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넉넉히 이기느니라"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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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45:5-8, 로마서 8:35-39, 마가복음 10:46-52

새해가 시작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월은 징검다리와 같은 달입니다.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달입니다. 오랜만에 신경림 시인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의 시 <싹>은 봄이 올 때 읽기 참 좋은 시입니다.

"... 꼼짝도 하지 않던 / 나무에 새싹이 트고 꽃이 피면 / 봄의 신비가 열린다 // 겨울을 치열하게 산 것들 / 그 어둠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 아주 작은 빛이라도 고대했던 것들 / 그들이 얼른 마중 나간 덕분에 / 봄이 오고 있다 // 아픔을 딛고 겨울을 살아낸 것들이 / 푸른 세상을 짓고 있다 / 저 여린 새싹들이 / 혹한의 겨울을 밀어내고 / 따뜻한 세상을 열고 있다."

봄이 오니 꽃이 피는 걸까요, 아니면 꽃이 피니 봄이 오는 걸까요. 전자일 겁니다. 봄이 오니 꽃이 피지, 꽃이 피니 봄이 오는 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시인은 후자라고 말합니다. 새싹들이 "얼른 마중 나간 덕분에 / 봄이 오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저 여린 새싹들이 / 혹한이 겨울을 밀어내고 / 따뜻한 세상을 열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저 여린 것들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그것들이 따뜻한 봄을 짓고 있다고 말하는 걸까요? 이 역설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영국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퍼스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는 한국인들이 참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특히 그의 <서풍부 西風賦>, 즉 <서풍에 부치는 노래 Ode to the West Wind>는 함석헌 선생이 "슬프면서도 녹아드는 [영]혼의 기도"이자, "나를 몇 번이나 엎어진 데서 일으켜 준 시"라고 찬사를 보낸 시입니다. 우리에게는 마지막 행이 매우 익숙한 시이기도 합니다.

"오, 나를 일으키려마. 물결처럼, 잎새처럼, 구름처럼! / 우주 사이에 휘날리어 새 생명을 주어라! / 그리하여, 부르는 이 노래의 소리로, / 영원의 풀무에서 재와 불꽃을 날리듯이, / 나의 말을 인류 속에 넣어 흩어라! / 내 입술을 빌려 이 잠자는 지구 위에 / 예언의 나팔 소리를 외쳐라! 오, 바람아. /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겠지?"

어려운 시절, 한국인들은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겠지?"(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라는 셸리의 이 마지막 구절에서 큰 힘을 얻었습니다. 영국은 북위 50도~60도 고위도 임에도 편서풍의 영향으로 따뜻하지요. 그래서 시인에게 서풍은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라는 "예언의 나팔소리"입니다. 자신을 "물결처럼, 잎새처럼, 구름처럼" 일으켜 세우는 희망입니다. 시인은 '저항 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겨울에 맞서고 있습니다. 춥다고 웅크리면 더 춥습니다. 그러나 일어나 뛰면 훈훈해집니다. 삶에도 저항 정신이 필요합니다. 겨울과 같은 역경과 어려움은 정해진 운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가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은 영혼을 맑게 울리는 글들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떠난 사람입니다. 그는 "운명론에서 희망으로"(From Fatalism to Hope)라는 글에서 이렇게 격렬하게 운명론에 저항합니다.(헨리 나우웬, 『춤추시는 하나님』 중에서.) 운명론이란 "모든 사건을 불가항력(不可抗力)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입니다. 세상사가 내 능력 밖이라고 체념하는 태도입니다. "운명은 나를 가두는 이름 없는 힘"으로 여기는 것이 운명론이라고 나우웬은 말합니다. 대부분의 시대, 대부분의 사람은 이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나우웬은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믿음도 '내 능력 밖의 손에 자신을 내어 맡긴다'라는 고백을 요구하기에 언뜻 운명론과 비슷해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운명론과 매우 다릅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이 반드시 승리한다는 깊은 확신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친밀하고 인격적인 신뢰를 통해 '주님의 강하신 사랑의 손에 저를 맡깁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세상사에 관한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희망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는 삶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능동적 기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는 희망찬 의지"라고 나우웬은 말합니다.

믿음과 미신(迷信)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미신은 내게 있는 재물이나 재능으로 신을 달래고 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을 변화시켜서 내 운명을 바꾸고 내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미신입니다. 이와 달리 믿음은 신 앞에서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미신의 진정한 차이는 나의 변화 유무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다 할지라도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 그분을 나의 돈이나 재능이나 정성으로 달래고 얼러서 내 목적을 성취하려 한다면 그것은 미신을 좇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날이면 날마다 그분의 말씀 안에서 내가 바뀌어 간다면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신을 바꾸려 하느냐, 아니면 나를 바꾸려 하느냐 이것이 미신과 신앙의 차이입니다. 단순한 외적 변화(change)가 아니라 내적이고 본질적인 변혁(transformation)의 문제입니다. (이재철, 『회복의 신앙』 중에서)

성서는 사사로운 관심에서 미래를 엿보려 한다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바깥의 힘'에 기대어 소원의 성취를 돕는 사이비 종교를 경계합니다. 이스라엘이 40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모세는 이렇게 엄중히 경고했습니다. 신명기 18장의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신명기 18:9-14)

우리는 기도할 때 문제해결을 위해서만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내와 능력을 주시고 이 과정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 기도한 대로 응답을 받고 싶다면 주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처럼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 26:39, 마가 14:36)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 6:10)라고 기도하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경건하게 기도하되, 힘있게 두드려야 합니다."(윌리엄 번햄) "기도가 인간의 실천을 대신해 버리면 그것은 미신이 됩니다."(마틴 루터 킹, 『사랑의 힘 Strength to Love』). 우리는 타고르의 시 <참된 기도>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 위험에 처해서도 / 겁내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 고통을 극복할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인생의 싸움터에서 / 동조자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 인생과 싸워 이길 / 스스로의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근심스러운 공포에서 구원해달라고 / 기도하지 말게 하시고, / 자유를 싸워 얻을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나이다. / 도와주소서. / 일취월장하는 성공 속에서만 / 하느님께서 자비하다고 생각지 말게 하시고, /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도 / 하느님께서 내 손을 / 힘껏 쥐고 계시다고 감사하게 하소서."

성서에는 타고르의 기도처럼, 위험에 처해서도 겁내지 않았던 사람들, 고통을 극복할 용기를 낸 사람들, 운명과 맞서 싸워 이길 힘을 달라고 기도한 사람들, 근심스러운 공포 속에서 인내로 자유를 싸워 얻어낸 믿음의 사람들 이야기가 차고 넘칩니다.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는 맹인이고 거지였다고 오늘의 복음서가 말합니다.(마가 10:46-52)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의 일입니다. 허다한 무리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앉아 있던 바디매오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질러 그를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앞이 보이질 않아 아마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무작정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면박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영예(honor)와 수치(shame)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입니다. 공공의 장소에서 그것도 '죄인'으로 간주되는 맹인이 어딜 감히 부끄러운 줄로 모르고 소리를 지른단 말입니까. 그런데 바디매오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 외침이 예수님의 귓가에 닿았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셨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입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를 꾸짖었던 사람들 그에게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일러주었습니다.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 왔습니다. 만사를 제쳐두고 예수 앞으로 달려나갔습니다. 예수께서 먼저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의 소원을 물으셨습니다. 바디매오가 답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단 한 마디, 그의 삶에서 그가 원하는 단 한 가지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때의 일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마가 10:5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디매오의 신앙을 묻지 않았습니다. 요리문답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바디매오가 한 일은 크게 소리를 두 번 지른 것과 예수님 앞으로 달려온 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의 행위를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습니다. 그의 행위가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면 자기의 눈을 뜨게 해줄 것임을 확신하여 부끄러움도 모르고, 주변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어디엔가 자기 앞으로 지나실 예수를 향해 큰 소리를 외친 그의 행동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헨리 나우웬이 말한 믿음, 곧 "수동적인 체념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는 희망찬 의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습니다. 건강은 오히려 더 악화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자기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고 위험천만한 일을 했습니다. 군중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 몰래 뒤에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분의 옷에 손만 대어도 나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행위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정결 규례에 의하면 이는 예수님을 '오염'시키는 행위였습니다. 정결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그것도 여성이, 더구나 공공의 장소에서 이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곧바로 자신의 몸에서 출혈의 근원이 마르고 나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예수께서는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뒤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황급히 도망쳐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을 두려워 떨면서도 엎드려 사실대로 다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의 입에서는 질책이 아니라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나왔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마가 5:23)

바디매오에게 하신 말씀과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교리를 잘 아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인도 예수님의 옷에 손만 대어도 낳을 거라 확신하고 움직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습니다. 그의 행동이 믿음이었습니다. 가혹한 가부장 사회에서 무려 12년 동안이나 깊은 병을 앓으며 '죄인'으로 낙인찍힌 그 운명과도 같은 삶을 그 여인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라고 순순히 받아들일 용의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가두는 이름 없는 그 힘에 그녀는 저항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움직였습니다. 얼굴을 파묻고 군중 사이로 끼어들어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을 향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마가만이 아니라 마태와 누가도 똑같이 이 이야기를 보도합니다.(마태 9:22, 누가 8:48).

복음서에는 이 여인과 바디매오 말고도 예수께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깨뜨려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그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누가 7:50) 축복하셨습니다. 또 고침을 받은 나병환자 열 명 중에서 예수님 앞으로 돌아와 감사를 표한 사마리아 사람에게도 예수께서는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누가 17:19)라고 똑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이렇듯 성서에는 위험에 처해서도 겁을 내지 않았던 사람들, 고통을 극복할 용기를 낸 사람들, 운명과 맞서 싸워 이길 힘을 달라고 기도한 사람들, 근심스러운 공포 속에서도 자유를 싸워 얻어낸 믿음의 사람들 이야기가 차고 넘칩니다. 우리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정신의학자 폴 투르니에는 그의 책 『치유』에서 미신의 출발점은 공포라고 했습니다. 또 수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공포는 창세기 3:10에서 아담이 한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첫 사람 아담과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에게는 죄로 인해 만들어진 숙명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자신이 벌거벗은 존재임을 발견하고 수치스러워 하나님을 피해 어둠 속으로 달아나려는 깊은 공포가 숨어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이 근원적인 두려움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요한1서 4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한1서 4:18a) 그렇습니다. 우리를 내면 깊은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은 사랑합니다. "온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요체는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성서가 말하는 섭리입니다.

'섭리'(攝理)는, 신학자 폴 틸리히가 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도우심 덕분에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좋지 않게 끝나는 수많은 문제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 섭리는 모든 상황에서 희망을 유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는 상황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섭리에 대한 신앙은 그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처럼 하늘에서 죽음이 쏟아져 내릴 때, 오늘날처럼 역병이 온 세상에 창궐할 때, 오늘날처럼 굶주림과 박해가 수백만의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때, 그리고 오늘날처럼 우리 삶 속에 온갖 거짓과 편견과 혐오와 차별의 폭력이 횡횡할 때, 그때, 바로 그때, 그 모든 것조차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는 믿음이 바로 섭리에 대한 신앙입니다. (폴 틸리히, 『흔들리는 터전』 중에서.) 이것이 오늘의 신약서신의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5-39)

하나님은 기계처럼 모든 것을 결정해 놓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오히려 모든 상황 속에서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파괴될 수 없는 새 창조입니다. 오늘 구약성서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말씀하시며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이사야 45:7-8)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이사야 43:19)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이사야 65:17-18) 하셨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봄이 오고 있습니다. 아픔을 딛고 겨울을 살아낸 것들이 푸른 세상을 짓고 있습니다. 저 여린 새싹들이 혹한의 겨울을 밀어내고 따뜻한 세상 열고 있습니다. 신앙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만 믿으면 그분이 모든 걸 다 알아서 처리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과 문제를 직시하게 하는 힘입니다. 두려움 없이 오늘을 살게 하는 용기입니다. 신앙은 운명론에 맞서 싸우고 저항하는 힘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습니까? 환난입니까? 박해입니까? 기근입니까? 질병입니까? 위험입니까? 전쟁입니까?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6-37) 하셨습니다. "사랑밖에 오르는 주님 / 사랑으로 나를 섭리하[십니다]."(홍수희, <찬미하리라>) 우리는 이 사랑의 섭리 안에서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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