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쿼바디스 도미네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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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마가복음 11:6-14, 마태복음 26:6-13, 요한복음 18:33-38

라틴어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3:36에서 시몬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던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요한 13:33)라고 주께서 말씀하시자 시몬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한 13:36)라고 대답하시면서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하리라고 예고하셨습니다.

「베드로행전」이라는 외경(外經 - 성서 정경에 포함되지 않은 책)에 다시 이 질문이 나옵니다. 먼 훗날 로마에서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혼자 로마를 빠져나가던 베드로가 로마 성문을 벗어날 때 거꾸로 로마로 들어가시는 주님을 뵈었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자, 주님은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러 로마에 들어간다' 대답하십니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고 기쁨으로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갑니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솅키에비치가 장편소설 『쿼바디스』를 썼습니다. 이 작품은 190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12년, 1951년 그리고 2001년에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로버트 테일러와 데보라 카가 주연한 1951년 작 영화 <쿼바디스>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이 영화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벤허>와 <십계> 다음으로 TV에서 많이 방영해줍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 시절, 정복 전쟁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비니키우스가 기독교인 리지아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진정한 크리스천이 된다는 내용이지요. 영화 속의 명장면은 박해를 피해 급히 로마를 빠져나가는 베드로 앞에 예수께서 나타나시는 장면입니다. 빛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가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하십니다. "네가 내 양들을 버린다면 내가 다시 십자가에 매달리러 로마에 가리라!"

'쿼바디스 도미네.' 베드로는 이 질문은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몰라서 물은 게 아닙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았기에 꼭 그 길로 가야만 하시냐고 물은 것입니다. 왜 그 길로 가야만 하시냐고 물은 겁니다. 그 길 말고 다른 길은 없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처음 가르치셨을 때부터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였고", 예수께서는 이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가 8:31-33, 마태 16:21-23)라고 꾸짖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가 결국 묻고야 말았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죽는 줄 알면서 왜 이 길로 가십니까!' '꼭 이리로 가셔야만 합니까!' '이 길 말고도 딴 길이 있지 않을까요!'

닉 페이지(Nick Page)의 책 『가장 길었던 한 주 The Longest Week: The Truth about Jesus' Last Days』(포이에마, 2011)는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일주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서의 사복음서와 바울서신,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와 필로의 저작, 유대의 랍비 문학 <미슈나 Mishna>, 그리고 외경 복음서들을 가지고 2천 년 전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요일별로, 시간대별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전적으로 변화시킨 그 일주일에 관한 책입니다. 실패처럼 보이지만 영광스러운 승리를 담은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비폭력적 사랑 이야기"라고 이름 붙인 이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간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죽음의 여행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서기 33년 3월 29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종려주일로 지키는 바로 그 일요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베다니에서 감람산 등성이를 넘어 기드론 골짜기를 거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모습이 우스꽝스럽습니다. 마치 다 큰 어른이 어린이용 자전거를 탄 모양새입니다. 주님은 구약성서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일부터 이런 모습을 연출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 9:9)

'연출'이라 했습니다. 허튼 말이 아닙니다. 학자들은 예수께서 '일부러' 재미와 풍자가 있는 행진을 정교하게 기획하셨다는 데 동의합니다. 또 다른 행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언제나 로마의 군사들이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습니다. 그들의 반짝이는 갑옷과 윤나는 가죽을 상상해보십시오. 보무당당하게 높은 말 위에 탄 기병들과 어깨 위 제국의 독수리가 행진을 이끕니다. 로마의 황제를 대표해 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시위하는 행진이었습니다. 총독 빌라도 언제나 서쪽에서 군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루살렘의 동쪽에서 입성하셨습니다. 말이 아니라 일부러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전쟁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평화의 임금'으로 스가랴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스가랴 9:10) 전쟁과 폭력에 찌든 예루살렘 백성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가 11:9)라고 환호했습니다. 평화의 연호(連呼)였습니다. 지금 온 세계 교회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맞서 외치는그 평화와 연호와 같은 연호였습니다. 이 평화의 바람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이를 보고 한 말에서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요한 12:19) 그렇게 첫날이 갔습니다.

서기 33년 3월 30일 월요일,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날 예수님은 느닷없이 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마가 11:12-14) 듣고 보니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무의 잘못이 아닙니다. 성서도 기록합니다. 그때는 무화과나무가 열리는 철이 아니었습니다. 무화과는 5~6월에 한 번, 또 8~10월에 두 번째 과실을 맺습니다. 그때는 3월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요?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의 상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고대 세계에서 아주 큰 건물 중 하나였습니다. 이 건물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서쪽의 벽, 곧 '통곡의 벽'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룹바벨이 중건(重建)한 성전을 헤롯 대왕이 두 배로 규모를 키웠습니다. 얼마나 웅장하게 재건축했는지 사람들은 이 성전을 '성전 산'(Temple Mount)이라 불렀습니다. 이 성전은 로마 제국 전체에서도 가장 부유한 조직 중 하나였습니다. 매년 로마 제국 전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세를 거둬들였습니다. 수천 명의 순례자에게 날마다 희생 제물을 판매하여 막대한 이윤을 남겼습니다. 농산물의 십일조도 거둬들였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은 단지 제사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경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기계였습니다. 이 덕에 성전귀족들은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며 권세를 누렸습니다. 얼마나 사치와 낭비가 심했냐 하면 대제사장의 의복을 만드는 데 1만 데나리온이나 썼습니다. 1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치 일당입니다. 그러니까 평범한 노동자 하나가 1만 일, 즉 약 27년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큰돈을 대제사장 의복 만드는 데 탕진했습니다. 게다가 가난한 사람들이 제사 드리기 위해서도 큰돈이 필요했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택하는 제물인 비둘기는 1데나리온이었습니다. 새끼 양은 4데나리온, 숫양은 8데나리온, 송아지는 20데나리온이었습니다. 부자들은 한 마리에 100~200데나리온 하는 소를 바쳤습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백성이 성전 제사에 참여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의 이 둘째 날, 주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요한 2:15)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누가 19:46) 질타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사용하신 '강도'(lestes)라는 단어는 좀도둑이 아닙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강탈자'를 뜻합니다. 돈 바꾸는 사람이나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 배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로 '하난(Hanan) 가문'의 사람들입니다. 하난은 당시의 실권자 '안나스'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주후 6~15년까지 10년 동안 로마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안나스는 자신의 '대제사장 왕조'를 세웠습니다.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실권을 행사하며 자기의 다섯 아들과 사위가 대제사장직을 돌아가며 맡게 했습니다. (이중 사위 가야바는 예수님의 처형을 주장한 장본인이고, 막내아들 아나누스는 나중에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를 처형한 장본인입니다.)

제사장직은 대개 사두개인이 맡았습니다.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날 토요일에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은 이미 신학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화요일에 예수님은 성전의 상을 뒤엎음으로써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대제사장 하난(안나스) 가문에 채찍을 가하셨습니다. 우리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왜 그렇게 확고히 예수님의 처형을 주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의 큰 건물을 보고 감탄하는 제자에게,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가 13:2)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다음 날 예수께서 저주한 '성전 산'의 상징인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을 보고 베드로가 묻자, "하나님을 믿으라. [성전이 아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가 11:23)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조금씩 이해가 됩니다. 왜 베드로가 물었는지.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님 꼭 이 길로 가서야 합니까!' '이 길 말고 다른 길이 있지 않습니까!'

서기 33년 3월 31일 화요일, 드디어 반격이 시작됩니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셋째 날,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총공세를 폅니다. 그들은 군대를 보내어 예수님을 체포하는 대신 먼저 그분의 신뢰도를 무너뜨려 대중과 분리시키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네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가?" "형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부활 때 그중 누구의 아내가 되는가?" 그리고 "모든 계명 중에 제일가는 계명은 무엇인가?" 이 네 가지입니다. 이중 마지막 질문만 진짜 질문이고 나머지 셋은 정교한 덫이고 함정입니다. 주님은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바리새인, 헤롯당원, 그리고 사두개인들이 똘똘 뭉쳐 던지는 이 도전들을 다 물리치시고 질문한 자들의 자기모순과 위선을 폭로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체포되는 건 시간문제였습니다.

서기 33년 4월 1일 수요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주일의 넷째 날, 급기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기]"(마가 14:1) 시작합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이날 수요일에는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아시고 그냥 베다니에 머무신 것 같습니다. 그날 저녁 주님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십니다. 요즘엔 나병을 한센병이라 부르는데, 고대의 나병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나병이 아니라 피부 발진, 상처, 외관 손상 등을 포괄하는, 흉터가 남은 유전적 피부 질환을 가리킵니다. 이 질병에 걸리면 사회에서 추방되거나 공동체에서 제명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런 '나병환자' 집에서 식사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얼마나 당시의 사회적, 종교적 경계를 쉽게 허무셨는지 보여줍니다. 그분은 나병환자에게 먼저 다가가셨고 그들을 친히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엄격히 금지된 일입니다. 죽음도 불사한 일입니다. 지금 도대체 주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겁니까! 주님은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왜 자꾸 그리고 가십니까! 쿼바디스 도미네!

예수께서 식탁에 계실 때 한 여인이 다가와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그분에게 부었습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 여자를 비난했습니다. 차라리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게 더 낫다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변호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한 12:8)라고 말씀하시며 그 여인이 영원히 기념될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사실 이 여인은 당시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엄격히 금지된 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당시 여성은 '지각없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논쟁하고 토론하고 배우는 것은 남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여성들은 그 틈에서 요리를 해야 했습니다. 여성들은 권리도 거의 없었습니다. 남편의 부정(不貞)이 아니면 이혼을 청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남자들은 사실상 아무 이유로든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주목할 점은 당시 종교인들이 '하나님은 결코 여성에게 말을 걸지 않으신다'라고 확신했다는 점입니다. 엘리에제르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전능자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제외하고는 어떤 여성에게도 말씀하신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여성은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랍비들은 여성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유대인의 랍비 문학 <미슈나>는 "만약 여자가 머리카락을 묶거나 틀어 올리지 않고 길거리에 나가 아무 남자와 이야기하면" 이혼 사유가 된다고 했습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는 이런 행동을 한 여인과 이혼하는 것은 남편의 종교적 의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우리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기록한 향유 사건이 당시 얼마나 충격적인 반향을 일으켰을지 가늠하게 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누가 7:38) 그렇게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한 12:3) 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지정된 자리에서 이탈하고 경계를 넘었습니다. 여성은 남자와 함께 논쟁에 참여할 수 없기에, 식사하는 동안 조용히 시중을 들어야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야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또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듣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이야기에 참여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유일한 길은 항아리를 깨뜨려 온 집을 향기로 진동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행동은 사려 깊거나 품위 있는 행동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로부터 침묵을 강요당한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여인은 말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언권(言權)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말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촉각과 후각의 언어가 되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리 없는 아우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겁니다. 절규하고 있는 겁니다. 멀리 네팔에서 수입된 진귀한 나드 향유 전체를 깨뜨려 자신의 고통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은 이 여인을 비난했습니다.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인의 언어를 구사할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 언어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짓밟혀 본 사람은 압니다. 여인은 예수께서 어떤 형벌을 받게 되실지 알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금기를 깨뜨린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높은 분들은 절대로 자기들의 질서와 이권에 도전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억압을 경험했기에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 지 알았습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았기에 아무 말 없이, 눈물로, 사랑으로, 향기로 그분의 마지막 여정을 축복했습니다. 그는 베드로처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로 가시지 않으면 안 되겠냐고 막지 않았습니다. 메시아의 길을 알았기에 눈물로, 향기로 그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주님은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항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태 26:12)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마가 14:8)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이 가시는 길을 알고 그 길을 예비한 여인을 가리키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가 14:9), 마태 26:13) 축복하셨습니다. 이 일이 예수님의 지상 마지막 일주일의 넷째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다음 날, 서기 33년 4월 1일 목요일, 주님은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게 하시고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알다시피 유대 도시들은 매우 불결했습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오물과 먼지, 배설물과 쓰레기, 타고 남은 재와 썩은 음식물을 비껴갈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발을 씻는 것은 기본적으로 위생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정결법 규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전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나 자기 발을 씻어야 하고 최소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자유민은 누구도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역할은 노예들이나 아내와 자녀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발을 씻기시려는 예수님에게 베드로가 그렇게나 놀랐던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여 주께서 [노예가 아니라!]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요한 13:6) 베드로는 충격으로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웅얼거립니다. "주님, 아니... 세상에나!"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잘 이해했기에 충격으로 웅얼거립니다. 주님은 인간으로서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지위인 노예의 신분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가장 천한 인간의 역할을 자임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당신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주님의 교회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배운 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는 사람들을 대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로마 제묵에 사는 어떤 사람도 이 급진적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바울의 이 사상은 다름 아닌 예수님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이 없었다면 초대교회도 없고 지금 이 교회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은 유대의 관습에 따라 목요일 자정이나 다음 날 금요일 새벽 2시쯤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마치고 새벽 이른 시간에 제자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달빛이 형형했습니다. 보름달이었습니다. 서기 33년 4월 3일 금요일,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주님은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꼭 그 길로 가셔야 하시겠습니까!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아시면서 왜 자꾸 그리로 가십니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한 12:24-25)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오는 4월 15일 성금요일 저녁 예배에서 오늘 예루살렘 입성으로 시작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마지막 일주일의 끝 여정을 만나보겠습니다. 이 한 주,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바꾼 '가장 길었던 한 주'를 주님이 가신 "Via Dolorosa"(십자가의 길)을 따라 함께 가시기 바랍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의 길을 함께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는 우리에게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니 내가 다시 십자가에 매달리러 골고다 언덕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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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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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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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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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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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