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온에 가거든
양광모
노을 몇 점 주우러 가는 도로에
촘촘한 간격으로 설치된
수십 개의 과속방지턱을 넘으며
상처란 신이 만들어 놓은
생의 과속방지턱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았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야 한다는
느릿느릿 도착한 와온 바다,
엄지손톱만한 해가 수십만 평의
검은 갯벌을 붉게 물들이며
섬 너머로 엉금엉금 지는 모습을 보자면
일생을 갯벌 게구멍 속에서 지내도
생은 좋은 일만 같았다
그대여, 와온에 가거든
갯벌 게구멍 속에 느릿느릿 들어앉았다 오라
밀물이 들기까지 생은 종종 멈추어도 좋은 것이다
시인(1963- )은 인생이란 목표가 아니라 해석이라고 가르친다. 목표의 관점과 해석의 관점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차이를 판별하는 기준은 상처이다. 목표는 상처를 기피하지만 상처는 해석을 요구한다. 상처가 해석되면 더 이상 상처가 아니나 해석이 되지 않으면 목표도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해석은 상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에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가령,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의 와온 바다는 지리적 장소이지만, 인생을 반추할 해석적 동기로서 보다 더 유의미하다. 인생도 목표보다 상처에 대한 해석으로써 그 의의를 실현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상처란 신이 만들어 놓은/ 생의 과속방지턱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았다." 이 해석은 신의 생각을 빌렸으므로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통찰을 제공한다. 그렇게 "생각해 보았[더니]/ ... 생은 종종 멈추어도 좋은 것이다." 해석은 이처럼 상처의 의의를 재발견한다.
인생의 여정은 "노을 몇 점 주우러 가는 도로"와 같다. 우리는 목표가 있으면 앞으로 나아간다. 목표는 이상 혹은 결핍이 수립하며 인생의 여정을 견인한다. 그 과정에 효율이 고려된다. 왜냐하면, 그 길에 "촘촘한 간격으로 설치된/ 수십 개의 과속방지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턱들은 실패의 상처이다. 효율의 관점에서는 속도방해턱이다. 그러나 사람이 목표를 세우면서 방해물을 설치할 리가 없으므로 시인은 신이 그 턱을 매설했다고 판단한다. "상처란 신이 만들어 놓은/ 생의 과속방지턱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았다." 그의 생각에 상처는 길을 가는 한, 반드시 넘어야 하는 조건이다. 그는 그 이유를 인생의 여정을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궁극적으로 말해서, 상처도 목표와 효율에 기여한다.
그는 수십 개의 상처를 넘어서면서 "느릿느릿 도착한 와온 바다,"에서 장관을 목격했다. "바다" 뒤에 찍힌 쉼표가 숨 막히는 순간을 대신한다. 상처를 겪고 성찰하느라 느리게 목적지에 도달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더 영광스럽다. "엄지손톱만한 해가 수십만 평의/ 검은 갯벌을 붉게 물들이며/ 섬 너머로 엉금엉금 지는 모습을 보자면" 그 순간이 얼마나 장관인지! 비록 결실이 "엄지손톱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과정 중에 품었던 온갖 검은 생각들을 그 영광으로 물들였다. 물론, 그 해도 곧 섬 너머로 지고 말겠지만, 엉금엉금 지며 영광의 빛을 발산한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야 한다"는 가르침의 우주적 표현이다. 인생의 상처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면, "일생을 갯벌 게구멍 속에서 지내도/ 생은 좋은 일만 같았다."
"갯벌 게구멍" 속에서 지내고자 인생의 목표를 세우지는 않았을 터! 필경, 게구멍은 불가피한 실패의 현장이다. 게가 그 속에 들어가서 자신을 숨기니까 그 구멍은 상처이다. 그러면 상처 속에서 일생을 사는 것도 "좋은 일만 같[아지는가]"? 그럴 리가! 갯벌의 구멍은 위가 열려 있어서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출구이므로 게구멍에서 지내라고 해서 일생을 상처에 싸여 살도록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그 상처에서 나오면 장관을 목격하므로 그 상처는 그 영광으로 가는 그저 "수십 개" 정도의 과속방지턱일 따름이다. 그 해가 게처럼 엉금엉금 지므로 상처를 넘어선 사람은 그 영광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누릴 수 있게 된다.
와온 바다의 낙조를 보며 인생의 의미를 해석하게 된 시인은 이제 확신에 차서 독자를 가르친다. "그대여, 와온에 가거든/ 갯벌 게구멍 속에 느릿느릿 들어앉았다 오라." 와온이 상처를 넘어서 달성한 목표를 상징함에도 그는 갯벌 위에서 그 목표의 영광을 만끽하라고 주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를 환기한다. 그 상처를 오래도록 반추하라는 뜻이다. 사실상 그는 "상처란 신이 만들어 놓은/ 생의 과속방지턱"이라고 선언한다. 이는 영광의 순간에도 과속방지턱의 의의를 통찰할 필요를 알린다. 왜냐하면, "밀물이 들기까지 생은 종종 멈추어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밀물이 들면, 게구멍은 막히고 숨도 빛도 차단당하는 죽음의 시간이 도래한다. 그 운명의 시간이 닥칠 때까지 인생은 상처 때문에 "종종 멈추어도" 그 상처에 대한 성찰 자체가 인생의 목표로서 결실한다. 그 결실이 영광스럽게 빛난다. 그래서 상처는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은 상처를 용납하는 힘이다. 인생에서 목표와 효율은 성공과 실패를 전제한다. 성공의 영광뿐만 아니라 실패의 거부도 인생의 열의를 자극하지만, 실패의 기억은 상처를 남긴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고 배우며 납득하기는 해도 그 교훈이 상처를 미화할 근거는 아니다. 상처는 해석의 대상이지 유도하고 권유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패를 두려워하고 상처를 부끄러워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상처가 없으면 깨달음이 없으니 이 모순을 해결해야 확신에 찬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 확신은 상처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다.
다윗은 일생동안 "수십 개의 과속방지턱을 넘으며" 그 턱을 하나님이 매설하셨음을 깨달았다. 결국, 인생의 와온 바다에 도달한 영광의 순간에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편 34:18). 물론, 이 고백은 격심한 고통의 순간에 구원의 소망을 놓지 않으려는 치열함을 토로하고 있지만, 그런 상처가 하나님이 임재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통로임을 암시한다. 그의 해석은 인생의 상처가 구원의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 알린다.
※성경을 읽을 때 "자세히 보아야/ 예[쁜]" 성품을 찾을 수 있다. "오래 보아야/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말씀의 생명력을 확인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은 이처럼 성경 읽기의 과정을 형상화한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시의 형상화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과정에 적용하면 그 말씀의 의미를 형상으로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소박한 논리를 따라 의미의 형상화 작업에 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결부해보았다. 글쓴이는 반포소망교회에 시무하는 이인기 목사다. 매주 한편의 시를 다룰 예정이다.-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