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부활주일설교] 복수하시는 하나님, 빛으로 나타나소서!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역대지하 26장 3-5절, 시편 94편 1-7절, 누가복음서 12장 4-7절

[사회적 거리두기 폐지와 한 걸음 나아가기]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오늘 예배에 참여하신 여러분 모두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능력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빕니다. 내일부터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와 관련된 모든 제한이 해제됩니다. 사적 모임 인원 제한이라든가 영업시간 제한도 모두 풀리고, 집회와 예배의 거리 두기도 풀리게 됩니다. 다만 실내에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일주일간의 기간을 더 두고 4월 25일부터 가능해집니다. 마스크의 경우는 당분간 계속 쓰게 될 전망입니다. 야외의 경우에는 거리 두기 해제 후 2주간 살펴보고 추이를 보면서 마스크 착용 여부를 다시 검토한다고 합니다. 특이한 바이러스가 출현하거나, 다시 대규모 유행이 생기지 않는 한 우리들의 일상은 조금씩 회복될 것으로 보입니다.

2년이 넘는 지난 세월 참으로 잘 견뎌 오셨습니다. 많이들 힘들어하고 지쳤던 시간들이지만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만들어 한걸음 더 나아가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하 예배당을 탈출하여 작지만 우리들의 예배 공간을 마련했고, 새롭게 시작한 온라인 선교를 통해 주님의 복음을 전국 각지에 전할 수 있었습니다. 기장 목회자 양성 후원 통장을 통해서 세 명의 전임 목회자와 한 분의 파트타임 목회자가 안정적으로 목회할 수 있는 구조를 정착시켰습니다. 코로나 자체를 종식 시킬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의 일상 회복이 가능해지면,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면서 다시금 주님의 사역들을 잘 감당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걸음 내딛는 진보가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시절에도 성숙으로 나아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는 것도 벅찬데,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결심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2년의 세월을 헛되게 보내지 않았고, 위기 가운데서도 나아갔기에 앞으로도 계속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때로 넘어지기도, 꺾이고 실망스러울 때도 있고, 한걸음 걷는 것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나아갈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문자적 이해를 넘어서]

오늘은 누구보다 먼저 모든 어둠과 죽음의 그늘을 뚫고 나아가셨던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절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다시 일으키셨다."는 선포는 초기부터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 메시지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께서 부활하신 일요일을 주님의 날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주일로 지킨다는 사실이 부활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평범한 대다수 교인들은 부활절 아침에 하나님께서 예수의 시신을 기적적으로 변화시켜서 무덤이 텅 비게 한 '물리적' 사건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부활절 아침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예수님이 묻히신 무덤 속을 촬영한다면 그 카메라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세마포를 푸시고 머리를 싸맸던 수건을 개켜서 한쪽에 두시는 장면이 담길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빈 무덤이야말로 예수 부활의 증거이고,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믿음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극복하시고 다시 사셨듯이,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죽음을 물리치고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내세의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교회는 부활의 믿음이야말로 다른 종교와 견줄 수 없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점이라고 강조해왔습니다. 부활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하시고(요한 20:27),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먹을 것이 좀 있느냐고 물으시면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시기도 하고(누가 24:36-43), 갈릴리 바닷가에서는 직접 제자들에게 아침상을 차려 주시기도 하는 모습(요한 21:1-14)을 통해 예수의 부활은 누구든 그 자리에 있다면 똑같이 경험했을 공적 사건이요, 역사적 사실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한편 성서의 어떤 본문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합니다. 요한복음서에서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요한 20장 14절), 누가복음서에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누가 24장 16절). 한편 요한복음서 20장 19-20절에 보면 제자들이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 자리에 홀연히 나타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또 앞서 말한 누가복음서에서 엠마오 마을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때는 홀연히 사라지시기도 합니다. 게다가 바울 사도는 부활해서 우리가 얻는 몸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몸이라고 말합니다. 즉 성서에 나온 빈 무덤 이야기와 예수님이 나타나신 장면들을 분석하면 죽음 이전의 예수님의 모습과 연속성을 띤 것도 있고, 반대로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또한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부활은 과연 무엇일까요? 만약 미래의 어느 날 예루살렘 언덕 어딘가에서 고고학자들이 예수님의 유골이라도 발견한다면 우리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부활 신앙은 끝장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라고 했던 것이 무너졌으니 그리스도교도 사라지고 말까요? 첫 제자들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부활절의 진실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부활을 이해하는 핵심은 부활절 아침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주목하면서 사실을 따져보며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첫 제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영원한 미궁 속으로 빠지게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지니는 의미는 명확하게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의 의미]

복음서가 말하는 부활, 그리고 다른 신약성서 문헌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했던 부활 신앙은 크게 두 가지 핵심적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첫 그리스도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의 유골이 발견되고, 무덤이 비어있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으며, 수많은 신앙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지금도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둘째 부활이 지니는 의미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진정으로 우리의 주님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우리에게 드러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경우, 예를 들어 가족이나 배우자, 소중한 친구를 잃은 사람 가운데 절반가량이 잃은 사람을 다시 생생하게 만나는 체험을 한 번쯤은 한다고 합니다. 그런 체험은 죽은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도 들 정도의 강렬한 체험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주님이나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 체험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다시 만난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한 명의 랍비가 아닙니다. 나사렛 청년, 목수의 아들이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나 지혜 교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온 우주의 주인이며,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십니다.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부활을 믿느냐?"라는 물음은 "누가 우리의 참된 주님인가? 무엇이 인생의 궁극적 의미이며 대답인가?"라는 물음으로 재서술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에게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이 주님으로 섬기며 사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가? "예수가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당시 예수를 처형한 로마 제국의 지배자들을 포함해서 이 세상의 모든 왕과 권력자들, 주인 행세 하는 것들이 이 세상을 주관하는 가장 권위 있는 세력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은 다른 모든 주인들, 지배자와 권력자들을 조직적으로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친구인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내가 보여주겠다. 죽인 다음에 지옥에 던질 권세를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예수님은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성전경비대에 의해 붙잡혀 가셨을 때, 전부 도망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세상 권력은 그만큼 막강하고 두려움을 자아내게 합니다. 일본이 우리를 지배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순사의 총칼 앞에 굴복했고,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섰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많은 국민과 시민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다릅니다.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합니다. 용기를 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두려워하면서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없앱니다.

부활 신앙이 이렇다면 "예수님이야말로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우리들은 오늘날 무엇을 거부하고 어떤 권력에 저항해야 하는 것일까요? 부활신앙이 단순히 내세의 영생을 확보하는 것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지금 우리 현재의 삶과 매우 무관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죽은 사람의 소생과 내세를 부정하는 합리적이고 현대적인 사람들에게는 어떤 설득력도 갖지 못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부활이 단순히 영생의 보장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언제든지 인간의 욕망, 무한히 살고 싶은 욕망의 투영으로만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우리가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모든 율법의 핵심 계명이 들어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세상 권력이나 돈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웃 중에서도 예수께서 친구 하셨던 이웃들,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문화적으로 소외되고 정치적으로 억압받으며 그래서 죄인으로까지 낙인찍혔던 이들, 종교문화적 정결법을 어긴다면서 배제당했던 모든 사람들을 아끼고 돌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하시고, 불의한 자에게도 햇빛을 비추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원수도 사랑하는 넓은 마음을 가지라고도 하셨습니다. 세상에 죄악이 가득할 때는, 착하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당하기 일쑤이고, 양심적으로 사는 이들이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주님의 부활을 믿는 이들은 진리와 정의를 외칩니다. 그래서 박해를 받는다면, 믿음의 형제자매들끼리라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고 깊은지를 보여주라고 하십니다.

예수가 주님이라는 고백은 결국은 사랑과 평화가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사랑 대신 혐오를 부추기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생명을 함부로 유린하는 세력과 싸우는 삶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모두가 함께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방해하는 모든 것과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자신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자기중심적 생각, 권력을 차지하고 자신들에게만 유리하도록 모든 것을 재편하려는 지배자들의 추악한 계획과 음모, 돈이면 다 된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사람과 모든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이 모두가 오늘날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는 우리가 저항하고 극복해야 할 것들입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 빛으로 나타나십시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을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낌없이 베푸시고 조건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 주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의 기자가 주님을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하는 말이 참 신기합니다. "복수하시는 하나님, 빛으로 나타나십시오!" 복수가 빛이 되는 때는 언제일까요? 그렇습니다. 불의한 세력이 물러가고 정의가 다시 세워질 때입니다. 부패한 세력들이 사라지고 진실한 사람들의 권리가 다시 회복될 때입니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투기하는 사람들, 사기 치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때입니다. 검찰이나 사법부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정당한 재판을 할 때입니다. 법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때에 참된 빛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사랑으로만 가득하고 그래서 서로를 용서하면서 화평하게 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정말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약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고, 법 위에 서서 제 맘대로 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치고 권력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착하고 선한 사람들을 억누르고 못살게 군다면, 그 거대한 권력자들의 카르텔 속에서 개개인들은 옴짝달싹 할 수 없다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도저히 그 일을 풀 수 없다면, 그래서 계속 피해자가 된다면 누가 이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있을까요? 이 사람 앞에서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을 들먹거리면서 다 용서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주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는 놈들을 벌하기 위해 복수하시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야 합니다.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고, 고아들을 살해하면서도 "주가 못 본다, 야곱의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한다."라고 비아냥대는 인간들을 벌하기 위해서 우리의 하나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는 어둠으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타나십니다. 복수가 원한의 앙갚음으로 계속되는 피의 복수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공의가 강같이 흐르게 하고, 정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위대한 영혼" 즉 마하트마라 불린 간디 선생은 국가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일곱 가지의 사회악'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富),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교육, 도덕 없는 상업,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입니다. 부활절 아침! 코로나를 뒤로 하고 일상을 회복해 가는 이 때에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진실과 아름다움, 선함이 부활하길 기원합니다. 원칙 있는 정치, 진실한 땀방울로 얻는 부유함, 모두 함께 즐기는 기쁨, 본이 되는 교육, 공정하고 정직한 상업, 사람과 생명을 생각하는 과학, 사랑과 희생으로 거룩함을 간직하는 종교를 부활시키는 일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성서에는 웃시야 왕이 등장합니다. 웃시야는 열 여섯 어린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의 곁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 주는 스가랴가 있었기에 아버지 아마샤의 뒤를 이어 올바른 정치를 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잘 따랐습니다. 그러나 훗날 웃시야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잘된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교만해져서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분향단에 자기 마음대로 들어갑니다. 법을 어기고, 율법 위에 자신을 세운 일로 인해 하나님의 벌을 받아 이마에 피부병이 생겨 죽을 때까지 고생을 합니다. 스가랴 같은 이가 계속 웃시야 곁에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모두 스가랴 같은 사람이 됩시다. 여러분 계신 곳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찾게 해 주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알려 주는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께서 빛으로 나타나실 수 있도록 저와 여러분이 매개자가 됩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빛이 되신 것처럼, 이제 우리 또한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람들에게 빛이 됩시다. 심판하시는 하나님도 빛으로 나타나시니, 우리 또한 언제 어디서나 빛으로 나타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죽음의 한계를 넘어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찬양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땅에서 이루어진 승리요, 우리에게는 희망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비치는 빛입니다. 이제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를 따라 세상 모든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하소서.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세상 끝 날까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고,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오직 주님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코로나 세계 대유행의 위기를 우리 모두가 극복해 가게 하신 은혜 감사 드립니다. 우리 생명사랑 신앙공동체의 지난 10년을 지켜 주시고,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하게 하시니 감사하고, 인내 속에서 다시 대면 예배를 재개할 수 있음에 감사 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사랑을 위하여 늘 기도하길 원합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새로운 물결 속에서 우리 모두가 지혜로운 방식으로 서로를 돌보게 하시고,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함께 나누게 하여 주소서. 영혼을 돌보고 내면을 풍성하게 하는 일에도 힘쓰게 하여 주소서. 어둠 속에 감춰진 빛을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주님의 은총을 부어 주시고, 우리의 사랑이 더욱 힘 있고 아름답게 피어나게 하소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전 삶과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며 주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이 하나님 나라 사역에 올바로 쓰이게 하소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계심을 믿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의 말이, 여러분의 행동이, 여러분의 삶이 모든 이들에게 빛으로 드러나게 하십시오.

* 축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거룩한 친교가 부활하신 예수를 따라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생명 사랑 교우들과 전국의 모든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어둔 그늘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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