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생명을 위한 싸움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담임)

hanmoonduck
(Photo : ⓒ생명사랑교회 홈페이지(https://www.agapao-zoe.com))
▲생명사람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출애굽기 1장 8-22절

설교문

[살아남기]

제가 나이는 얼마 먹지 않았지만, 지난 50년의 세월 동안 저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면 하늘이 주신 생명을 온전하게 잘 누리는 것도 참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은 언제나 죽음의 위협으로 가득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처럼 과학 문명이 발달되지 않았던 고대에는 온갖 자연재해와 맹금류들의 공격 속에서, 또 다양한 질병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숱하게 많은 이들이 죽음을 겪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호환(虎患) 마마(媽媽)와 같은 것은 없지만, 아직도 인류는 여전히 많은 질병에 노출되어 있고, 기후재앙으로 인해 대규모의 해를 입고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 한해에 3,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교통사고로 죽고, 산업재해와 10.29 참사와 같은 인재에 의해서도 매일 죽음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또 우리 인생은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육체의 죽음 외에도 사회적 죽음, 심리적 죽음, 종교적 죽음을 겪습니다. 흔히 학교 폭력을 다루는 영화에 자주 등장하고, 실제로 우리 사회의 매우 심각한 문제로 늘 떠오르는 왕따 같은 집단 따돌림의 경우, 피해자는 사회적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점점 복잡해지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잘 적응하지 못할 때,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몰려오거나, 쉬지도 못하면서 무거운 책임들을 져야 할 때, 사람들은 심리적 죽음을 겪습니다. 자신이 믿고 우러르는 신에게 기도할 수 없고, 오래도록 지켜온 종교적 신념이 훼손당할 때 종교인들은 죽음과 맞먹는 고통에 이르게 됩니다.

아이를 낳고 길러 성인이 될 때까지, 또 성인이 된 이후에도 수많은 사건 사고 속에서 이런 모든 어려움과 죽음의 위험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온갖 위협에 맞서 머리를 써가며 손발을 놀려가며 지금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격려의 박수를 쳐 주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출애굽기의 본문 또한 죽음의 세력에 맞서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저는 이 본문을 가지고 하늘이 주신 생명을 다 누리고 죽음에 이르는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폭력과 억압 속에서 늘 죽임을 당해야 했고 죽음의 위협을 느꼈던 이들의 고귀한 싸움과 생명을 지켜내는 법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번성과 파라오의 두려움]

우리는 창세기의 후반부를 통해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어떻게 애굽 땅에 정착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과 그의 형제와 그 시대 사람들은 다 죽었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애굽 땅 전역에 퍼지게 됩니다. "너의 자손이 별처럼 많아질 것"(창 15:5)이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이 애굽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치적을 알지 못했던 새로운 왕이 애굽을 다스리게 되자 이스라엘 자손에게 큰 고난이 닥쳐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애굽 왕 바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수도 많고, 힘도 강하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신중히 대처하여야 한다." 이 말에는 두려움이 잔뜩 묻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가장 상처받는 지점이 바로 그 사람이 가장 욕망하는 지점인데, 바로의 이 짧은 한 마디 속에서 바로가 얼마나 많은 숫자와 강력한 힘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이 한마디 속에는 실제 애굽의 역사가 간직되어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왕조는 가나안과 빈번한 왕래를 해 왔습니다. 중왕국(11-12 왕조, B.C.E. 2060년 ~ B.C.E. 1782년)이 쇠퇴한 후 혼란기에 이집트 동부 나일 삼각주 지역에 가나안에서 온 셈족을 비롯하여 이민족이 급증하였습니다. 기원전 1720년경 이 이민족들은 아바리스(Avaris)에 수도를 정하고 15-16왕조를 창건합니다.(기원전 1663년 ~ 기원전 1555년) 이 시대를 힉소스 시대라고 합니다.

'외국인 지배자'라는 뜻의 힉소스(Hyksos) 또는 히스코스는 셈족이 중심을 이뤘고, 하이집트와 중이집트를 약 108년 동안 통치합니다. 이 사건은 이집트 사람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고, 이방 종족에 대한 날카로운 경계심을 갖게 만듭니다. 따라서 아시아와 연결되는 동부의 삼각주는 늘 경계 대상 1호였는데, 바로 거기가 이스라엘 후손이 모여 살던 고센 지역이었습니다.

빅 히스토리(big history)의 관점에서 현재 지구상에 거하는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가 해 온 일들을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인류는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지구를 지배하는 능력을 엄청나게 확장 시켜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말과 글을 만든 인류는 경험에서 얻은 정보를 축적할 수 있었고, 그것은 곧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자연을 이해하면서 그것을 이용하여 주변 환경을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바꾸었습니다.

인간의 자연 지배는 곧 인간 사이의 지배로도 나타납니다. 둘 이상이 모이면 힘의 관계가 발생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을 물리치고 지구의 주인이 된 호모 사피엔스는 협력의 중요성을 알고 또 협동할 줄도 알았지만, 둘 이상 모인 공간에서 발생하는 힘의 관계를 처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가난한 유목민의 한 사람이었던 요셉이 애굽이라는 대 제국의 총리였던 시절, 제국의 힘은 적절하게 관리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애굽에 발을 붙인 야곱의 일가는 총리인 요셉의 그늘 아래에서 생존을 보장받고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숫자가 불어나자, 애굽의 왕은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바로의 두려움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만물,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서 드러나고 발생하는 힘의 관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가 생명의 보존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바로는 지금 이 사태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수도 많고, 힘도 강하다." 바로는 수도 많고 힘도 강한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협력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공포심에 사로잡힙니다. 첫째 두려움은 반역에 대한 두려움이고, 두번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변의 다른 족속들과 연합하여 자신들을 치고 떠나가게 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숫자가 불어난 이들이 떠나가면 애굽을 떠받치고 있던 하부경제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애굽과 이스라엘은 함께 상생하며 공존하며 잘 살고 있었음에도 과거 힉소스 시대 전쟁의 아픔과 식민지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바로는 강제노동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힘의 문제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둘 이상이 모여 살면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힘의 역학 관계는 실로 모든 공동체와 사회가 풀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문제입니다. 둘 이상의 구성원들이 한마음이 되어 협력해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있고, 내 편 네 편 나누고 어느 한 편이 힘의 우위를 내세워 다른 편을 지배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하나 된 부부 사이도 가끔씩 틀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보통 사랑이 아닌 힘이 작동합니다.

어쩌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한 부류는 힘을 사랑하는 자이고, 다른 한 부류는 사랑의 힘을 가진 자입니다. 힘을 사랑하는 자는 다른 이들을 지배하려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힘을 가진 자는 모든 사람을 품으려 합니다. 힘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보다 강한 힘을 가진 자가 나타날까 두려움에 떱니다. 그러나 사랑의 힘을 가진 자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요일 4:18)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애굽의 권력자 바로는 힘을 사랑하는 자였고, 자신의 지배권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고된 노동을 부과하는 억압정책을 통해 이중의 효과를 노립니다. 이민족 인구증가를 막으면서 동시에 자신들에게 필요한 성읍의 건축을 완성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 왕의 간계는 먹혀들지 않습니다. 왕의 도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응전을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강제노동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몸을 지치게 하여 무기력한 삶을 불러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강제노동은 인간의 존엄성을 잊게 합니다. 죽음의 그늘 골짜기에서 그저 목숨만 부지한 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민중과 민초들을 받쳐주는 하나님의 힘으로 이들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처럼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보고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가 곡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설하는 일에 끌려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그 수가 더욱 불어나고, 자손이 번성하였다." 일의 강도를 높이고 혹독하게 몰아쳤음에도 어떤 효과를 보지 못하자 이제 바로는 히브리 산파들을 불러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 힘과 힘이 맞부딪히고 힘의 우위를 다투며 경쟁하는 것 끝에는 언제나 전쟁과 살육, 생명에 대한 위협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주인과 노예 변증법: 죽이는 힘이 살리는 생명을 이길 수는 없다.]

이제 성경은 바로와 히브리 산파들의 대결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여러 면에서 서로 대치가 됩니다. 이집트 왕은 대제국의 최고 권력자요, 자유인이고, 남성입니다. 반면에 산파들은 하층민을 상징하는 히브리인이요, 노예이고, 여성입니다. 한쪽은 강자이며 다른 한쪽은 약자입니다. 힘의 논리에서 보자면 이 대결의 결과는 불 보듯 뻔합니다. 강자인 바로의 승리로 끝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렇게만 흘러가지 않습니다.

힘센 군주인 이집트 왕은 약자인 히브리 산파들에게 히브리 여인이 낳은 아이가 아들이거든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히브리 가족의 대를 끊으려는 이집트 왕의 의도를 잘 보여 주고 있는데, 히브리 산파는 바로의 명령을 거역하고 남자 아이들을 살립니다.

대제국을 다스려 신으로 떠받들어지던 이집트 왕의 명령을 어긴 히브리 산파들이 절대 권력자 앞에 불려 나갑니다. 화가 치밀어 오른 바로는 소리칩니다. "어찌하여 일을 이렇게 하였느냐? 어찌하여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느냐?" 이집트 왕은 두 번이나 연속해서 "어찌하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의 분노를, 다른 한편으로 바로가 무척 당황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말 한마디로 되지 않는 일이 없던 바로가 처음 당했던 패배 또는 실패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산파가 바로의 명령을 거역하였다는 것은 당대의 상식을 뒤집는 것이었고,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산파들은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우선 왕의 명령이 비상식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잘 태어나도록 도와주는 산파들에게 산모를 돕는 척하면서 아이가 태어날 때 죽여 버리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을 들었던 산파들은 아마 매우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입니다. 딜레마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를 죽이면 산파라고 하는 자신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그렇게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래나 저래나 죽는 것입니다. 아이를 죽이고 살아남았다고 한들 그 삶이 산파로서의 삶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파들은 아이를 살리기로 결정합니다.

힘으로 모든 것이 다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늘 이 산파의 결정에 주목해야 합니다. 절대 힘으로 열 수 없는 문이 있습니다. 마음의 문입니다. 힘으로 어떤 사람을 꺾을 수 있고, 심지어 그를 죽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독재자들이 결국 몰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해 왕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제국의 왕 바로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부릴 수 있는 주인의 자리에 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은 주인이 시키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종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삶은 종과 노예의 노동에 의지해서 이루어집니다. 주인은 자연을 이용해서 삶을 영위하는 노동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대신 노예가 한 노동의 결과를 향유 할 뿐입니다.

그런데 노예는 주인을 섬길 뿐만 아니라 노동을 통해 자연과도 맞대면해야 합니다. 노예는 주인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율성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또 자신은 자연과 사물들을 가공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자신의 장점도 찾으며 정체성도 형성합니다. 한편 주인은 자기 마음대로 종을 부릴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에 대해 무지하게 됨으로써 결국 노예의 노동에 종속되고 맙니다. 즉 주인은 노예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나 이제 자연을 가공할 힘을 가지고, 주인도 살필 수 있는 노예나 종은 훨씬 더 큰 자유와 힘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주인은 노예가 되고, 종은 주인이 되는 역전 현상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모든 돌봄의 노동을 종이나 백성에게 맡기고 지배하려는 자는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순간 도리어 어떤 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고, 그래서 반드시 독재 권력과 제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하려는 정치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오늘 산파들이 아기들을 살린 것을 두고 성경은 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산파들은 만 사람의 찬사와 비난보다, 애굽의 최고 권력자의 서슬 퍼런 호령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한 분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산파들은 만 사람의 사랑을 구하기보다 하나님 한 분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구약 전통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지혜가 솟아나는 발원지입니다.

산파들이 애굽 왕에게 대답하는 것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이 답변은 노동으로 단련된 히브리 여성들의 건강함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애굽 역사와 전통이 존중하던 지혜를 애굽 왕이 어기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건강한 여성들이 쉽게 아이를 출산하는 것이 애굽의 지혜가 말하던 우주의 질서인데, 도리어 애굽 왕이 그것을 인위적으로 막음으로써 애굽 전통의 지혜를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산파의 지혜로운 불복종은 파라오의 입을 막아 버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를 만방에 드러냅니다.

산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바로 앞에서도 침착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침착할 수 있고, 차분하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죄를 지어 처벌로 감옥에 있는 독방에 가야 한다고 해 봅시다. 첫째 방에는 최고의 칼잡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 방에는 한달 동안 굶주린 사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방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연기로 가득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 방 중에서 어떤 방을 택하시겠습니까? 첫째 방을 선택하는 사람은 비교적 사교성이 좋은 사람입니다. 칼잡이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셋째 방을 택한 사람은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연기가 자욱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1번 방이나 3번 방을 택합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택하셨습니까?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살아나올 확률이 가장 높은 방은 두 번째 방입니다. 왜냐하면 사자가 한 달이나 굶었기에 다른 동물이나 사람을 잡아먹을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방을 택하려면 흥분된 마음,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속에서 이런 여유를 지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산파들은 이런 여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악을 행하는 것도 혼자서는 못합니다. 악이 성공하는 이유는 적극적으로 공모하는 자들이 있고, 침묵으로 동조하는 자, 자신의 일이 아니라며 방관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산파들은 바로의 살인 명령에 따르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저항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이들은 "십브라"와 "브아"입니다. 성서에는 애굽의 왕 바로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바로라는 말은 임금이나 왕을 뜻하는 말일 뿐입니다. 성서는 바로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밑바닥이요 하층 계급을 뜻하는 히브리 여인의 이름 "십브라"와 "브아"는 기억합니다. 출애굽의 역사 속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은 모세를 주로 기억하지만, 우리 생명사랑교회 교인들은 출애굽 역사가 십브라와 브아에서 시작하였고,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과 누이 미리암과 애굽의 공주로 이어져서, 미리암의 노래로 결말을 맺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의 역사에서 생명을 살리는 여인들의 공로가 이렇게 큰 것을 알았다면 바로는 딸들은 살리고 아들들은 죽이라고 명령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의 명령을 내렸어야 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의 이름을 기억합니까? 독재자 박정희, 광주 학살의 주역인 전두환 노태우를 기억합니까? 아니면 독재 정권과 맞서 싸웠던 청년들의 이름, 민주 열사들의 이름을 기억합니까? "십브라"는 히브리어로 '쉬프라'인데 '아름답게 하다'라는 뜻의 '샤파르'에서 나온 것이고, "브아"는 히브리어로 '푸아'인데, '빛나다'라는 '야파'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우리 인생을 진정 아름답고 빛나게 합니까? 남을 지배하는 힘입니까? 아니면 생명을 살리는 사랑입니까? 여러분! 힘을 숭배하지 마십시오. 힘 앞에 무릎 꿇지 마시기 바랍니다. 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의 힘을 가진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 산파들에게 보기 좋게 당하고 만 파라오의 최종 결정은 무엇입니까? 공식적인 학살입니다. 이제 모든 백성에게 명령을 내려 태어나는 사내아이를 모두 강물에 던지라고 합니다. 이 명령이 과연 성공할까요?

오늘의 세상에서도 힘을 가지고 남들을 지배하고 세상을 다스리려는 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합니다. 아니 자신의 두려움과 공포심을 감추려고 합니다. 힘을 숭배하면서 자신의 약함을 감추고 두려움과 공포심에 사로잡힌 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에는 언제나 끔찍한 죽음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랑의 힘으로 서로 섬기며 함께 한 마음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는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만이 지닌 강점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삶의 중심을 잡고 삽니다.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의 위력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본의 힘, 권력의 힘만을 따를지 모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정의를 동반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믿습니다.

오늘 히브리 산파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 모범이 되는 인물들이 많지만 우리가 존경하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전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이었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 산파는 힘없는 이들이었고, 제국의 왕 바로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목숨 부지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왕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저항했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습니다. 한 사회가 무너지기 전에 먼저 사람이 무너지고 한 사회가 바로 서기 전에 먼저 사람이 일어서는 법입니다. 히브리 산파들이 무너지지 않고 일어섰기 때문에 출애굽의 역사가 가능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수많은 위기의 순간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다면, 그래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굴복할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바로 생명을 위해 싸움에 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하여 왔습니다. 우리 생명사랑 교우들은 언제나 생명을 선택하며, 생명의 길로 가시길 기원드립니다. 생명의 길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고 번성하는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설교 후 기도

생명의 하나님! 우리들에게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소서. 그리하여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소서. 생명의 근원이 온전히 주님께만 있음을 기억하게 하여 주소서.

능력의 하나님! 우리에게 힘을 주소서.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사랑의 힘을 주소서.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 사랑과 정의를 가슴속에 품게 하여 주소서.

사랑의 하나님!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역사의 길에서 올바른 길을 택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보다 먼저 생명의 길을 갔던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하고, 죽음의 세력에 맞서는 용기를 지니게 하여 주소서. 언제나 밝은 빛으로 우리를 비추시는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지난 한 주간도 끝없이 밀려오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많이 지쳤습니다. 마음의 여백이 사라진 자리에 때로 불평과 원망이 깃들고, 함께 도우며 살라고 보내 주신 이웃들이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주일 아침, 주님 전에 나와 기도하고 찬양하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느껴지고, 늘 우리 곁에 든든히 서 계신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흔들릴 때라도 주님을 믿으니 우리는 걱정 없습니다. 오늘 주님 앞에 우리가 준비한 예물 드립니다. 일주일 동안 애쓰며 땀 흘리며 산 삶의 결실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 허락하신 것 감사하며 드립니다. 우리의 예물을 받으시고 온전히 주님만 영광 받으시옵소서. 이 예물들이 하나님 나라 선교 사역에 널리 널리 쓰이게 하여 주소서. 꼭 필요한 일들을 해내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새 희망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추운 겨울이 두려운 이들에게 따뜻한 봄소식이 되게 하소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멋진 인생은 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을 갖추는 데 있습니다.

* 축도

하늘의 따뜻한 바람이 여러분의 가정 위로 부드럽게 불기를, 거룩한 영이 여러분의 집에 들어가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여러분이 가는 길마다 여러분들의 어깨 위로 늘 무지개가 뜨기를 빕니다. 이제는 지난 10년의 세월을 지켜 주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이 사랑의 힘으로 만물을 품고 죽임의 세력에 맞서 싸우려는 생명사랑 모든 믿음의 지체들 위에, 함께 예배하고 선교하는 전국의 모든 성도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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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니체의 시각에서 본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

""무신론자", "반기독자"(Antichrist)로 알려진 니체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유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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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무종교인들의 증가는 기성 종교에 또 다른 도전"

최근에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의 성격을 규명하는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정재영 박사(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교와 사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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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섭리 숨어있는 『반지의 제왕』, 현대의 종교적 현실과 닮아"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의 섭리와 『반지의 제왕』을 연구한 논문이 발표돼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숭실대 권연경 교수(성서학)는 「신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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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 탈존적 주체,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 주체

이관표 박사의 논문 "미래 시대 새로운 주체 이해의 모색"은 세 명의 현대 및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주체 이해를 소개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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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쇠퇴하고 신학생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

한신대 김경재 명예교수의 신학 여정을 다룬 '한신인터뷰'가 15일 공개됐습니다. 한신인터뷰 플러스(Hanshin-In-Terview +)는 한신과 기장 각 분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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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선에 쏠려 있는 개신교 전통에서 미(美)는 간과돼"

「기독교사상」 최신호의 '이달의 추천글'에 신사빈 박사(이화여대)의 글이 소개돼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어와 리쾨르를 거쳐 찾아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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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를 개교회 성장 도구로 삼아온 경우 많았다"

이승열 목사가 「기독교사상」 최근호(3월)에 기고한 '사회복지선교와 디아코니아'란 제목의 글에서 대부분의 교단 총회 직영 신학대학교의 교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