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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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9:2-6, 로마서 15:10-13, 마가복음 1:1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 곳은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간 까닭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인구조사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구약성서 미가 5:2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미가 5:2) 아우구스투스는 자기의 통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알기는 한 것일까요?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는 도구로 쓰임 받고 있었음을 누가는 은연중에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구약 시대 고레스 왕이 바빌론의 이스라엘 포로들을 풀어주어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며 땅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자가 로마 황제인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그 사람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계시다고 누가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역사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을 전하는 누가복음 2장에 의하면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은 '구유'입니다. 누가는 그 이유를 여관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여관'(그리스어 '카타뤼마')으로 번역된 단어는 오늘날의 상업적 여관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종류의 여관을 누가는 '판도케이온'이라는 말로 따로 쓰고 있고, 개역개정판 성서는 이를 '주막'(누가 10:35)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카타뤼마'는 '손님방'(guest room)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 손님방에 신생아를 돌볼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없었기에 마리아는 가축의 먹이를 담는 여물통인 '구유'에 아기 예수님을 낳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가난한 농가의 경우에는 사람이 거하는 곳과 가축이 거하는 곳이 한 지붕 아래 같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의 예수님 탄생 기사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마태복음이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을 '집'(마태 2:11)이라 소개하고 있는 것과 달리 누가가 그곳을 '구유'라고 특정하여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의 교독문(누가복음 2장)에서 읽은 것과 같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한 후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 밖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렇게 기쁘고 좋은 소식을 전해들은 첫 번째 청중이 황제나 총독이 아니라 '밤에 밖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목자는 하층민입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더욱이 이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전파된 장소 또한 예상 밖입니다. 그곳은 왕궁이나 성전이 아니라, 목자들이 양을 치던 '바깥'이었습니다.

메시아가 태어난 곳이 '구유'라는 사실, 예수님이 태어나신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들은 '목자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소식이 전해진 장소가 '바깥'이었다는 점은 누가가 전하는 첫 번째 성탄절 소식에서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구유, 목자, 들판은 모두 인류의 구원자가 탄생하셨다는 엄청난 사실과는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인류의 구원자는 화려한 왕궁이나 호화로운 장소에서 세상의 힘 있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영광 가운데 태어나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온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낮고 낮은 구유에서 나셨고, 보잘것없는 목자들에게 그 소식이 가장 먼저 알려졌으며, 천사가 나타나 목자들과 더불어 구주의 나심을 기뻐하며 찬양을 드린 곳은 바깥 들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는 가장 기대가 되지 않는 곳에서 하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성탄은 '놀라움'입니다. 구세주가 나셨는데 그 구주의 탄생이 특이합니다. 온 세상의 구주가 되시는 분이 구유에서 목자들의 찬송을 받으시며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상하거나 깨달을 수 없는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은 놀라움입니다. 이 놀라움은 '두려움'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러 오시는 메시아는 우리가 가진 기존의 가치 기준과 생각을 뒤집는 방식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목자들에게 먼저 "무서워하지 말라"(누가 2:10)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수태를 고지할 때도 먼저 "무서워하지 말라"(누가 1:30) 했습니다. 약혼녀가 임신한 사실 앞에 고뇌하던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의 일성도 "무서워하지 말라"(누가 1:20)였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인간의 눈에 두렵습니다. 하지만 이 '놀라움'과 이 '두려움'이 없으면 우리는 성탄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세상의 방식에 젖어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은 참으로 성탄의 신비입니다.

"우리들의 신의 탄생이 세상을 위한 복음(evangelion)의 시작임을 알리노라." 이 문장은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된 말입니다. 이 유명한 문구는 지금도 에베소 근처 프리에네에 있는 한 비문에 남아 있습니다. 주님 오시기 9년 전에 새겨졌습니다. 이 비문에서 '복음의 시작'이 된 그는 누구입니까?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 그의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쟁에서 이기고, 모든 정적을 물리치고, 인간으로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마침내 신의 대리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오르고 또 올라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정점, 즉 신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때 그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인간의 이름을 버리고 대신 '아우구스투스'라는 신의 이름으로 개명했습니다. '존귀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그렇게 땅 위의 모든 영광은 물론 하늘의 영광까지 독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이 되는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말씀(Logos)이 육신(sarx)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습니다. 가장 거룩한 분이 황실의 요람이 아니라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높은 옥좌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치욕'이라고 말했습니다. '거리끼는 것'이라고 회피했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이것이 '영광'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ㅣ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신비입니다.

신이 된 인간 아우구스투스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복음의 시작'이라고 로마는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이 포고는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소아시아 변방 에베소에까지 선포되어 대리석 깊숙이 새겨졌습니다. '복음'이란 본래 그리스도교의 용어가 아니라 황제의 용어입니다.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했다든지, 황태자를 생산했다든지 하는 '기쁜 소식'이 복음이었습니다. 황제가 베푸는 하사품을 '복음'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백성들에게 복음은 빵과 고기였습니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백성들에게 복음은 막걸리와 고무신인 때가 있었습니다. '로마의 복음'은 그렇게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복음'은 로마에 패망한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절망이었습니다. 탄식이었습니다.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니라 절망의 흉한 소식이었습니다.

이때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마가 1:1)라고 적었습니다. 파피루스에 적었습니다. 마가복음의 맨 처음 구절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단 한 구절의 복음서 말씀입니다. 흔히 마가복음에는 성탄의 기록이 없다고들 합니다. 그러고 보니 마가복음에는 동방박사 이야기도,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 이야기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없습니다. 바로 세례요한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하지만 마가는 성탄의 의미를 아주 또렷하게, 한 구절로 압축해서 단단하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미 '아우구스투스의 복음'이 단단한 대리석에 새겨졌는데 썩어서 없어지는 파피루스 종잇조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적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복음을 부러워하여 모방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마가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황제의 복음의 복제품에 불과한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마가가 전한 것은 전혀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황제가 용납할 수 없는 복음이었습니다. 실제로 황제는 불경한 유언비어와 같은 그 복음의 싹을 잘라버리려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런데 파피루스에 적어 마가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늘날까지 살아있습니다. 하지만 대리석에 적어 로마가 전한 '아우구스투스의 복음'은 사라졌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대리석 비문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만 그의 복음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마가의 파피루스 종잇조각은 다 삭아서 없어졌으나 수많은 마가들이 눈물과 피로 계속 베껴 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늘날 인류의 마음에 살아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우리의 관습과 생각을 넘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지 않는 성탄이라면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을 기다린다면, 정치적 메시아가 나누어주는 빵과 고기와 막걸리와 고무신을 기다린다면 그것은 성서의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된 복음을 신봉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성서의 말씀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것처럼, "흑암에 행하던 백성"에게,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큰 빛을 비추시고 "무겁게 멘 멍에와...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꺽으시는 분, 우리의 '놀라우신 조언자'(Wonderful Counselor), '전능하신 하나님'(Mighty God), '영존하시는 아버지'(Everlasting Father), 그리고 '평화의 왕'(Prince of Peace)을 기다립니다. 그분의 탄생을 기뻐합니다.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 다음에 천사들이 한 일은 '찬송'입니다. '노래'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국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 2:13-14) 했습니다. 이상하나 일입니다. 로마의 평화가 이미 대명천지에 온 세상에 공공연히 울려 퍼졌는데, 또 다른 평화의 노래라니요? 아우구스투스가 세상을 정복하고 나서 목에 힘을 주어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선포하자 모두 앞 다투어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를 합창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작은 소리를 잠재울 만큼 크고 장엄한 승리의 팡파르였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평화의 노래가 울려 나왔습니다. 베들레헴이라 불리는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로마가 점령한 땅, 그 이름조차 지워진 패배자들의 땅, 그중에서도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마을에서, 이름조차 '떡집'(Beth-lehem)인 곳에서, 그것도 밝은 대낮이 아니라 한밤중에 평화의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 노래가 울려 퍼진 무대는 빈 들판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헌정된 사람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구유에 누운 갓난아기였습니다. 그랬습니다. 말 밥통 위에 누운 아기에게 헌정된 평화의 노래! 참으로 이상한 평화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성탄절에 울려 퍼진 노래입니다. 찬송입니다. 이 노랫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 장엄하지도, 그리 요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한밤중에 들판에서 부르는 노래가 뭐 그리 화려했겠습니까. 하지만 이 평화의 노래는 아우구스투스의 거짓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 평화를 노래하는 찬송이었습니다. 놀랍습니다!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게으름과 편견과 상식을 뛰어 넘어 춥고 어두운 이 땅에 마침내 이루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놀라움과 두려움 속에서 오늘 다시 성탄의 평화를 노래해야 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 14:27)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의 마구간은 침침하고, 냄새나고, 짐승들의 우는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던 곳이었습니다. 거룩한 곳도, 깨끗한 곳도, 풍경이 아름다운 곳도 아니었습니다. 무슨 선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기대되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구세주가 탄생하셨습니다. 그 더러운 마구간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기 때문에 베들레헴의 별이 이곳을 비추게 되었고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 머리를 숙이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려 경배한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곳에 계셨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그곳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 마구간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흑암 속에 절망하고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이 마음의 마구간에 예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거기는 더 이상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사랑과 평화의 향기가 나는 아름다운 주의 성전이 됩니다. "베들레헴 / 작고 추한 말구유를 / 허물치 않으시고 / 거기 나신 예수님이여 / 나의 작고 추한 / 마음 구유에 / 탄생 / 좌정하시옵소서" - 이용도 목사님의 기도 시 <마음 구유>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춥고 어두운 여러분의 마음 구유에도 오늘 예수께서 탄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에 좌정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상처받아 쓰리고 아픈 마음이 오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변모되길 바랍니다. "기뻐하여라 / 내 안의 구유 속에도 / 품에 안기듯 오늘 / 오시는 생명, // 밤새 숨어 있던 태양이 / 새벽하늘로 떠오르듯 / 사람이 되시어 / 우리 가운데 / 어서 오시는 숨결, // 그 생명 / 그 숨결로 / 가난한 이들은 / 하늘나라를 차지하리니, / 지금 굶주리는 이들은 / 배부르게 되리니, / 지금 우는 이들은 / 웃게 되리니, // 기뻐하여라 / 오늘 밤 / 내 마음 두 손으로 / 주님 안아보리라."(김형영, <주님 안아보리라>). 오늘 우리가 드린 이 공동의 기도문이 올해 여러분의 성탄의 기도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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