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레위기 19:1-4, 에베소서 6:1-4, 마태복음 19:16-19
사람의 손가락은 왜 열 개일까요? 어느 시인은 사람의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 어머니 배 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함민복, <성선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의 문장이 전부인데, 그래도 시가 됩니다. 엉뚱한 생각이지만, 어머니의 은혜란 게 이렇게도 깊고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불러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천사는 급히 지상으로 내려가 사방을 살펴보았습니다. 가장 먼저 꽃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천사는 꽃들이 너무 아름다워 한 송이 꺾어 들고 길을 떠났습니다. 이번에는 방긋방긋 웃고 있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천사는 어린아이의 웃음 또한 너무 아름다워 그 웃음을 꺾어 들고 다시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기는 품에 안고 있는 엄마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눈에 띄어 마지막으로 엄마의 사랑을 손에 쥐고 다시 길을 걸었습니다. "이 세 가지만 들고 가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거야." 천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 보니 꽃은 시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버렸습니다. 조금 더 길을 가다 보니 이번에는 어린아이가 자라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웃음이 능글맞아졌습니다. 그래서 그것 또한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기를 안고 있던 엄마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엄마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갔다고 합니다. (정호승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중에서.)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신이 너무 바빠 인간에게 대신 어머니를 주셨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대신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로도 알려졌습니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모든 걸 직접 하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모든 곳에 계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이 말은 '어머니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인간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1서 4:16)라고 했습니다. 신약성서의 이 짧은 한 구절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가장 깊고 넓은 정의이며, 성서가 증언하는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구약성서도 하나님의 본성은 '헤세드'(hesed), 즉 '한결같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느끼기 어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잘 잡히지도 않아 그 사랑의 눈빛과 숨결을 느끼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십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라 구체이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라 구체입니다. 내 어머니는 내게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준 존재입니다.
성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으로 묘사합니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이니라"라고 입을 여는 이사야는,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자식]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이사야 4913-15)라고 위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모성에 비유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악으로 멸망해가는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우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게 보낸 예언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아 품으려 하였더냐!"(마태 23:37, 새번역)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참으로 모성(母性)은 주님을 닮았습니다! 주님의 품성(稟性)을 닮았습니다.
"나의 일곱 살 적 어머니는 / 하얀 목련꽃이셨다. / 눈부신 봄 한낮 적막하게 / 빈 집을 지키는, // 나의 열네 살 적 어머니는 / 연분홍 봉선화꽃이셨다. / 저무는 여름 하오 울 밑에서 / 눈물을 적시는, // 나의 스물한 살 적 어머니는 / 노오란 국화꽃이셨다. / 어두운 가을 저녁 홀로 / 등불을 켜 드는, // 그녀의 육신을 묻고 돌아선 / 나의 스물아홉 살, / 어머니는 이제 별이고 바람이셨다. / 내 이마에 잔잔히 흐르는 / 흰 구름이셨다."(오세영, <어머니>)
시인은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기까지의 일대기를 아름다운 꽃으로 그림처럼 그려놓았습니다. 어머니의 모습은 자식의 연령대에 따라 바뀝니다. 하얀 목련꽃에서 연분홍 봉선화꽃으로, 그리고 노오란 국화꽃으로. 하지만 시인은 스물아홉 젊디젊은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꽃이 아니라 별이고 바람이고, 잔잔히 흐르는 흰 구름입니다. 인간은 그를 낳아준 모친을 사랑합니다. 배 속에서부터 열 손가락을 셀 동안 은혜를 주신 분이시기에 일생 모친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간직하며 삽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기억은 자식의 일생을 지키는 등불이 됩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 시장에 간 우리 엄마 /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 아주 먼 옛날 /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 걱정>)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이렇게 자식도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그 차갑던 방구석의 윗목에서 눈시울을 뜨겁게 붉히며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의 모습이 지금은 예쁘게 느껴집니다. 누구에게나 유년의 기억은 오래갑니다. 아주 오랫동안 뇌리에 남습니다. 오래 남아 인생을 지배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추억이라 부릅니다. 추억은 하나의 힘이고 능력입니다. 정서의 힘이고 마음의 고향입니다. 살면서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인간은 그 추억의 힘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특히나 어머니와의 일들은 한 사람의 일생에서 힘이 되어줍니다.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어머니란 이름과 함께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인생의 등불이 되어줍니다.(나태주,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중에서.)
지난 코로나 3년, 제가 '코로나 효도'를 하고 있습니다. 학교 주요 보직을 맡아 하루에도 몇 개씩 중요 일정을 소화하느라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몇 달이고 찾아뵙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모든 일정이 취소되어 갑자기 '시간 부자'가 되었습니다. 지난 3년 저는 매 주일 꼬박꼬박 어머니를 찾아 드라이브시켜드리고, 맛있는 음식 사드리고, 집안에 필요한 물건들 쇼핑해서 꼭꼭 채워드립니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의 3분의 1만큼이라도 자식의 부모를 생각하면 그 자식은 '효자' 또는 '효녀'라고 하지요. 저는 3만분의 1도 어머니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코로나 효자'라는 말은 절대 못 하고 '코로나 효도'는 조금 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뵐 때마다 날로 쇠약해지시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매 주일 뵙고 재미나는 시간을 가지지만 헤어질 때마다 "아들아 잘 가"하며 아쉬워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미어집니다.
"세상일 바쁘다는 핑계로 / 자주 찾지 못한 고향 집 / 모처럼 찾아가니 / 늙으신 어머니 더욱 늙었고 / 몸집이 더욱 작아지셨다 / 그러나 모처럼 아들 만난 기쁨에 / 어머니 얼굴은 꽃송이 / 방글방글 웃으시는 달덩이 / 오래 당신 옆에 있지도 못하고 / 또다시 고향 집 떠나올 때 / 마루에서 내려 토방에서 내려 / 휠체어 타고 / 대문간 지나 바깥마당까지 나와서 / 아들을 바라보시는 어머니 / 아들이 어른 같고 어머니가 아이만 같아 / 마음 아프다 / 어머니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 아들의 인사말에 문득 아들아 잘 가 /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 어머니의 인사말 / 아들아 잘 가 / 그 인사말에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 네 어머니 다시 또 오겠습니다 / 어머니 뵈러 다시 오겠습니다 / ...... 이것이 영이별이라도 되는 것일까 / 어머니 말씀에 눈물이 솟아 / 무너지는 마음 / 네 어머니 네 어머니 /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어머니 뵈러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나태주, <아들아 잘 가>) 살아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손잡아 주십시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던 한 청년이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두 눈을 잃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위로와 간호에도 불구하고 깊은 상실감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쪽 눈을 기증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크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두 눈을 다 기증받아 예전과 같아지기를 고대했기 때문입니다. "얘야, 한쪽이라도 어떠냐. 그래도 수술을 받으려무나." 청년은 어머니의 간청에 못 이겨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붕대를 풀던 날, 왈칵 울음을 쏟아냈습니다. 어머니의 한쪽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이 다음에 앞 못 보는 어미를 네가 돌아보아야 할 걸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단다."
모성(母性)이란 이렇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이가 바로 어머니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풍성을 닮았습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의 희생을 닮았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한 1:18) 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새번역)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손과 발에 못을 박는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몸을 입고 오신 성자(聖子) 하나님을 통해 성부(聖父)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고 구체이듯이 하나님이 사랑 또한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고 구체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고 구체이듯이 하나님의 사랑 또한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내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 어머니는 내게 하나님이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깨닫게 해준 은총의 존재입니다.
어버이 주일인데도 제가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서만 말씀드리니 아버지들은 조금 서운하실 듯합니다. 우리나라에서 1956년에 제정된 '어머니의 날'이 '어버이의 날'로 개칭된 것은 1973년부터이지요. 어머니들을 위한 잔치에 아버지들을 끼워준 형국입니다. 저도 두 아이의 아버지이지만 제 아내가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의 3분의 1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연탄장수 울 아비 / 국화빵 한 무더기 가슴에 품고 / 행여 식을까 봐 / 월산동 까치고개 숨차게 넘었나니 / 어린 자식 생각나 걷고 뛰고 넘었나니 / 오늘은 내가 삼십 년 전 울 아비 되어 / 햄버거 하나 달랑 들고도 / 마음부터 급하구나 / 허이 그 녀석 잠이나 안 들었는지." (오봉옥, <아비>)
한 가수(신재창)가 노래로도 불러 유명해진 시입니다. 처음 아버지는 연탄장수를 하면서 국화빵 한 봉지를 사 들고 까치고개를 넘어오던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의 아들이 자라 다시 아버지가 되어 이번에는 자기 아들에게 줄 햄버거를 사 들고 밤늦게 귀가합니다. 요즘 같은 배달이 없던 때입니다. 시는 가난해야 나오나봅니다. 자식이 잠들어 못 먹을까 아비의 마음은 초조합니다. 눈물겹지만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아버지들로 해서 세상은 아직 망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태주,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중에서.)
"바쁜 사람들도 / 굳센 사람들도 /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 어린것들을 위하여 / 난로에 불을 피우고 /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 세상이 시끄러우면 /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 어린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김현승, <아버지의 마음>)
세상에 이보다 더 힘찬 아버지 찬가나 응원이 있을까요. 항상 강하고 힘 있는 것 같으나 속으로 한없이 나약한 남자 어른. 우리를 그를 때로 '아버지'라 부릅니다. 무슨 일이든 앞장서야 하고 어떤 일이든 유능해야 하며 언제든 참아야 하고 또 무슨 문제든 해결해야 하는 사람... 그는 속으로는 울고 있는 사람이고 돌아서서는 한숨을 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이런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태주,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중에서.)
누군가 "자기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게 더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인생을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따져 보면 이 땅의 아버지들은 지난 긴 세월 동안 넘어지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지금도 꿋꿋하게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한 것일 겁니다. '나무 의사' 우종영 선생은 그런 모습이 마치 태백의 소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태백에서 제천에 있는 길에는 소나무 군락지가 있는데 한 그루 한 그루마다 모진 비바람과 강추위를 견뎌낸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합니다. 대부분의 나뭇가지는 거센 바람에 맞서느라 휘어져 있고, 어떤 나무는 뿌리가 허옇게 드러나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소나무만의 푸르름만큼은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 혼자 살기도 벅찬 세상에서 가족을 등에 업고 세월의 굴곡들을 넘어 지금에 이른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은, 긴 세월의 시련을 견딘 후 바위에 굳건히 자리 잡은 소나무와 같습니다.
예전에 어떤 신문에서 '고개 숙인 오십 대'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냉혹한 구조 조정으로 직장을 잃은 중년층이 거리를 떠돈다는 기사와 함께 한적한 공원 벤치에 고개 숙이고 힘없이 앉아 있는 한 중년 남성의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며 마음속에 울컥하고 무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들은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굶주린 채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것을 탓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 땀 흘려 노력해 가정을 이룬 후, 그 가정을 지키기 위해 흰 머리가 성성할 때까지 앞만 보고 뛰어왔습니다.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 아버지들을 고개를 숙이게 만든단 말입니까. (우종영,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중에서.)
구약성서 레위기 19장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규례와 법도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9:1-3) 수많은 규례와 법도 가운데 맨 처음의 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심 같이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에 이어진 두 번째로 중요한 규례와 법도는 부모를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보다 먼저 나왔습니다.
구약성서의 잠언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입니다.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잠언 1:1-4)입니다. 솔로몬의 잠언의 첫 번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언 7) 그런데 이에 이어 제시된, 두 번째로 중요한 잠언은 부모 공경입니다. "내 아들[과 딸]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잠언 1:8-9) 이렇게 성서는 부모공경을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신약성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에베소서 6:1-3) 지금 바울은 십계명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구약성서 중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 두 곳에 나오는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은 바울의 말대로 "약속이 있는 첫 계명"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애굽기 20:12)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주신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명기 5:16)라고 약속합니다. 보십시오. 바울의 말대로 성서에서 부모 공경에는 '장수'(長壽)와 '형통'(亨通)이라는 두 개의 축복과 언약이 딸려 있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무슨 복을 주시는가 기대하십시오.
오늘의 폐회찬송은 지금의 찬송가 책에 없는 찬송입니다. 고(故) 윤춘병 목사님 작사, 고(故) 박재훈 목사님 작곡의 '어머님 은혜'입니다. 작사자 윤춘병 목사님(1918-2010)이 이 곡의 가사가 된 시를 쓰게 된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습니다. 평안남도 중화군이 고향인 그는 1945년 해방 직후 월남했고, 이후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맬 때 북에 있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졌습니다.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 때 더욱 깊어지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한숨에 써 내려간 시가 바로 '어머님 은혜'입니다.
윤목사님은 살아생전 인터뷰에서, "고향을 떠나던 날 어머니가 우시면서 '이제 가면 언제 오냐'라고 하셨던 기억이 아른거렸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기억 속에 창밖을 떠가는 구름을 보다가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라는 시상(詩想)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걸 내려 적어 사랑의 어머님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를 쓰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노래에는 지금은 사라진 3절 가사가 있었습니다. "산이라도 바다라도 따를 수 없는 / 어머님의 그 사랑 거룩한 사랑 / 날마다 주님 앞에 감사드리자 / 사랑의 어머님을 주신 은혜를." 박재훈 목사님(1922-2021)의 작곡으로 날개를 단 윤충병 목사님의 시는 1948년에 출판된 동요집 「산난초」에 실렸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이 곡은 1953년 <어린이 찬송가> 제99장에 실렸습니다.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자 어른들의 인기를 끌었던 이 찬송은 뛰어난 가사와 작곡 때문에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 '국민노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작사자의 신앙고백을 담은 제3절은 '종교적'이라는 이유로 삭제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노래를 끝까지 다 불러야 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너무 바빠 대신 어머니를 주셨다고 합니다. 모든 곳에 계실 수가 없어서 대신 어머니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신 하나님께서 뭐가 바쁘시고 부족하셔서 그러셨겠습니까. 어머니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십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구체입니다. 내 어머니는 내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깨닫게 해주신 은총의 존재입니다. 오늘은 그런 '사랑의 어머니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오늘만이 아니고 매일 그렇게 합시다. 가까이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뵙고, 손잡아 드리고, 엎어드리십시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첫 계명"입니다. 이로써 여러분이 반드시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