) 하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이, 사랑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힘쓰십시오. 그리고 빛의 자녀로 살아가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에베소서 5: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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