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사사기 7장 1-8절, 에베소서 6장 10-17절
[다듬어지는 인생]
한 개인이 태어나서 성숙한 인격이 되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경험을 해야 합니다. 우선 인생의 선배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좋은 부모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지혜를 얻으려면 가능한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목표를 가지고 매진하는 것도 좋고,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성공도 좋지만, 실패의 경험은 정말로 약이 됩니다. 실패를 통해서 자기를 성찰하는 힘이 더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떤 국가나 사회도 다양한 사건을 집단적으로 겪으면서 흥망성쇠의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남 밑에서 노예로 살다가 자유로운 존재로 살고자 과감하게 탈출을 감행한 히브리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신앙 공동체로 다듬어지고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성장하기까지는 3단계를 거쳤습니다. 첫째는 모세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둔 시대로, 한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고 나아가는 1인 체제의 시대입니다. 정치, 군사, 종교의 모든 것이 한사람에게 집중되어 있고 백성 전체도 한 몸처럼 움직입니다. 두 번째는 오늘 성서 본문에서 다루는 사사시대인데, 이때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12지파에 다 나누어 준 이후로, 평상시에는 각 지파들이 독립권을 가지고 있다가, 외적의 침입과 같은 비상시에 특정한 사람을 중심으로 한데 모여 난국을 헤쳐나가는 시대입니다. 이때의 지도자들을 사사라 불렀습니다. 이때는 정치도 따로, 종교도 따로 입니다. 셋째로는 엘리나 사무엘이 제사장으로 있던 시대로 정치, 군사에 있어서는 지파에 따라 각각 분리되어 있었지만, 종교적으로는 한 명의 제사장을 두고 모두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시대가 됩니다.
사사들이나 모세와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 그리고 이후에 나타나는 제사장이나 왕들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들은 모두 같은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사사들은 다른 지도자들과는 다릅니다. 모세나 왕들은 한번 부름을 받으면, 그들이 죽을 때까지 그 직책을 감당하지만, 사사들은 유사시에 갑작스럽게 부름을 받은 임시적인 지도자입니다. 또 모세나 여호수아, 혹은 왕이나 제사장들은 대체로 백성들의 존경과 기대 속에 이 직책을 받았지만, 사사들은 꼭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야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사들 가운데 에훗 같은 사람은 산적 두목이었고, 사사 야엘은 한때 이스라엘 민족을 배반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삼손은 원래 나실인으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드려졌지만, 블레셋 여인과 결혼을 했던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사시대의 지도력은 임시적이고 백성들의 합의에 따른 것도 아니어서 당면한 위기는 가까스로 극복했을지 모르지만, 이 시대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사사들이 등장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냥 평범하게 사사시대라 일컫지만, 신앙적인 의미에서 보면 실로 하나님과 이방신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암흑시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가 하나님과 이방신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매는 방랑의 역사이고, 일장춘몽인 인생의 단맛을 위해 겉만 화려한 이방신을 섬기다가, 이로 인해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덕이는 고통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사사시대는 더욱더 어수선한 시기였기에,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사사 21장 25절)고 성서 기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평가한다면, 사사시대는 스스로 설 수 없고, 자율적으로 국가공동체를 일군 경험이 일천한 열두 지파 공동체가 외세의 침입으로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혼란을 거듭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거짓 유혹에서 벗어나 참된 신앙의 백성으로 만들어가는 훈련의 과정이요 연단의 채찍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성서 본문에 등장하는 사사 기드온이 살았던 시대도 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미디안 민족의 지배 아래 신음하던 고통의 시기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모두 산으로 도망을 가서 산속 굴에서 삽니다. 기드온도 다른 이스라엘 사람과 마찬가지로 곡식을 빻으면서 이를 빼앗길까 봐, 몰래 숨어서 곡식을 빻습니다. 또, 이때에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미디안 민족의 이방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이 기드온이 살던 마을에도 이들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암흑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기드온아!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 "주님, 저의 가문은 므나셋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하고, 또 저는 나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어린 사람입니다." "기드온아,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네가 미디안 사람들을 마치 한 사람을 쳐부수듯 쳐부술 것이다." 기드온은 두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의 징표를 얻고 이 일을 행합니다. 그러자 미디안 민족이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에 기드온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모으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불러 쓰시는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일에 지도자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남 밑에서 종노릇 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 원하고 더 나아가 역사와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면 보람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귀중한 일에 사역자로 쓰임을 받아 일한다면 그것만큼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들어 쓰시는 것일까요?
첫째는 자신의 무능함과 유한성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유능함을 먼저 확인하겠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는 사람을 부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주님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내세우면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은 쓰시지를 않습니다. 정녕 자신은 아무 능력도 없다고 고백하는 자를 사용하십니다. 하기 싫어서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책임 있게 감당하려고 하면서도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 그래서 주저주저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모세가 그러했고, 다윗이 그러했습니다. 이사야가 그러했고, 예레미야가 그러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랬고, 바울이 그리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자기는 죄인이오니 자기를 떠나달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죄인 가운데 우두머리라고 말하고, 사도 중에는 가장 작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겸손을 들어 올리시고 우리의 약함을 들어 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기의 무능력을 고백하는 기드온을 들어 쓰십니다. 그런데 이 기드온의 주위에 3만 2천명이라는 이스라엘의 군인이 모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거느린 군대의 수가 너무 많다. 전쟁에 이기면, 자기들이 힘이 세어 이겼다고 자만하기 쉽다. 그러하니, 지금 저들에게 가서 두려워하는 자들은 돌려보내라."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모인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여보시오, 조금이라도 두려워서 떨리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돌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은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남들이 전쟁에 나간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왔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자리를 뜨기 시작합니다. 오기는 싫은데 군중심리에 의해 나왔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합지졸과 소수정예]
유럽 각 지역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던 민담 중에 헤니페니(Henny Penny)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치킨 리킨(Chicken Licken) 또는 치킨 리틀(Chicken Little)이라고 알려졌지요. 어느 날 숲속을 거닐던 햇병아리 리킨 머리 위에 잘 익은 도토리 한 알이 정통으로 떨어졌습니다. "꽝"하는 소리에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온몸의 깃털이 우뚝 섰습니다. "아이쿠! 큰일 났구나. 하늘이 무너지는구나. 빨리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려야겠다." 놀란 햇병아리는 허겁지겁 뛰기 시작합니다. 가는 길에 암탉을 만났고, 하늘이 무너진다는 소식에 둘은 같이 달립니다. 이어서 오리를 만나고, 또 거위를 만나고, 칠면조를 만나는데, 모두가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그렇게 뛰어가다가 이들은 여우를 만납니다. 여우가 묻습니다. "아니, 이 좋은 날에 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십니까?" "여우 아저씨, 지금 그렇게 여유 부리면서 날씨가 좋다 나쁘다 할 때가 아니어요. 큰일 났어요. 지금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니까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니?" "제 눈으로 보았고, 제 귀로 들었고, 제 머리에까지 떨어졌는걸요. 우리는 지금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려주러 가는 길이에요" "아 그래, 내가 왕에게 가는 길을 알고 있는데 나를 따라오면 돼." 그래서 모두 여우를 따라, 들판을 가로질러 강을 건너 어느 굴속으로 들어갔는데, 그 굴은 여우가 사는 굴이었습니다. 햇병아리와 암탉과 오리와 거위와 칠면조는 당연히 왕을 보지도 못했을뿐더러, 그 이후로 그들을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동물들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요? 누가 뭐라고 한마디 하면, 금방 부화뇌동하여 아무 생각 없이 휩쓸리는 모습이 바로 우리 아닐까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남들이 뛰니까 무조건 뛰어가고, 그러다가 흉악한 사탄의 꼬임에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군상들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많은 사람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인생의 의미를 놓치고, 거짓 뉴스, 미혹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합니다. 이단에 빠지고, 욕망에 무릎 꿇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귀찮게 여기면서 남들 따라 하다가 깊은 수렁에 빠져 버립니다.
오늘 성서 본문에서 미디안과 전쟁하러 나온 3만 2천명 중에 돌아간 이들이 2만 2천명입니다. 3분의 2가 넘는 숫자입니다. 어쩌면 오늘날도 많은 사람은 남들 따라 하다가 두려움 앞에서 무력하게 넘어지고 도망가는 건 아닐까요? 그저 많은 사람 사이에 숨어서 있는 듯 없는 듯 남들이 하는 것에 묻어서 살아가는 삶은 주님이 결코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가 있고, 우리에게는 감당할 사명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 시간에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보내셨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햇병아리처럼 정신없이 그저 남이 다 하니까 나도 덩달아 뛰어가는 일일랑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고대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많은 병사가 필요하고, 3만 2천명이 아니라 32만명이 모이면 더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2만 2천명을 돌려보냅니다. 그래서 만 명이 남았는데 이것도 많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또 추려내시고, 결과적으로 남은 숫자는 겨우 3백명입니다. 여러분,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적은 수십만에 이릅니다. 아군은 겨우 300명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목회하는 전국의 모든 목사가 비슷하겠지만, 목회하다 보면 언제나 교인의 숫자를 신경 쓰게 됩니다. 인간적인 계산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목사가 교인 숫자를 늘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쫓아내기도 합니다. 교인 수가 늘고, 교회 재정이 많아져야 성공한 목회라고 말하면서 기업을 경영하듯 목회하는 목사도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소수 정예를 뽑고 있습니다. 숫자만 많다고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하나님의 선교 사명에 충실한 교회가 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재정적 물질적 준비가 필요하고, 함께 사역할 교인들도 어느 정도는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저 숫자 늘리기에 매몰되어 오합지졸의 신앙인들만 잔뜩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3만 2천명의 군사들 중에 3만 1,700명을 돌려보내시고 300명만 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묵상하고, 우리 생명사랑교회는 하나님의 소수 정예가 확실하게 존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수 정예는 어떤 사람입니까? 전쟁에 참여하는 군사들, 특히 하나님의 정의로운 일에 참여하는 군사들, 생명과 평화를 만들어 내는 믿음의 사람들은 첫째,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떠는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전쟁에 있어 가장 위험한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두려움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이나, 영적 전쟁에 있어 가장 위험한 적 또한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입니다. 시도해보지도 않고, 패배 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서로 돕는 사랑의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고, 믿음의 동지들이 함께 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소수 정예가 되려면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남은 일만명 중에 물을 마실 때, 무릎을 꿇고 입을 강에 직접 대고 마시는 자를 제외하고, 손으로 물을 움켜지고 핥아 먹는 삼백명을 뽑으십니다. 입을 강에 대지 않고, 손으로 물을 떠서 핥아 먹었다는 것은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대처할 준비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뽑으십니다. 오늘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담당하는 사람은 어느 상황에서도 그 신앙적인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정신에 언제나 깨어 근신하는 자를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벧전 5:8)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오늘은 민족의 명절인 설날입니다. 설날에는 가득 찬 보름달처럼 풍요를 상징하는 떡을 동그랗게 썰어서 먹습니다. 그러나 설날은 풍요를 바라는 것만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낯설게 다가오는 한 해를 준비하는 날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설날입니다. 양력 새해 첫날과 더불어 음력의 첫날까지 기억하는 우리는 두 번의 새해를 맞이하며 더 철저한 준비, 자기 성찰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생명 사랑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2023년 새해를 열어가는 이때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뽑힌 바 된 소수의 정예 군사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숫자의 많고 적음을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소수의 창조자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먼저, 우리의 염려를 주께 맡기고, 우리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몰아냅시다. 아무려면, 죽기보다 더하겠느냐, 세상 말로 두둑한 배짱을 가집시다. 죽으면 죽으리라. 죽으면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인데, 이것이 성도의 마지막 소원이 아닙니까? 지금처럼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살 때도, 우리는 주눅 들지 말고 좀 더 대담해 져야 합니다.
오늘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읍시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로 가슴을 가리고 버티어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하십시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그것으로써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루아침에 갑자기 되는 일은 없습니다. 꾸준하게 노력하면서 준비한 이들만이 하나님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끝까지 긴장을 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의 검과 말씀의 화살 그리고 기도의 방패로 무장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준비하고 나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다면, 이미 우리의 적은 고꾸라졌고,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바라기는 기드온의 3백 명의 군사와 같이 하나님의 정예군사가 되여 하늘의 승리의 기쁨을 영원히 간직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힘과 능력,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 우리에게 굳센 믿음을 주소서. 담대함을 주소서. 어수선한 세상 속에서 위기의 상황이 찾아온다 해도 절대 당황하지 않게 하여 주소서. 고난 속에서 성장하며, 실패에서 배우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 힘을 자랑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잘난체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여 주소서.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의 검을 들고 훈련하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소서. 늘 깨어서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되게 하여 주소서. 2023년도 보람찬 한 해를 보내도록 매 순간 진실하며 최선을 다하게 하여 주소서. 오늘은 민족의 명절입니다.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소서. 또한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뜻을 기억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늘 우리 곁에서 스승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하나님!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에 굴곡이 있고, 그늘이 있고, 때때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렁이 있더라도 감사를 놓지 않게 하여 주소서. 불평과 불만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헛되게 소비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보이는 것에 취하여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작은 일에 얽매여 큰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에서 건져 주소서. 늘 우리를 보살피시고 돌보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 주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우리의 생각과 몸과 마음도 드립니다. 모두 받아주소서. 받으셔서 깨끗하게 하여 주소서. 곳곳에서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이 귀한 예물들이 쓰이게 하여 주소서. 무엇보다 우리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시고, 빵은 필요하지만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주님께서 부르실 때, 언제라도 달려 나갈 수 있도록 준비된 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우리의 삶이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길 바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세상은 숫자로 우리를 재단합니다. 거기에 속지 마십시오. 굳센 믿음을 지니고, 오직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미래를 선취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 축도
2023년 새해에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 앞에서 이끌어 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가 넘쳐나기를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시고
그분의 사랑이 여러분을 감싸시기를
그분의 복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기를
그리고 여러분은 거룩한 땅 위를 걸어가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