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
피천득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 9 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시인(1910-2007)은 만년에 쇠해가는 자신의 처지를 거슬러 그 순간의 생명력을 확인하고 있다. 그는 화자의 상념을 통해 그 역설적 순간을 실현한다. 사실상 그는 인생의 허무에 저항하고 있다. 그가 별을 쳐다보는 "이 순간"을 경탄하는데, 알고 보니 그 순간은 늙음의 끝자락에서 쇠락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는 곧 귀가 멀 것이며, 친구들이 자기를 잊어버릴 것이고, 자기 또한 생각조차 할 수 없어 글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 순간들을 화려하고 찬란하고 즐겁다고 선언한다. 이 선언의 근거가 된 "사실"들은 "이 순간"을 허무와 연결하려는 자연스러운(?) 경향에 저항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가 "하더라도," "하더라도," "오더라도"라면서 저항하는 "이 순간"만큼은 생명의 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사랑이 쇠락의 상황에서도 새로운 생명의 기회를 찾아내게 한다. 그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는 곧 별들을 쳐다보지 못하며, "귀가 흙이 되고," 친구들의 기억이 사라지며, 생각조차 없어지는 죽음의 상황이 다가올 것을 알고 있다. 2-4연에서는 그러한 상황이 제시되어 있으나 첫 연에서는 삭제되어 있다. 그 삭제 자체가 그가 처한 허무한 현실을 입증한다. 그러니까 그의 현실은 사실상 쳐다볼 "별"이 없는 상황이다. 그 상황 속에서 "흙이 되고" 사라지며 없어지게 될 것이니까 허무하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을 배경으로 그는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들을 공표하고 있다. 그는 허무로 쏠리는 인생의 도도한 흐름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새로운 생명의 기회를 포착한다.
그의 마음의 현장을 상상해보라. 지금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이 울려 퍼지고 친구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불편하지만, 그는 교향곡의 감흥을 떠올리며 그 불편을 초월한다. <합창>은 이러한 초월의 상징이다. 이 곡은 베토벤이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작곡했으며 음악사상 처음으로 성악을 활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한 조건들은 이 곡이 선사하는 감흥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둘레에 있는 친구들에 대한 기억이 가물거리더라도 그들과 함께 웃는 웃음은 절대고독으로 빠져드는 걸음을 멈추게 한다. 비록 생각마저 자신을 버리는 위기가 닥치더라도 그 감흥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별을 쳐다본 시각적 감흥과 교향곡의 음률이 실어 나른 청각적 감흥과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피부를 간질였던 촉각적 감흥을 모두 아우른다. 그는 죽어가고 있음을 명백히 인지하는 "이 순간"에도 그 순간에 이처럼 생생한 오감을 덧입히고 있다. 이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의 "사실"은 그가 지닌 역전의 생명력을 반증한다. 역전은 현실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때 이루어진다. 그렇게 허무를 이기게 하는 힘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쇠락의 이면을 보고 소망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생명의 가치를 믿게 한다. 그로써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므로 현실에 대해서 감사하게 된다. 비록 감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이 순간"에 대해 사실상 감사하고 있다. 그가 그 순간을 화려하고 찬란하며 즐겁다고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육체적 쇠락이 진행되는 "이 순간"이 쇠락을 초월하는 공간이 되므로 감사할 일인 것이다. 시간 개념이 육체의 생생한 활동으로 가득 찬 공간의 개념으로 변한다. 추상적인 시간이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실체로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해석의 태도가 시간의 한계도 초월한다.
현실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태도는 신앙생활의 핵심에 해당한다. 물론, 그 해석에는 하나님이 참여하신다. 시편 기자가 제시한 사례를 보자.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편 118:22-23). 그는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처지이다. 그 돌은 집을 짓기에는 쓸모가 없다. 그러나 그 돌이 그 집의 주춧돌이 되었다. 무가치하다는 판정으로부터 그 판정을 역전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설의 실현은 기적 같은 은혜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는 상처투성이에다 모가 나기도 해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돌과 같았던 자신을 하나님이 선택해서 패인 상처에 새 살이 돋게 하고 욕망 때문에 모가 난 인생을 다듬어서 교회의 구성원으로 만드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버려진 인생이라고 좌절하고 있었는데 거룩한 무리의 영적 건축물을 지탱하는 주춧돌이 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인생을 그렇게 해석했다. 그 결과, 그는 지금은 "별을 쳐다[보고]" 있다. 그의 눈에는 사랑이 가득하다. 이제 그의 인생의 순간순간은 그 사랑이 이끄는 대로 보고 듣고 느끼는 감흥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 감흥에 동반하는 감사는 현실의 곤고함을 초월하려는 의지를 생성할 것이다. 그 순간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간적으로 확인하며 죄의 상태를 초월하려는 소망을 실현하게 된다.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그러므로 이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