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 40:26-31, 히브리서 12:1-2, 마태복음 7:7-8
알프스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13일간이나 방황하다가 구출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매일 12시간을 필사적으로 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길을 잃은 지점을 중심으로 불과 6km 안에서만 왔다 갔다 했다는 겁니다. 자기는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같은 장소를 뱅뱅 맴돌았습니다.
사람은 눈을 가리면 똑바로 걷지 못합니다. 20m를 걸으면 약 4m의 오차가 생기고, 100m를 가게 되면 결국 원을 그리고 돌게 됩니다. 이런 현상을 윤형 방황(輪形彷徨, circle wandering - 독일어 Ring Wanderung)이라고 합니다. 가도 가도 좌표 없이 똑같은 모래밭이 펼쳐진 사막 같은 곳에서 종종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눈을 가리고 가급적 똑바로 걷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비결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과감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걷는 것입니다. 똑바로 가겠다고 조심조심 걷다가는 오히려 더 비뚤어집니다. 둘째는 약 30보 정도를 걸어간 후에 잠시 멈추었다가 새 출발의 기분으로 또 30보를 걷는 것입니다. 소신을 가지고 과감하게 전진하되, 가끔 쉬어가면서 늘 새 출발의 기분으로 다시 걸어가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멀리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것입니다. 만약 알프스의 눈보라 속과 같은 시계(視界) 제로의 상황이라면 목표지점을 상상하고 그리로 향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새해입니다. 음력 1월 1일 설날이 다가옵니다. '설'의 어원(語源)에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낯설다'의 어근인 '설'에서 파생된 낱말로 보입니다. 우리 앞에 낯선 시간 1년 365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익숙하지 않은 시간을 우리는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세상은 시계 제로의 상황입니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만 멀리서 보면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더욱 과감한 보폭으로, 종종 멈추어 기도하면서, 그리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걸어가야 합니다.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20년 후 당신은 실패한 일보다도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일 때문에 더욱 크게 후회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과감하게 시도하라는 말입니다. 심리학자들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인간은 살다가 실수한 일들에서는 '잠시' 아픔을 느끼지만, 아예 실행에 옮기지도 못한 일들로부터는 '평생'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산책을 하다 가끔 '아, 내가 그때 그 일을 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가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삶은 위험(risk)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어느 시인(자넷 랜드, Janet Land)의 말처럼, "사는 것은 죽는 위험을, 희망을 갖는 것은 절망하는 위험을, [그리고] 시도하는 것은 실패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삶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갖지 못하고, 아무것도 되지 못하므로 고통과 슬픔은 피할 수 있을 것이나 배움을 얻을 수도, 느낄 수도, 변화할 수도, 성장하거나 사랑할 수도 없으므로, 확실한 것에만 묶여 있는 사람은 자유를 박탈당한 노예와 같다"라고 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오직 진정으로 자유롭습니다."
독일의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그래서 '안전'이 아니라 '평화'로 가는 일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안전을 추구하는 길에는 평화로 가는 길이 없다. [왜냐하면] 평화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엄청난 모험이며, 절대 안전을 약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왜 평화를 안전의 반대말로 생각했을까요? 다시 그의 말입니다. "안전을 구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보호자가 되려함이다. [그러나] 평화는 하나님의 계명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안전장치 대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모든 역사를 그분 손에 의탁할 뿐 사사로운 유익을 위해 이용하려 들지 않는다. 싸움은 무기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하는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는 일은 오직 미래에 개방적인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입니다. 가보지 않은 미래에 열린 사람만이 과감하게 그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자'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주님의 '평지(平地)설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굶주릴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날이 올 것이다."(누가복음 6:20-25) 학자들은 세 개의 복(福)과 세 개의 화(禍)를 선포한 이 평지설교가 마태복음의 '산상(山上)설교'(5:3-12)보다 더 원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가난하고, '지금' 굶주리고, '지금' 우는 사람들이 행복하다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행복하고, '앞으로' 배부르며, '앞으로' 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부요하고, '지금' 배부르며, '지금' 웃는 사람은 불행하다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위로를 다 받았기 때문에 '앞으로' 굶주리고, '앞으로' 울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축복을 받는 자들은 어떤 가치를 '소유'한 자들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상태를 종교적 겸손이라고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저들은 자신이 '이미 가진 것'(현재)에 의해서는 살 수 없고, 오직 '앞으로 주어짐'(미래)에 의해서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복을 받는 이유는 새로운 것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미래에 열려있고 그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주님은 선포하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65:17)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기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13b-14)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만물을 새롭게"(요한계시록 21:5) 하시는 하나님의 미래로 성큼성큼, 과감하게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익숙한 현재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익숙해지면 안 됩니다. 사랑도, 사람도, 인생도 익숙해지면 시들해집니다. 물론 도전은 서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인(나태주)의 말처럼, "서툴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낯설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서툰 것만이 사랑[입니다]. 낯선 것만이 사랑[입니다]." 익숙하거나 능숙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내어 과감하게 새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길을 종종 멈춰 기도하며 가야 합니다. 30보를 성큼성큼 내딛은 다음 잠시 멈추었다가 새 출발의 기분으로 다시 30보를 성큼성큼 걸어야 합니다. 사실 앞으로 가는 것인지, 뒤로 가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정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이 현대인들입니다. '멈추어 설 줄 아는 힘'을 잃어버린 것이 현대과학과 자본주의 문명의 위기가 아닌가 합니다. 프랑스의 종교철학자 파스칼(Pasca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기도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주님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 6:6) 하셨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입니다. 기도란,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신을 위협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란, 자신을 비워 신의 뜻으로 채우는 행위입니다. 내 안에 '텅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 기도입니다. 백지상태를 의미하는 '타블라 라사'(tabla rasa)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라틴어 '라사'(rasa)는 '여백의 미'를 가리킵니다. 우리 삶에는 여백의 미가 있어야 합니다. 욕망으로 가득 찼던 마음이 비워져 삶에 여백이 생길 때 비로소 내 안에 신의 뜻이 채워지고 신의 은총이 임합니다.
그래서 비움으로서의 기도는 창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라고 했습니다. 성서의 맨 처음에 나오는 이 '창조하다'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바라'(bara)입니다. 그 뜻을 살펴보니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단순한 모습으로 만들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조각하다'는 말과 상통합니다. 영어로 조각에 해당하는 단어는 '스컬프쳐'(sculpture)입니다. 라틴어 '스쿨페레'(sculpere)에서 유래했습니다. 그 뜻은 '쓸데없고 부수적인 것을 덜어내다, 잘라내다, 쪼아서 제거하다' 입니다.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 미켈란젤로는 조각 작업을 망치와 끌로 '물질 안에 속박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했지요. 대리석 안에 이미 있는 형상을 바라보며 그는 불필요한 부분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삶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나를 '더는 덜어낼 것이 없는 단순한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창조입니다. 나를 새로 창조하는 일이 기도입니다. 나를 '비움'으로 하나님으로 '채움'이 기도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지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좀 더 단순해져야 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 눈보라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인생에 쓸데없이 수많은 것들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폴로 들고 전전긍긍하는지를! 더는 덜어낼 수 없는 가장 단순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쓸데없고 부수적인 것들을 덜어내고, 잘라내고, 쪼아서 제거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립보서 2:6-7)라고 성서가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를 비우심(kenosis)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를 비움으로 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세 스페인의 영성의 대가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 1542-1591)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맛보고자 하는 사람은 / 어떤 맛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 어떤 지식에도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 ... 모든 것을 가지려면 / 어떤 것도 필요로 함이 없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가도 가도 사막이고, 과연 내가 똑바로 나아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마음에 보이지 않는 쪽이 더 두렵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이 꼭 그렇습니다. 눈을 감아도 비전(vision)이 없습니다. 성서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잠언 29:18) 했습니다. 한 영어성경의 번역대로("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 KJV),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라는 뜻입니다. 비전은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보이지 않아 더 두렵습니다. 누군가 "세상은 온통 거짓으로 차버려, [오히려] 진실이 사람들을 괴롭히게 되었다"(Society has become so fake that the truth actually bothers people)라고 요즘의 세태를 짚었습니다. 거짓된 것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아무것도 들리질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높이 눈을 들어 하늘(비전)을 바라보며 이 어둡고 낯설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이사야 40:26)라고 촉구합니다. 눈을 들면 무엇이 보입니까? 눈을 높이 들면 별이 보입니다. 아마도 선지자는 캄캄한 밤하늘 아래에서 예언을 선포하는 것 같습니다. 이사야가 묻습니다. "누가 이 모든 별을 창조하였느냐?" 그리고 답합니다. "그분께서 천제를 수효를 세어 불러내신다. 그는 능력이 많으시고 힘이 세셔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시니,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그리고 다시 묻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 하느냐?"(40:27, 새번역) 그리고 다시 답합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 줄을 모르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신 분이다. 피곤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시는 분이시다."(40:28-29, 새번역) 비록 "청년들도 힘이 빠져 허덕이겠고 장정들도 비틀거리겠지만"(40:30, 공동번역), "오직 여호와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는 새 힘을 얻어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지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40:31, 현대인의 성경). 선지자는 우리의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을 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여호와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는 새 힘이 솟아나 "날개 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하지 아니하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공동번역) 확언하였습니다.
오늘의 신약서신(히브리서 12:1-2) 본문도 우리 앞에 "달려야 할 길"(공동번역)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2:1) 놀랍게도 이 길은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지켜보는 길입니다. 배우는 유명한 극작가가 관람석에 있을 때 한층 더 힘을 내어 연기하겠지요. 경기자는 유명한 올림픽 선수들이 관전하고 있을 때 몇 배나 되는 힘을 다하여 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혼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각각 자기의 시대를 살고 고난을 받고 죽어간 신앙의 영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서신은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12:1, 공동번역)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서신의 저자는 우리가 달려야 할 이 길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목표를 향해 똑바로 나아갈 수 있는 비결을 이어서 제시합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12:2)라는 그 다음 구절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라 했습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때 방황하지 않는 방법은 나침반을 보며 가거나 북극성을 바라보며 걷는 것입니다. 나침반은 흔들리면서도 끝내 북쪽을 가리킵니다. 사실 '흔들림' 없는 삶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비틀거리며 걷습니다. 삶이란, 그렇게 흔들리면서 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향점'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내 삶이 흔들린다고 느껴질 때, 내가 삶의 지향점을 놓친 것이 아닌가 먼저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이 결정됩니다. 그가 바라보는 게 그의 삶이요 내용입니다.
성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는 말은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공동번역), 혹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새번역), 곧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우리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현대인의 성경)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인생과 역사의 나침반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북극성과 같은 밤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분입니다. 성서는 바로 그분을 "바라보자"라고 했습니다. 한 영어 성서는 이 말씀을 "Let us fix our eyes on Jesus"(NIV)라고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영어로 "fix"는 '고정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는 말은,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인 그분에게 우리의 눈을 고정하자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곧 하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미국과 캐나다 국경의 나이아가라 폭포를 외줄타기로 건넌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발짝만 헛디뎌도 천길 소용돌이 물속으로 떨어지는 아주 위험한 시도였습니다. 그가 성공적으로 폭포를 횡단한 후 사람들이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의 답입니다. "마침 밤하늘이 맑아 멀리 있는 큰 별 하나 똑바로 바라보고 한 발자국씩 옮겼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외줄타기와 같은 우리의 인생길에서 발밑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멀리 큰 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언젠가 차만 타면 멀미가 심해 눈을 감는 친구에게 "차라리 먼 곳을 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하면 눈을 감고 안 보려 합니다. 가까운 것만 보려는 근시안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멀리 보아야 합니다. 앞이 안 보일수록 더욱 멀리 보아야 합니다.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북극성처럼 밤하늘에 빛나며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다시 새해입니다. 낯선 시간이 다가옵니다. 낯설어서 설인가 봅니다. 365일, 다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합니다. 2년을 넘긴 코로나는 오미크론 변이로 인하여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우리는 눈보라 치는 깊은 알프스 산속에 갇혔습니다. 사막과도 같이 가도 가도 똑같은 모래언덕 속에서 좌표를 잃고 갈 길을 잃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늘 제자리입니다. 그러나 이제 방황을 끝내야 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계 제로의 상황 속에서 똑바로 걷기 위해서는 과감한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야 합니다. 30보 정도를 그렇게 한 다음에 반드시 멈추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입니다. 글자 하나가 큰 차이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무얼 달라고 떼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 임하도록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 14:36)라고 예수처럼 비움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고 다시 일어나 30보를 성큼성큼 걸어가십시오. 이번에는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을 보며 걸어가십시오. 우리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며 걸어가십시오. 그에게서 눈을 떼지 마십시오. 우리는 결코 길을 잃거나 방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감격스러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여정의 종점인 동시에 이 여행의 동반자라는 사실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혼자 외로이 걷는 길이 아니라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소리 높여 응원하는 가운데,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곧 기도로 비워 버리고, 오직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는 영광스러운 목표를 바라보며, 인내로써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감격스러운 것은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께서 이미 그의 여정을 끝내고 목적지에서 우리가 도착하는 것을 따뜻하게 영접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새해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많이 받으십시오.
기도합시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믿음의 주 온전케 하시니 예수를 바라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주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십니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시편 46:1-3, 오늘의 교독문)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