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째 편지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다"(15장 10절)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바로 저의 고백입니다. 우선 부족한 저를 부르셔서, 함께 하나님 나라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신 향린교회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취임예식을 준비해 주신 서울노회 노회장님과 모든 노회 임원 목사님들, 설교하시는 강원구 원로 목사님, 권면의 말씀을 해 주시는 김경호 목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위대한 정신의 세계를 열어 주시고,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신 도올 김용옥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또한 멀고 가까운 곳에서 이 자리를 찾아 주신 모든 분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지난 100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출렁이는 세계 한복판에서 격동의 나날을 겪어 왔습니다. 그 사이 한국 개신교는 우리 사회의 근대화와 민주화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도시와 시골 곳곳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정치적으로 억압당하고, 문화적으로 소외된 이들 곁에서 희망이 되어 주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늘진 갈릴리 땅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이셨던 것처럼 한국교회 또한 그러했습니다.
향린교회는 그 이름처럼 '향기로운 이웃'으로서 힘들고 지치고 어려운 이들 곁에 있어 온 교회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사진은 향린교회의 의료선교팀이 1982년 5월 30일(토) 저의 모(母)교회인 교하교회에 와서 동네 주민을 상대로 진료하는 모습입니다. 이 사진에 제가 나오지는 않지만, 저는 당시 10살의 어린이로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렇게 향린은 언제나 그 누구보다 아파하는 민중들 곁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향린교회의 담임목사로 보내신 것은 아마도 이때 입은 은혜를 갚으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회가 돈을 추구하고 힘에 기대며, 비상식적인 '묻지마 믿음'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억압하고 미워하기에, 뭇사람에게 손가락질당한 지 오래입니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날로 추락하고, 그리스도인이지만 교회를 나가지 않는 교인들, 이른바 "가나안 교인"들도 이백만이 넘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떠난 이들이 다시 가고 싶어 하는 교회 1순위는 "올바른 목회자가 있는 교회", 2순위는 "건강한 공동체성이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향린교회는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공동체 교회', '입체적 선교', '평신도 교회', '독립교회'라는 창립 정신을 가지고 세워졌고, 40주년을 맞아 발표한 22개 교회 갱신 선언을 통해 시대적 과제를 감당했고, 작년에 70주년을 맞이하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목회의 남은 열쇠는 이제 제게 넘어왔습니다. '민중신학'이라는 한국신학의 토대를 놓으신 안병무 선생님이 꿈꾸셨던 공동체의 뜻, 교인의 마음을 어루만져 교회를 성장시킨 김호식 목사님의 목회, 통일 운동을 비롯해 사회 선교의 기치를 올리신 홍근수 목사님의 예언자 정신, 평신도 중심 사역으로 개혁하는 참 교회를 위해 헌신하신 조헌정 목사님의 섬김, 코로나 위기를 넘어서서 광화문 시대의 기초를 놓은 김희헌 목사님의 수고를 이어, 이제 제가 올바르게 목회하는 길만이 남겨진 것입니다.
청빙 요청을 받고 지난 2개월의 시간 동안 저는 '그리스도교가 과연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삶에 무엇'이며, 또 '목회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해야 할 목회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총으로 넉넉한 마음을 지니고,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삶을 나누며, 우리 사는 세상을 온전히 치유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에서 넉넉한 마음을 갖기도 쉽지 않고, 이 세상을 치유하는 길은 멀게만 느껴집니다. 돈이 전부이고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만을 좇는 무한 경쟁 세상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것조차 힘든 이들이 많습니다. 어리석고 무능한 정부의 실책은 우리가 쌓아온 소중한 모든 가치와 덕목들마저 마구 망가트리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하셨던 함석헌 선생님은 '기독교는 인생의 종교이지만 역사의 구원 없이는 개인의 구원이 없다'고 하셨고,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이지만 개개인의 덕을 쌓음 없이는 진보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곤궁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고통당하실 때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도 있다."
저는 한국기독교장로회 경기북노회의 작은 시골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곤궁한 우리들의 인생을 위로해 주는 곳이었습니다. 동시에 우리 교단의 선배 목사님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고통당하실 때 바로 그곳으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믿음의 선배들이 이룬 역사와 노력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향린교회가 이러한 신앙 전통을 이어,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진정 향기로운 이웃으로 설 수 있도록, 또 우리가 모두 청년 예수의 제자가 되어 신음하는 모든 생명을 섬기는 참 인격이 되도록, 향린교회 교우들과 함께 제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잘 감당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모험에 참여하는 우리의 여정을 위해, 여기 모이신 여러분 모두 함께 기도해 주시길 빕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2024년 11월 3일
한국기독교장로회 향린교회 한문덕 목사 취임예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