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5일 전국사제일천인시국선언의 결의에 따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곳 용산참사 현장에 천막을 세웠고, 전국에서 달려온 사제들이 매일 저녁 희생자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위령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사제들이 폭행을 당하고, 옷이 찢기고, 길거리에 내던져지며 갖은 욕설로 모욕을 당하고, 실신을 겪기도 하였지만 가난한 이들과 고난을 나누는 이곳에서 우리는 한없는 영광과 기쁨을 느낀다. 철거민들이 목숨을 빼앗겼던 빌딩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골고타요, 여기서 만나는 유가족들은 십자가 아래 오열하던 예수님의 어머니와 복음의 여인들이다. 용산은 바야흐로 모든 신앙인들이 되돌아가야 할 죽음과 부활의 자리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오늘의 현실은 무섭고 슬프기만 하다. 첫째, 정부의 오만하고 부도덕한 태도가 그렇다. 그날의 참사를 희생자들이 자초한 응당의 결과로 확신하는 후안무치는 그렇다 치더라도 최소한의 사과와 재발방지를 바라는 유가족들의 당연한 요구마저 냉소로 일관하는 완악한 태도에서 우리는 참사의 진정한 원인을 보고 있다.
둘째, 재개발사업과 관련한 한국교회의 처신은 매우 미온적이다. 최근 한국교회가 도심재개발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이는 늦었으나마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가난한 세입자들과 원주민들이 처한 아픔과 거리를 두고 있다. 혹시 재개발사업에서 교회가 겪고 있는 불이익이 두려워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매우 떳떳하지 못한 일이다. 지금은 교회야 무너지고 쫓겨나더라도 불쌍한 서민들만큼은 그래선 안 된다고 매섭게 따지는 십자가의 정신을 회복할 때다. 그래야만 삶터와 일터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
셋째, 쉽게 잊어버리고 용납해버리는 우리 모두의 마음 또한 슬픈 일이다. 재개발의 비극은 이미 대한민국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을 뿐 언제든지 각자의 차례가 닥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온갖 사회적 불행을 남의 일로만 여기고 외면해버린다면 오늘과 같은 강자들의 횡포는 나날이 극심해 질 것이다.
이런 세 태도가 어울리는 동안 비극 반년이 되도록 망자 다섯 분은 눈을 감지 못하고, 유족들은 몸서리치는 현장에서 상복을 벗지 못하고 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우리는 용산 참사의 근원적 해결은 정부의 정당성뿐 아니라 우리 교회의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운명을 지켰던 사람들처럼 유가족들의 얼굴에 눈물이 그치는 순간까지 이곳 용산현장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제풀에 지칠 때까지 모른 척 하는 게 대수라고 믿는 청와대와 법원의 명령을 어긴 채 수사기록 3천 쪽을 감추고 있는 검찰, 그리고 진실을 숨기고 있는 경찰의 회개를 촉구한다. 우리가 이렇게 호소하는 것은 유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굴욕이 더 이상 견딜 수 있는 지경이 아니기 때문이며, 당장이라도 정부당국이 유가족들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오늘의 오만과 불성실로 인하여 정권은 더욱 큰 시련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디 모든 이가 착하고 너그러웠던 본심을 회복하기를 삼가 기도한다.
2009년 7월 16일
용산참사 현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