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바람을 보고 무서워"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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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41:8-10, 요한1서 4:16-18, 마태복음 14:22-33

말과 노루가 달리기 시합을 하면 누가 이길까요? 노루입니다. 그런데 말이나 노루를 잡으려고 쫓아가면 누가 잡힐까요? 역시 노루입니다. 말보다 빠른 노루가 잡히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노루는 혹시 잡히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다가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잡힙니다.

비단 노루만이 아닐 겁니다. 우리 인간의 삶도 늘 두려움과 싸움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때를 놓치고, 두려움 때문에 포기하고, 여기에 걱정근심과 염려하는 마음까지 겹치면 오도 가도 못 하고 제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지레 겁을 먹고 스스로 발목을 묶는 자기 마음속의 족쇄 때문에 깊은 물속에 빠져 갑니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마태 14:22-33)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그 두려움에 물에 빠져 가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빈 들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큰 무리를 먹이신 직후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빈 들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군중을 돌려보내셨습니다. '재촉하다'라는 말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다른 복음서(요한 6:15)의 설명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 무리가 흥분하여 예수를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아직까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그저 지상 권력인 줄로 알고 있던 제자들까지 여기 합세하면 문제가 더 복잡하게 될 것 같아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빈 들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신 것 같습니다.

홀로 남게 되자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오르셨습니다. 성서에서 산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산 위에서 무슨 기도를 하셨는지 보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날이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라]"(23절)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홀로 계심, 그것은 지금 바다 위에서 거센 바람과 싸우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재를 의미했습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24절)라고 했습니다. 배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깊은 곳까지 항해해 들어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 사상에서 물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은 혼돈과 어둠과 악을 상징합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은 바로 이런 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가운데 드러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다]"(창세기 1:2, 공동번역)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물 한 가운데 창공을 만드시고 물과 물 사이를 갈라 하늘과 땅을 지으셨습니다. 또 큰 홍수로 물이 불어나서 백오십 일 동안이나 땅을 뒤덮고 있을 때, 하나님은 노아와 방주에 함께 있는 모든 짐승을 돌아보시고 바람을 일으켜 물을 빼 마른 땅이 되게 하신 다음 노아와 새 생명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창세기 9:8-17) 뿐만 아닙니다. 홍해 바다의 거친 물결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로의 군대로부터 구원하셨고(출애굽기 14:21), 또 수위가 높아진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너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여호수아 3:14-17) 이처럼 구약성서에서 물은 단순한 물질이 아닙니다. 혼돈과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저항하는 악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물을 정복하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욥기 9:8-10) 하박국 선지자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하박국 3:14-15) 보십시오. 성서의 하나님은 죽음과 혼돈 그리고 악을 상징하는 '바다 물결'이나 '큰 물의 파도'를 밟으시는 분입니다.

이제 비로소 우리는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마태 14:25) 성난 파도와 맞서 싸우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오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할 때 산에서 홀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바다 위로 걸어서, 즉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시며]" 제자들에게 오셨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가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며" 죽음과 혼돈 그리고 악을 정복하고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눈앞에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고" 서 계신 분이 있습니다. 혼돈과 어둠과 악을 정복하고 다스리시는 분이 서 계십니다. 그런데 배 안에서 풍랑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제자들은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서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령은 '판타스마'의 번역인데, 신약성서에서는 오직 이곳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천사도 믿었고, 귀신도 믿었기 때문에 유령은 이러한 영적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을 겁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는 사람을 보고 그것이 필시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 일이 "밤 사경에" 일어났다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밤 사경은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의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시간에 예수님은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제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어둑어둑한 이른 새벽에 집에서 나오다 저만치 어느 집 옆에 시커먼 물체가 앉아 있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나를 노리는 강도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여 순간 공포심에 머리가 쭈뼛 섰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건 누군가 자기 집 앞에 내놓은 커다란 쓰레기봉투였습니다. 그랬습니다. 문제는 어둠이었습니다. 밝았더라면 착시는 없었을 겁니다. 날이 새고 나면 별것도 아닌 것에 제가 혼비백산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인생이 힘겹고 고달픈 것도 '내 안의 어둠' 때문인 것 같습니다. 탈무드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마음에 보이지 않는 쪽이 더 두렵다"(탈무드)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 안에 어둠이 있습니다. 내 안에 혼돈이 있습니다. 그 어둠과 혼돈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에 떱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사나운 물결을 밟고 지금 내 앞에 서 계시는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밤 사경의 어둠 속에서 그들은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라 놀라 소리 지른 것입니다. 지금 풍랑이 이는 깊은 밤의 갈릴리 바다는 다름 아닌 우리 인생의 바다입니다.

예수께서는 즉시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27절) 제자들을 진정시키셨습니다. "나다"(It is I)의 그리스 원어는 '에고 에이미'인데, 이 말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실 때 사용하신 어투입니다.(출애굽기 3:14, 이사야 41:4 등)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가 들은 하나님의 이름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는 진정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는]" 분입니다. 혼돈과 죽음과 악을 정복하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28절)라고 청했습니다. 예수께서 "오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용감히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 했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는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도 나오지만(마가 6:45-52, 요한 6:15-21), 베드로가 그 예수님을 보고 물로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는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그만큼 오늘의 이야기는 특별합니다. 마태는 지금 우리에게 베드로를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물로 과감히 뛰어내린 것, 여기까지는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엄두도 내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베드로는 몇 걸음도 못 가서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소리를 지르며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절규했다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그와 함께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하였다고 했습니다. 바다 위를 잘 걷던 베드로는 왜 물에 빠져 갔습니까?

오늘 이 말씀의 제목은 "바람을 보고 무서워"입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을 읽으며 저의 가슴을 가장 깊이 찌른 말씀이 바로 이 구절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베드로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새번역 성서는 베드로가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베드로는 "오라" 하신 주님을 끝까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대범하게 배 밖으로 발을 내디뎠으나 이내 자신의 두 발이 깊은 물 위에 서 있음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발아래는 심연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바다입니다. 퍼뜩 베드로는 자기가 놓인 실존의 상황에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눈앞의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거센 바람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끝까지 집중하지 않았던 겁니다. 밤 사경의 어둠과 자기 안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베드로는 결국 그렇게 바다 속으로 침몰합니다.

살다 보면 종종 물건을 떨어뜨릴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물건을 떨어뜨리는 것엔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습니다. 꽉 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꽉 쥐지 않는 것에도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습니다. 물건을 떨어뜨려도 된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절대 떨어뜨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느슨한 사고의 어딘가에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1952년 7월 4일, 미국 캘리포니아 앞바다에 있는 카탈리나 섬에서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수영하는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바다는 얼음같이 차가웠고 두껍게 드리워진 안개 때문에 그를 호위하는 보트들마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몸은 차갑게 얼어붙어 왔고 그의 형태를 알아본 상어 떼들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TV 생중계를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벌써 16시간 가까이 헤엄을 치고 있었습니다. 보트 위에선 그의 어머니가 힘을 내라고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다고 기운을 불어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짙은 안개뿐이었습니다.

플로렌스 채드윅(Florence Chadwick)은 포기할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5백 미터를 더 가고 나서 그는 그만 배 위로 올려달라고 간청하고 말았습니다. 포기한 것입니다. 얼어붙은 몸을 녹이며 그는 TV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명하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육지가 제 눈에 보였더라면 절대 포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랬습니다. 그를 포기하게 만든 건 추위가 나이었습니다. 피로도 아니었습니다. 무서운 상어 떼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안개였습니다. 안개 때문에 그는 자기의 목표지점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목표지점이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서움이 그를 덮쳤습니다. 공포심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자 주위의 상어 떼가 의식되고 두 팔과 다리가 마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결국 포기하고 말았던 겁니다.

두 달 뒤 플로렌스 채드윅은 다시 도전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렸습니다. 하지만 이젠 달랐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분명한 자신의 목표지점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저 앞에 분명히 단단하게 버티고 서 있는 육지를 마음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앞으로, 앞으로 조금씩, 조금씩 헤엄쳐 나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육지에 닿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카탈리나 해협을 헤엄쳐 건넌 세계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남자들이 세운 기록을 두 시간이나 단축하면서 말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인생의 장애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가 자기 인생의 목표에서 눈을 뗐다는 걸 의미합니다. 물건은 꽉 쥐지 않아 떨어뜨립니다. 목표에 집중하지 않을 때, 가장 '궁극적인 것'에 집중하지 않을 때 그때 바로 우리 앞에 놓인 숱한 장애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그 어둠의 물결을 밟고 서 계신 분이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용기를 내어 과감히 배에서 물 위를 걸어 예수께 나아갔지만 이내 "바람을 보고 무서워"(개역개정),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공동번역), 혹은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새번역) 물에 빠져 갔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바위처럼 단단히 버티고 서서 거센 물결을 밟고 계신 예수님을 끝까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분에게서 눈을 떼도 된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절대로 눈을 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퍼뜩 자신의 두 발이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 위에 서 있는 걸 의식하게 되었고 그만 두려움에 물속으로 빠져들어 갔던 것입니다.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심전력을 다합니다. 호랑이로서야 토끼 같은 것은 한주먹감도 안 되기 때문에 슬슬 느릿느릿 가다가 앞발로 한번 툭 건드려 잡을 것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를 잡는 데도 사력을 다합니다. 300kg의 몸으로 100m를 5초에 달리는 속도로 달려가 순식간에 처리합니다. 반대로 호랑이게 쫓기는 토끼 역시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까 깨끗이 포기하고 그냥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토끼도 사력을 다합니다. 호랑이의 일격이 날아들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도망칩니다. 그러고 보면 호랑이나 토끼보다 못한 게 우리 인간인 것 같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포기하고 게을러집니다. 믿음의 생활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성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2)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도 처음엔 베드로처럼 과감히 배에서 뛰어내려 "오라" 하시는 예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분께 집중하지 못하고, 그분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 앞에 단단히 버티고 있는 육지를 보지 못하고 베드로처럼 "바람을 보고 무서워" 깊은 물속으로 빠져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베드로는 그의 실패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새 힘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얼마 가지 못하고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나, 만약 그가 "오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부름에 과감하게 응답하여 배 밖으로 두 발을 내리는 '신앙의 모험'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그 거센 물결을 밟고 서 계신 이가 물에 빠진 우리를 건져내실 수도 있는 분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지 못했을 겁니다. 삶에서 가장 큰 위험은 전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도전하려 하지 않는 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은 모험입니다. 신앙은 신뢰입니다. 밤 사경 깊은 어둠의 바다 한 가운데 있으나 그 험한 물결을 밟고 서 계신 분이 내가 물에 빠져도 나를 건져내시는 분임을 믿고 그를 향해 과감히 나아가는 행동이 신앙입니다. 베드로는 사실 우리 자신입니다. 베드로의 위험스러운 행동이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신뢰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이 다른 복음서와 달리 마태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격려와 도전의 메시지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날 너무 많은 사람이 안전하고 얕은 물가에서 물만 튀기고 있을 뿐 자기의 믿음을 시험하고 심화시킬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 마태가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가까워지기를 원한다면 과감히 배에서 내려 저 거친 바다를 밟고 서 계신 분,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에게 용감하게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 길이 만사형통의 길이라고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분명 어려움이 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처럼 물속에 빠져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 깊은 바닷물 속으로 깊이 빠져 갈 때에도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주시는 분이 내 앞에 서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 옛날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을 위해 험한 물결을 잔잔하게 하신 이가 오늘 나의 험한 물결 역시 잔잔하게 하실 거라고 마태는 힘주어 우리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요한1서 4:18) 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다]"(시편 34:4)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건지시는 손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내미시는 그 손길 안에 온전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미신 손을 꼭 붙잡으십시오. 놓치지 않게 꽉 붙잡으십시오.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그가 죽음과 혼돈과 악으로부터 여러분을 건지실 겁니다.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어려운 시험 당해도 그가 여러분을 지키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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