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이사야 57:15-18, 야고보 1:13-17, 누가복음 12:13-15
사람에게는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스피노자는 이를 '공간 공포'라고 불렀습니다.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은 어떻게든 자기를 채우려 합니다. 자신이 혹은 타인이 욕망하는 것으로 자기의 빈 공간을 채워야 만족합니다. 현대 소비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이 빈 공간을 채우라고 욕망을 부추기고 불안을 조장합니다.
온갖 음식이 차려져 있는 '뷔페'에 가면 마음이 '부패'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합니다. 이 음식 저 음식 보다 보면 욕심이 생겨 많이 먹게 됩니다. 그냥 지나친 코스가 못내 아쉽고, 다른 사람이 먹고 있는 걸 보면 왠지 나도 먹고 싶어집니다. 사람이 과식이나 폭식을 하게 되는 이유는 굶주림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안에 잠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언제 굶게 될지 모르니 기회가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먹어두어야 합니다. 이 역시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위장의 비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니까요. 사람은 정신적 허기와 몸의 허기에 늘 시달립니다. 인간은 언제 '만족'할 수 있을까요?
어느 재미교포가 쓴 글을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모국을 방문하고 느낀 소감을 적을 글인데, 개인적인 의견이니 다 동의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한 관점을 주는 것 같아 요약해 소개해봅니다. "한국에 와 보니 웬만한 동네는 모두 고층 아파트가 되어있다. 가정집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중화장실에도 미국에서는 부자들만 쓰는 비데가 설치되었고 주차 티켓을 뽑는 그런 촌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고 우아하게 자동인식으로 주차장에 들어간다. 모든 대중교통은 카드 하나로 해결되고 집에서 앉아 ... 햄버거를 배달시켜 먹고 어느 집을 가도 요즘은 비밀번호나 카드 하나로 모든 문을 열고 들어간다... 차마다 블랙박스가 달려있고 방문하는 집마다... 전등은 LED이며 가스, 전등, 심지어 콘센트도... 리모컨으로 켜고 끈다. 미국에서 나름대로 부자 동네에서 살아온 나도 집마다 구석구석 박혀 있는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운 제품들에 놀라고 부러워하며 마치 예전에 일본제 제품들을 보는 듯한 신기함에 빠지고 내 삶은 마치 20~30년은 과거에 살다 온 느낌이 든다. 오늘도 너무나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창문을 열면서 우리 집의 뻑뻑거리며 자주 레일을 벗어나는 문을 이렇게 바꾸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러움으로 괜히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해본다. 집집마다 수십 개의 스포츠 채널을 포함, 끝없는 채널이 나오고 가는 곳마다 즉 지하철, 고속철도, 음식점, 상점가, 심지어는 버스정류장에서도 자동으로 초고속 와이파이가 잡힌다. 역마다 정류장마다 몇 분 후에 내가 기다리는 차가 온다는 정보도 뜨니 옛날처럼 도로를 쳐다보며 버스를 놓칠까 염려하는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에겐 '평범한' 것들이 이분에겐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글은 이어집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에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토로한다. 전셋값이 얼마나 비싼지, 정치는 얼마나 헛짓을 하는지, 아이들을 교육하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지옥에 살고 있다고 모두들 아우성이다... 같은 가격이면서 우리 집보다 방은 두 배 많고 연이자도 2%대인 모기지를 가진 한국에서 전세라는 훌륭한 제도를 통해 매달 이자를 안 내고 살 수도 있는 이곳 사람들이 오늘도 모기지로 매달 3~4천 불을 내며 미국에 사는 우리들보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연봉이 나보다 반이나 적은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차를 몰고 더 비싼 걸 먹고 더 편리하고 더 고급스러운 제품이 가득한 삶을 살면서도 만족스럽지 않은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의료보험은 열 배나 싸고 치료비도 열 배 싸게 느껴지는 이곳에서 같은 10불짜리 밥을 먹어도 팁이 없어서 늘 몇 프로 할인받는 느낌인 이곳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느끼는 삶이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참 신기하다." 여기 사는 사람들도 사실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거기까진 다 보지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한편 우리의 모습을 비춰줍니다. 이 글을 이 재미교포는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한민족은 5천 년을 배고프게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쌀이 넘쳐나 저장할 창고가 없다... 각종 먹거리가 산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비만]이 늘어나고 당뇨와 혈압 환자가 줄을 잇는다. 세상은 이렇게 풍요로운데 왜 우리는 바쁘고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운가? 더 많이 소유하고 싶고 남보다 더 앞서고 싶은 욕구를 이루지 못한 불만 때문[은] 아닐까?... 냉장고를 두세 개 가지고... 편하고 고급스러운 집에서 살면서도 만족을 모르고 가난과 위기를 노래하게 된 내 조국, 이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안식과 평안이 있기를 기도한다."
구약성서 전도서 6:3에,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 명의 자녀를 낳았다면 얼마나 건강하고 부유했겠습니까. 하지만 자손의 축복도 또 장수라는 행복도 궁극적인 만족이 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신약성서 야고보서 1:13-15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말하면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시험과 유혹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고 사람 스스로 자기의 욕망을 이기지 못해 시험과 유혹을 불러온다는 말입니다. 나의 그 욕망이 죄를 짓고 그 죄가 죽음으로 이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탐욕을 가장 경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경고한 야고보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야고보 1:16-17) 무엇에 속지 말라는 말일까요? 내 욕망이 언젠가는 만족을 줄 거라도 스스로 속이지 말하는 말입니다. 터진 주머니와 같은 탐욕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고 결국 나를 죄와 사망의 길로 이끕니다. 대신 저 빛들을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위에서 내려오는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새번역)를 바라보라고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흙과 물과 공기와 지구라는 선물을 받고 삽니다. 흙에서 왔다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인 인간은 살아도 백 년을 채 살지 못하지만 분에 넘치는 은혜로 살아갑니다. 성서를 보니 하나님께서 땅에 복을 베푸시어 "햇빛을 받아 익은 온갖 곡식과 달빛을 받아 자라나는 온갖 과실이... 땅에 풍성"(신명기 33:14-16, 새번역)하다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로 살아간다는 고백이 사실 신앙심입니다. 내가 직접 재배한 농산물도, 내가 직접 만든 공산품도, 내가 직접 짜낸 아이디어도 모두 나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겸손이 바로 신앙심입니다.
한 유명한 화가가 멋진 산과 물을 그린 풍경화를 경매에 부쳤습니다. 큰 액수에 낙찰이 끝나고 돈을 챙겨 떠나는 화가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왜 돈을 다 챙겨서 가시오?" 화가는 어이가 없어 "내가 직접, 나 혼자 그린 내 그림을 판 돈인데, 내가 다 가져가는 게 뭐가 문제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게 진짜 100% 당신 것이 맞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물론 당신이 그린 것은 맞소. 하지만 그림 안의 수많은 나무는 다 당신이 심은 것이요? 그림 안에 흐르는 아름다운 물은 당신이 틀어놨소? 물이 깨끗해 보이던데 물이 저렇게 맑도록 쓰레기 하나라도 청소해 봤소?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그럼 당신이 그림을 그린 저 만 원짜리 종이는 당신이 만들었소? 붓은? 물감은? 정당한 돈을 내고 샀다고요? 좋소. 그럼 내가 그 돈을 줄 테니 그렇게 만들어보시오!"(백영민, 『지구정원사 가치 사전』 중에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림 중 화가의 몫은 전체의 작은 부분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자연을 창조하셔서 아름다운 나무들이 자라고 맑은 물이 흐르게 하셨으며, 누군가는 오랫동안 그 나무들을 가꾸고 물을 정화했을 겁니다. 또 누군가는 종이를 발명했고, 다른 누군가는 붓과 물감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과연 그 화가가 자신의 그림을 오로지 '내 것'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정당하게 획득한 것도 '내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라고 말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바울도 자기가 온갖 박해와 훼방 속에 고생을 하며 세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으니...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린도전서 3:6-7) 이 겸손이, 이 '자기 비움'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빌립보서 2장의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는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빌립보서 2:6, 새번역) 자기를 비우셨다고 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영광을 누릴 수 있지만, 그 영광을 포기하고 자신을 비워 종의 모습을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비움을 성서에서는 그리스어 '케노시스'(kenosis)라고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비우고 낮춰서 '아무런 명성 없는 존재'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의 원리를 인간이 따를 때 참 평화와 안식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탐심으로 가득한 자기의 내면을 비워 그 안에 하나님을 모실 때 참된 만족과 평안 있으며, 그때 비소서 인간은 자기 안에 타인을, 이웃을 초대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람에게는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어떻게든 무언가로 자기의 내면을 채우려 합니다. 하지만 생명의 하나님으로 그 공간을 채우지 않으니 자기의 욕심에 스스로 미혹되어 죄와 사망의 길에 이릅니다. 인간의 탐심은 아무리 마셔도 짜디짠 바닷물과 같아 갈증은 더 심해집니다. 내 영혼에 참 평화와 안식이 없고 내 이웃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나는 영원히 만족을 모릅니다. 내 영혼이 피폐해지고 결국 사망에 이릅니다.
성서는 진정한 만족이, 참 만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린도후서 3:5)라고 했습니다. 한 시편 기자는 "나는 의로운 주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편 17:15) 했습니다. 다른 시편 기자는 아침에 돋아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는 풀과 같은 인생을 바라보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헤세드, 한결같은 사랑]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 90:14)라고 청원합니다. 오늘의 교독문에서 만난 시편 기자는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라고 노래하면서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내가]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시편 63:3-5)라고 찬양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폭삭 망한 상황에서도 하박국은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기뻐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민족의 패망 이후에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예루살렘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그 위로하는 품에서 [너희가] 만족하겠고...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이사야 66:10-13)라고 희망을 예언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에게는 감사가 절로 넘칠 것입니다. 작은 것에서도 큰 감사를 느낄 것입니다. 최용우 시인의 <기쁨>이 이 신비한 신앙의 경지를 노래합니다. "주님 / 살아 있어서 기쁩니다. / 숨쉴 수 있어 기쁩니다. / 아침밥 주셔서 기쁩니다. / 쓸 물 주셔서 기쁩니다. / 가족을 주셔서 기쁩니다. / 맑은 공기 주셔서 기쁩니다. / 소리를 듣게 하셔서 기쁩니다. / 차 한 잔 너무 기쁩니다 // 주님! / 버스를 타게 해주셔서 기쁩니다. / 손에 책 한 권 들려주심 기쁩니다. / 넘어져도 기쁩니다. / 사기를 당했어도 기쁩니다. / 손해를 봤지만 기쁩니다. / 세상 모든 일이 다 기쁩니다. / 주님이 제 옆에 계시기만 하면 / 저는 기쁘고 또 기쁩니다." 시인은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노래한 하박국 선지자처럼 "주님이 제 옆에 계시기만 하면 / 저는 기쁘고 또 기쁩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족(自足)의 영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영이 내 영혼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우게 해달라고 청원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고 비우는 것입니다. 무얼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우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불평하는 게 아니라 있는 것에 감사하는 게 기도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행복이 무엇입니까? 만족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언제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습니까? 나태주 시인은 <행복>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언제나처럼 간결하게 하지만 묵직하게 행복이 무엇인지 이렇게 말합니다. "저녁 때 /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 힘들 때 /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 외로울 때 /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이 시를 읽으며 저는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내가 행복한 사람이란 걸 알았습니다. 오늘 일과를 마치고 저에게는 돌아가 쉴 집이 있습니다. 힘들 때 다행히 마음속으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역시 종종 외로움을 타는데, 그때마다 혼자 잘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참 행복한 사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달라이 라마도 이렇게 말했지요.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입니다. 그 만족이 우리에게 행복을 약속합니다." 세상 모든 걸 다 빼앗겨도 "주님이 제 옆에 계시기만 하면 / 저는 기쁘고 또 기쁩니다"라고 여러분은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합니까?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우리가 이전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3절, 새번역)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4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의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8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우리에게 바울은 이렇게 간곡히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생명]을 얻었으니...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갈라디아서 5:16-24, 새번역)
그렇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갈라디아서 2:20)이라 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탐욕과 집착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내 안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사셔야 합니다. 나를 미혹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욕망이 아니라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셔야 합니다. 내 안의 빈 공간을 그로 채워야 합니다. 내 영혼의 허기를 그의 은혜로 채워야 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겸손히 자기를 비우심으로 오히려 "만유 안에"(골로새서 3:11) 충만하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풍요 속에서도 만족을 모르고 영원히 불행하고 목마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짜 안식과 평안이 임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3, 새번역)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온갖 탐욕을 멀리하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누가복음 12:15, 새번역)라고 주님께서 깨우쳐주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야고보 1:16-17)라고 했습니다. 탐욕을 비울 때 하늘이 열립니다. 오직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을 때 내 영혼 만족하고 참 평안 얻습니다. 오늘 육신의 허기와 영혼의 허기로 슬프고 아프고 우울하고 답답한 모든 분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며]"(빌립보서 4:10)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야고보 1:5)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과 평화가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