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장윤재 목사 설교] 천국에서 큰 자

장윤재 목사(이화여대 대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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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베리타스 DB)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이화대학교회 담임)

성경본문

창세기 1:1-4a, 10, 12, 18, 21, 25, 31a; 에베소서 4:13-15; 마태복음 18:1-5 -

설교문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태 18:1) 이 질문의 시점과 배경을 고려하면 참으로 어이가 없고 황당한 질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앞서 자신의 수난(受難)을 예고하셨습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태 17:22b-23a), 십자가의 길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자들은 누가 '천국에서 큰 자'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에도 제자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께서 다시 한번 그의 수난을 예고하시지만(마태 20:18-19), 제자들은 천국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며 서로 싸웁니다.(마태 20:20-24) 이런 제자들은 향해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서의 본문대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면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태 18:2-4)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돌이켜'입니다. '돌이키다'(στραϕῇτε, 스트라파테 / 영어 convert)라는 말은 '무엇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다', 혹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어린이에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어린이라는 과거에서 어른이라는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방향을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십니다. 어린이는 우리가 버리고 떠나온 인생의 뒤안길이 아니라 앞으로 도달해야 할 미래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어른이 되는 곳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되는 곳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또 누구든지 내 이름을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마태 18:5)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놀라움을 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어린아이와 동일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 지금도 그렇지만 - 어린이는 '힘이 없는 자'입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고, 자녀들은 종종 심한 육체적 형벌에 의해 순종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12세가 되어 율법교육을 받기 이전의 유대인 어린이는 종교적으로 '미성숙한 자'였고, 여성과 이방인과 병자와 가난한 자와 마찬가지로 '권리를 갖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느 날 어린이를 예수께 데려와 안수를 요청했을 때 제자들이 이를 꾸짖었던 행동은 이해할 만합니다.(마태 19:13; 마가 10:13; 누가 18:15)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을 꾸짖으시고 어린이를 어른들의 "가운데"(마가 9:36) 세우셨습니다. 세상의 '변두리'에 있던 존재를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를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마가 10:16)하셨습니다. 어린이를 품에 안으셨다는 말은 용납과 보호와 안전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어린이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져오신 혁명의 하나입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이토록 어린이를 높게 평가하시고 사랑하신 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어린이'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커다란 말을 탄 용맹한 어른으로 단박에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과 똑같이 아기로 태어나서 어린이로 성장했으며 성인이 되었습니다. 성서는 '어린이로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 2:52) 했습니다. 한 시인(알버트 페인)은 이 <어린이 예수>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는 티 없는 어린이였습니다. / 여름날, 너나 또 나처럼 / 아버지가 일하고 계신 동안에 / 문밖에서 놀기도 하고, / 마루에서 대팻밥을 모으기도 하던 / 그는 티 없는 어린이였습니다 // 너나 또 나와 다름이 없이 / 때로는 풀밭 위에 뒹굴면서, / 푸른 하늘에 떠오른 까만 점 같은 / 매가 머리 위에 나는 것을 보았고, / 문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 낯모를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 그는 티 없는 어린이였습니다 // 그러나 작은 새들 / 종달새, 소쩍새, 그리고 비둘기들은 /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 새들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을 알아차리고 / 존경하는 생각에 잠겼을 것입니다. / 새들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을 / 어린 예수를 알고 그 이름을 기렸을 것입니다. // 해는 새벽녘에 그의 머리카락에 / 남모르게 스며들어 / 보이지 않는 영광의 빛 한 줄기 / 거기 남겨 놓고 사라졌을 것입니다. / 그것은 가시관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이마 위에 / 사랑의 입맞춤을 뜻하며 드린 것이었습니다."

신학자 이신건은 예수님에게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어린이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이신건, 『어린이 신학』, 신앙과지성사, 2017)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입니다. 어린이의 가장 큰 특징은 부모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천진스러운 신뢰는 무엇보다도 "염려하지 말라"(마태 6:25-34; 누가 12:22-31)라는 그분의 말씀 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하시며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요한 14:10-11, 20)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스러운 믿음, 절대적 신뢰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전적인 신뢰는 특히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신 그의 독특한 어법(語法)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혈통을 직접 이어 준 남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빠'는 이 아버지를 정답게 부르는 말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 14:36) 예수님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어린이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어린이다움은 고통에 대한 남다른 연민입니다. 어린이는 모든 면에서 어른보다 더 수용적입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다른 존재를 수용함으로써 성장하기에 어린이라는 존재는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모든 면에서 점점 더 닫히고 배타적인 존재가 됩니다. 점점 더 규범적인 인간이 됩니다. 그렇게 점점 더 남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무심해집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인과 종교인들도 그러했습니다. 강도 만나 피 흘리며 죽어가는 이웃을 구한 선한 사마리아인과 달리 그 사람을 외면하고 도망간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랬습니다. 율법(민수기 19장)에 따르면 시신을 만지면 일곱 날 동안 부정(不淨)하게 됩니다. 그가 만진 것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과 하위 성직자인 레위인이 성막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곱 날 동안이나 정결예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미 죽었는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모른 척 도망갈 충분한 종교적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런 규정을 예수님이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종교보다는 인간을 더 사랑하셨습니다. 율법보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자비로운 마움 때문입니다. '성인'(成人)이 된 인간은 제도와 규범과 이해관계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모든 규범에 앞서는 규범, 절대적 규범, 즉 고통당하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자비와 사랑이 더욱 중요하셨습니다. 인간의 고통에 어린이가 어른보다 훨씬 더 민감하다는 사실은 성서에 보도된 '오병이어'(五餠二漁)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기진한 무리를 "불쌍히 여겨"(마태 14:14; 마가 6:34)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날이 저물어 무리가 허기를 느끼게 되었을 때 누군가 내어놓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모두가 풍성히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그 작은 떡과 물고기를 내어놓은 자가 누구였습니까? '어린이'였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배고플까봐 없는 살림에 아이가 한 끼 먹기에도 부족한 조그마한 떡 다섯 개와 작은 생선 두 마리를 싸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걸 혼자 몰래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사랑과 자비가 많으신 예순미 앞에 내놓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의 그 착하고 예쁜 마음을 가지시고 오천 명이 먹고도 남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세 번째 예수님의 어린이다움은 진실한 마음입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더 순수합니다. 어린 아기의 맑은 눈망울에서 우리는 천사를 보는 듯한 환상에 빠지곤 합니다. 물론 우리는 어린이를 낭만적으로 이상화할 수는 없습니다. 어린이도 종종 거짓말을 합니다. 불리한 상황을 당장 모면하려고 어린이도 임기응변으로 거짓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거짓을 잘 숨기지 못합니다. 어린이는 어른에 비해 훨씬 더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가장 싫어하셨던 것은 바리새인들의 위선(僞善)이었습니다. 즉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외식(外飾)이었습니다. 즉 겉치레였습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위선이나 외식과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이 진실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었다는 사실은 그분이 독특하게 사용하시던 '아멘'(άμὴν)이라는 어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의 말을 잘 들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실 때마다 아멘, 즉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이 특유한 어법은 그분 인격의 진실함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진실하신 분이었기에 위선과 거짓, 외식과 허영을 참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마태 5:3)라고 가르치셨고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비둘기와 같은 순결한"(마태 10:16) 분이셨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예수님의 어린이다움은 그분의 놀이하는 삶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놀이하는 존재, 즉 '호모 루덴스'(homo ludens)입니다. 하지만 어린이처럼 왕성하게, 완전히, 그리고 성스럽다 할 정도로 진지하게 놀이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혼자서도 잘 놉니다. 가끔 아이들이 하는 혼잣말 역할놀이를 보셨는지요. 혼잣말로 일인다역을 하는 데도 대사에 막힘이 없습니다. 자신이 작가이고 감독이며, 주연이고 조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도 어린이처럼 '놀이하는 인간'을 볼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예수님의 삶은 '축제의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를 즐거운 천국 잔치에 비유하셨고,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 가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사람들의 흥취를 돋우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특히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과 늘 식탁 나눔을 가지셨습니다. 오죽했으면 당대 경건하다는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사람"(마태 11:19)이라고 비난했겠습니까. 정결법이 함께 먹고 마시면 안 된다고 낙인찍은 사람들,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사람들, 그 사람들과 예수님은 보란 듯이 함께 먹고 마시며 천국 잔치를 여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예수님은 마치 놀이하는 어린이처럼 우리 곁으로 오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율법과 규범, 위선과 외식, 허례와 허식이 지배하던 경직된 세상에 오셔서 은총으로 거저 주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너무 좋아 이를 미리 맛보고, 즐기고, 춤추고, 노래하며 놀이하던 천진스러운 어린이는 아니었겠습니까.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은 이런 말을 했다 합니다. "욕조나 길 위에 고인 웅덩이의 물을 바라보는 재미가 어린이를 물리학자로 만든다." 물웅덩이를 보고 재미있어하는 아이는 이미 시인이고 물리학자입니다. 놀라움, 경이로움을 느끼는 그런 감수성이 인문학적으로 이어지면 시인이 되고, 수학으로 연결되면 물리학자가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시인이고 물리학자가 될 그런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에게 부모가 어떻게 하는지,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 The Giving Tree』의 작가로 유명한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하나님이 손가락을 주셨는데 얼마는 '포크를 사용해라' 해요. / 하나님이 물웅덩이를 주셨는데 얼마는 '물장구 튀기지 마라' 하고요. / 하나님이 빗방을 주셨는데 얼마는 '비 맞으면 안 된다' 해요. / 난 별로 똑똑하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요 - / 엄마가 틀리든 하나님이 틀리든 둘 중 하나예요."("Ma and God")

어른들의 세계와 달리 어린이의 세계는 온통 경이(驚異, wonder)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세상은 놀랍고도 신기한 것입니다. 사실 어린이들의 이런 마음은 태초에 천지를 지으시고 무려 일곱 번이나 감탄과 경탄을 연발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마음입니다. 오늘의 구약성서 본문은 창세기 1장에서 일곱 구절을 따온 것인데 모두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끝납니다. 하나님은 빛을 지으시고(4절), 땅과 바다를 지으시고(10절), 땅 위에 풀과 나무를 지으시고(12절),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들을 지으시고(21절), 땅 위에 동물을 지으시고(25절), 그리고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31절)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감탄하셨습니다. 당신이 지으신 것을 하나하나 경이로운 마음으로 바라보시며 '좋다'라고, 혹은 '아름답다', 혹은 '사랑스럽다'라고 경탄하시는 창조주의 마음은 어린이들이 간직하고 있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러던 어린이가 성인이 되어갈수록 세계는 '시시한 세계'로 변합니다. 아름답고 사랑스럽던 세계는 아무것도 그냥 얻을 수 없는 가혹하고 무자비한 세계가 됩니다. 그렇게 차츰 경이감을 상실한 인간은 서서히 죽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우리는 내 안에 있는 맑고 순수한 아이를 그리워하며 삽니다. 한 시인(앤 머로 린드버그, Anne Morrow Lindbergh)이 이 <어른과 아이>를 노래합니다.

"일하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어른 / 밥벌이를 하고 내일을 계획하려 / 근심스럽게 저녁 하늘을 훑어보고 / 걸을 때 서두르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어른 / 이웃을 의심하고 가면을 쓰고 / 갑옷 입고 행동하며 눈물을 감추는 것은 어른 // 노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아이 / 미래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 기쁨으로 노래하고, 경이로워하며 울 줄도 알고 / 가면 없이 솔직하고 변명을 하지 않고 / 단순하게 잘 믿고 가식도 전혀 없이, / 사랑하는 것은 우리 속에 사는 아이." 저는 내 속에 있는 이 아이가 무척 그립습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소파(小波) 방정환 선생의 주도록 세계 최초의 <아동인권선언>을 채택되고 어린이날이 제정된 것이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의 일입니다.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린이는 우리가 버리고 떠나온 인생의 뒤안길이 아니라 앞으로 도달해야 할 미래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의 말처럼, "어린이는 인간이 성취해야 할 미래와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στραϕῇτε, 스트라파테)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천국은 어른이 되는 곳이 아니라 어린이가 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이'가 되는 곳입니다. 그들이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이화가 올해로 창립 138주년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이화의 시작도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먹일 것이 없었던 어머니가 데려다 맡긴 어린이 '꽃님이'와, 전염병에 걸려 집에서 쫓겨나 서대문 성벽 아래 버려진 여인의 딸 '별단이'였습니다. 세상의 변방에 '버려진 아이들'(waif)을 어린이를 반기시고 안으로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영접하고 품에 안아 세상의 한가운데 우뚝 세운 역사가 바로 이화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이화의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이웃의 고통에 깊이 연민하며,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에 경이로운 마음을 감탄하고 경탄할 줄 아는 '하나님의 어린이'로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어린이로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은총의 새 삶을 시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해인 님의 <어린이에게>를 읽어드립니다.

"잃었던 동심 그리워 / 어린이를 만납니다 / 맑은 눈 / 정직한 마음 찾고 싶어 / 갓 태어난 아기를 안아 봅니다 /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 혼잣말의 기도로 부탁합니다 / 다시 시작하게 해 다오 / 다시 노래하게 해 다오 / 거짓 진실 / 거짓 평화 / 거짓 사랑은 / 처음부터 이 땅에 /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 다오 / 어른도 어린이처럼 / 꿈을 많이 꾸어 행복한 나라에서 / 너처럼 웃으며 살게 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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