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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묵상] 봄길

이인기 목사(반포소망교회)

봄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시인(1950- )은 봄을 여는 힘이 사랑이라고 읊고 있다. 그는 봄이 시작되는 길목에 서서 봄이 그저 자연스럽게 다가온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자연의 질서대로라면 겨울이 지난 뒤에 자동적으로 봄이 오게 되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구절은 자연적 질서의 자동적인 흐름을 알리고 있지는 않다. 이 구절은 이후에 변주를 거치며 그 본의를 드러낸다. 그 구절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로 변한다. 그리고 그 변주는 이어서 이미지를 구체화한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즉 길은 봄길로, 그 봄길은 사람으로 변하고, 그 사람은 "끝없이 걸어가는" 존재로 구체화된다. 이어서 이러한 변주는 7-14행에서 다시 한 번 더 진행된다. 강과 새와 꽃잎의 단절과 실종과 소실을 이겨내고 봄을 여는 힘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으로 시각화한다. 물론, 그 사람은 사랑을 상징한다. 이렇게 시인은 자연의 의인화에서 그치지 않고 자연의 질서에 덧입혀진 인생의 진리를 넌지시 알리고 있다.

그는 왜 봄길을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가? 그는 봄의 길목에서 겨울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강물도 멈추고 새들도 돌아오지 않고 꽃잎도 흩어져버린다. 겨울은 "길이 끝나는 곳"이다. 공허한 적막과 죽음의 시간이 지배한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봄의 문이 열렸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흩어져도,"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길을 잇고 모으고 사랑을 회복하는 힘이 작용했다! 시인은 그렇게 현실을 거스르는 힘이 사랑이라고 밝힌다. 사랑은 모든 것들이 죽어버리도록 방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비존재의 압박을 거스르는 존재에의 용기(the courage to be)를 발휘한다. 그 용기는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 겨울의 끝에서 봄의 길을 열었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길에서 사람으로 이동한 점을 고려하면 그 사랑은 초자연적인 힘이라기보다 사람과 상관한다. 시선의 이동은 단순히 피사체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관점의 변화를 암시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을 여는 것이 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길도 인간이 열었다고 보는 것이다. 길이 길로 이어지는 것은 그 길을 만든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내디뎠던 인간의 발이 길을 만들었다. 그 사람은 삶을 사랑하는 존재이다. 그 사랑의 힘이 그의 발걸음을 옮기게 했고 길을 만든 것이다. 그는 사랑을 전달하고 구현하는 존재이다. 심지어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품은 사람이 생명을 불러온다. 강물이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꽃잎이 다 흩어져 버렸을 때 그 시점에는 죽음과 공허만 있다. 죽음과 공허의 현실에 집중하면 인간은 죽어버리고 허무에 싸이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길이 끝나는 곳"에 사랑을 품은 인간이 임했다. 그때의 인간은 겨울 속에 옹크리고 앉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봄길을 열어줄 인간, 참 인간이다. 참 인간은 현실이 암울함에도 불구하고 길을 만든다. 그는 암울한 현실을 거슬러 "스스로" 봄길이 되고 "스스로" 사랑이 된다. 그가 참 인간인 이유는 비존재의 현실을 거슬러 존재에의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생명을 "스스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시인은 참 인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 그는 매 문장이 끝날 때마다 "있다"고 확언한다. 그에게는 길이 끝난 곳에서도 길이 "있다." 스스로 길이 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스스로 사랑이 되는 사람이 "있다." 그는 가다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끝없이 만들어간다. 그에게는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생명이 "있다." 시인은 사랑의 힘을 믿고 있다. "있다"는 현상에 대한 기술(記述)이 아니라 역동적 의지의 표명이다. 그래서 "보라"고 외친다. 아무리 현실이 죽음과 같아도 사랑의 힘을 확신하면 현실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랑의 힘을 믿으며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디모데후서 1:7),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능력을 믿으며 사랑을 베풀고 근신하며 살기를 바라신다. 두려움에 빠지면 자기를 지키기 위해 이기적으로 변하고 이기심은 모든 죄악의 배경이 된다. 그러나 사랑을 베풀 때 이기심을 이길 수 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물리치는 길은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죽음도 없다. 오히려 사랑은 얼고 사라지고 죽어버린 관계를 녹이고 회복하며 살려낸다. 사랑은 죽음과 공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은 생명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봄을 연다. 인생에서 겨울을 이기고 봄길이 이어지도록 한없이 걸어갈 힘을 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에는 두려움을 유발할 요소가 없다. 그분의 사랑은 온전하기 때문에 두려움의 요소가 들어있을 수 없다.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 보여주신 그 사랑에 믿음을 강요하려는 협박적 의도가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그분을 두려워한다면 그에게는 그분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사랑을 온전히 믿는다면 우리도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하나님에게와 사람에게도]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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