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설교] "이새의 뿌리에서"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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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이사야 9:2-6, 에베소서 2:14-18, 누가복음 2:8-14

설교문

지난 10월 7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수천 발의 로켓을 발사했고 많은 민간인과 병사들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가자지구를 무자비하게 폭격해 지금까지 사망자만 2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중 47%는 어린이들입니다. 그리고 17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아그네스 칼라마르 국제엠네스티 사무총장은 "세계 최대의 야외 감옥이 거대한 묘지로 변하고 있다"라고 한탄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누가 2:14)라고 노래했는데, 예수께서 태어나신 땅 팔레스타인에도 평화는 올 수 있을까요?

구약성서의 이사야는 보기 드문 평화의 예언자입니다. 그가 쓴 이사야서는 예루살렘이 두 번이나 외침을 겪으며 혼란과 절망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평화를 노래한 책입니다. 아하스 왕 때 시리아의 침공이 있었고, 히스기야 왕 때 아시리아의 침략이 있었습니다. 이 고통과 암흑의 시기에 이사야는 장차 '임마누엘'이라 불리는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을 예언합니다.(이사야 7:14) "놀라우신 조언자(Wonderful Counselor), 전능하신 하나님(Mighty God), 영존하시는 아버지(Eternal Father), 그리고 평화의 왕(Prince of Peace)"(이사야 9:6, 새번역) 불리는 이 아기가 태어남으로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리라"(이사야 9:2) 예언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말인가요? 이사야 11장에 그 놀라운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절)라고 시작한 이사야의 예언은 다시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10절)라고 끝납니다. 이 안에 두 가지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하나는 '줄기'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나무의 줄기(branch)가 아니라 베어 넘어진 나무의 밑둥, 즉 그루터기(stump)를 가리킨다는 점입니다.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이 완전히 말라 버린 밑 등걸이 바로 이새의 줄기 혹은 뿌리입니다. 거기에서 새싹이 난다는 말입니다.

또 다른 놀라움은 이사야가 '다윗의 줄기'라고 하지 않고 '이새의 줄기'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새(Jesse)가 누구입니까?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이새라는 이름은 '주의 선물'이라는 뜻인데, 그는 시골에서 양을 치던 비천한 목자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보기에 다윗 왕국은 실패작입니다. 군사적 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한 그의 왕국은 하나님 앞에서 실패작입니다. 다윗의 후손에서 영원히 왕위가 계승된다는 다윗 왕권 신학은 틀렸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아버지, 곧 평범하고 비천한 시골 목자였던 이새의 줄기 혹은 뿌리에서 한 새로운 왕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왕은 어떤 왕일까요. 이사야는 그가 "여호와의 뜻을 알고 그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길 것이며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길 것"(2-3a절)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눈에 보이는 외모나 귀에 들리는 소문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이며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옹호하고... 정의와 성실로 자기 백성을 다스릴 것"(3b-5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던 왕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그런 왕이 아닙니다. 그런데 세계 만민을 정의의 길로 인도하는 이 왕은 단순히 인간 세계만의 왕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이 왕이 다스리는 메시아 통치가 이루어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6-8절) 아! 인류가 가진 어느 문서에 이렇게 놀라운 평화가 선포되고 있을까요.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도래할 메시아 왕국에서는 자신의 먹이를 위해 다른 동물을 죽이는 야수의 잔인한 본능이, 근원적 폭력성이 완전히 제거된다는 말입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한다 했습니다. 젖 먹는 아이는 가장 무력한 존재를 상징하고, 독사는 가장 잔인한 존재를 상징합니다. 그런 둘이 서로 장난친다는 말은 약육강식의 시대는 지나가고, 힘과 폭력으로 상대가 진멸할 때까지 싸우는 시대는 지나가고 서로 원수 되었던 존재들이 평화의 관계 속에서 지낼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9절)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 이새의 뿌리에서 돋아난 새싹은 만민이 쳐다볼 깃발이 되리라. 모든 민족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가 있는 곳에서 영광이 빛나리라."(10절) 이사야의 이 예언이 있은 지 700년 후에 예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누가 2:1-7) 누가가 전하는 예수의 탄생 기사입니다.

아구스도, 곧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로마의 초대 황제입니다. 그는 쟁쟁한 경쟁자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절대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았습니다. 야누스 신전은 로마가 전쟁 중일 때 그 문을 열어놓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500년 만에 그 문을 닫았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어디선가 전쟁이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집권으로 이제 평화가 왔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로마의 평화'(Pax Romana) 혹은 '아우구스투스의 평화'(Pax Augusta)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를 '신이 이 세상에 보낸 구세주'라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아가 그의 생일을 이 세상을 위한 '복음'(evangelion)이라 했습니다. 로마인들에게 아우구스투스는 온 인류가 기다려 온 평화의 왕입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새로운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전한 누가는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복음, evangelion]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누가 2:8-12) 로마 황제의 탄생이 '복음'이라고 말하던 세상에 '새로운 복음'이 선포되었습니다. 예수의 탄생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 곧 복음이라고 천사가 선포했습니다. 목자들에게 선포했습니다. 사실 목자의 등장은 의외입니다. 목자들은 당시 비천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 다윗의 아버지가 평범하고 비천한 목자였던 걸 기억한다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새로운 왕이 나타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목자들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 다음에 천사들이 한 일은 찬송입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 2:13-14) 이상한 일입니다. 로마의 평화가 이미 대명천지에 울려 퍼졌는데, 또 다른 평화의 노래라니요. 아우구스투스가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나서 '로마의 평화'를 선포하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를 노래했습니다. 그것은 장엄한 승리의 팡파르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다른 평화의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그것도 밝은 대낮이 아니라 한밤중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 노래가 헌정된 사람은 화려한 황실의 아기가 아니라 초라한 구유에 누운 아기였습니다. 말 밥통 위의 아기에게 헌정된 천사들의 노래! 참으로 이상한 평화의 노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첫 번째 성탄절의 노래였습니다. 이 노래는 아우구스투스의 거짓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 평화를 노래하는 찬송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도식으로 천사들의 노래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정확히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공동번역), 혹은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새번역), 혹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에게"(현대인의 성경) 평화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로마인들이 찬양해 마지않던 그 평화로는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땅에는 다른 평화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다윗 왕가의 회복을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힘으로 주변 민족을 통치하길 원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입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고 많은 기적을 일으키시자 사람들이 예수를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환호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다윗을 넘어서는 존재여야 했습니다. "다윗이 [메시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메시아가]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마태 22:45)라고 예수께서 친히 반문하셨습니다.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다윗의 피로 난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다윗보다 위대하고 탁월한 왕입니다. 주변 민족을 힘으로 제압하고 유대 민족주의를 완성하는 군사적 왕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한 새로운 왕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옹호하고... 정의와 성실로 자기 백성을 다스릴" 왕입니다. 그 왕이 통치할 때에는 이리와 어린 양, 표범과 새끼 염소, 송아지와 새끼 사자, 암소와 곰, 사자와 소, 그리고 젖먹는 아이와 독사가 서로 해 됨고 없고 상함도 없는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선포한 메시아의 통치입니다. 국제평화의 비전입니다. 인간 제국의 평화가 아니라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빌립보서 4:7, 공동번역)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성탄은 평화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그의 이름은... 평화의 왕"(이사야 9:2-7)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이 오면...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미가 4:1-4, 새번역)입니다. 한 새로운 왕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시고]...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땅 끝까지 이를 것"(스가랴 9:9-10, 새번역)입니다.

성탄은 평화입니다. 오늘 우리를 찾아오시는 메시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는]"(에베소서 2:14-16) 분입니다. 오늘 "평화는 없고, 폭력 뿐"(예레미야 30:5)인 이 세상에 한 새로운 왕이 오십니다. 오셔서 버림받은 사람들, 마음에 아픔을 가진 사람들, 생계를 걱정하며 한숨짓는 사람들, 내일을 꿈꾸기 어려워하는 젊은이들, 역사의 진실 앞에서 여전히 사과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전쟁과 폭력과 테러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의 평화가 되어 주십니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요한 14:27, 새번역)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성탄엔 이 평화를 선물로 주고받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성탄엔 "이새의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나 옛 선지 노래대로 장미꽃 핀"(찬송가 101장 1절) 그 평화를 서로 선물로 주고받으면 좋겠습니다. 참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쟁과 폭력과 갈등으로 고통받는 이 세계에서 우리가 나누는 최고의 선물 되게 합시다.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주시는 이 평화가 오늘 힘들고 울적한 여러분의 마음에, 서로 다투고 아직 화해하지 못한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여전히 남과 북 그리고 동과 서로 분열된 이 나라에, 그리고 170만 난민이 오갈 데 없이 버려진, "세계 최대의 야외 감옥이[자] 거대한 (공동) 묘지로" 팔레스타인 땅 위에도 함께 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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