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 있어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시인(1955- )은 대추 열매가 영근 것을 보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다. 그 한 알 한 알이 "저절로," "혼자서" 결실하지 않은 것이다. 대추 한 알이 붉고 둥글게 여무는 데는 요동치는 천기(天氣)의 변화와 오랜 시간이 기여했다. 물론, 요동치는 날씨가 고난처럼 위협적이었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성장의 발판으로 삼은 것은 대추 열매 자신이다. 오랜 시간 인내할 수 있었던 것도 그것의 의지 때문이다. "~ 것일 게다"로 추정할 뿐이지만, 작은 몸체로도 풍파와 세월에 주눅 들지 않고 붉고 둥근 열매로 영글었으니 그 추정은 단정적 감탄으로 이어질 법하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대추 한 알을 보면, 세상살이의 이치를 깨칠 수 있는 것이다. 둥글어 서로 모습도 닮았거니와 이치조차 모두 성장, 혹은 성숙의 원리와 관계있다. 시어 "들어 있어서"와 "들어서서"가 채워져 무르익는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이는 대추 "한 알"의 이미지이기도 하므로 시인은 개별적인 주체의 성장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대추 한 알이 붉게 익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의 태풍과 천둥과 벼락과 번개를 거쳐야 한다. 이같이 당위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순전했던 초록이 붉게 변하느라 대추 알은 태풍 앞에서 눈뜨지 못하고 천둥소리에 귀가 먹먹해지며 벼락에 오금이 저리고 번개의 섬광에 새파랗게 질리기를 몇 차례나 겪었다. 그저 그렇게 시달리다 보니까 마치 겁먹은 듯이 붉게 변해버린 것이 아니라 "붉게 익히는" 과정을 거쳤으므로 그러한 천기의 요동은 성장의 발판인 셈이다. 그래서 천기의 요동은 대추가 통제할 수 없이 불가항력적으로 닥치는 시련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그 시련을 거치며 농익어서 붉게 물들었으므로 대추 한 알에는 그 불가항력의 기운이 "들어 있[을]" 것이다.
대추가 익는 표시는 색깔의 변화만이 아니다. 둥글어진다. 그런데 대추 열매야 원래 둥글지 않나? 대추는 타원형의 곡면체 속을 채워가며 그 덩치를 키우므로 둥글어진다는 것은 성숙해지는 과정의 다른 표현일 수 있겠다. 성숙해지는 데는 "무서리 내리는 몇 밤"을 지새우고 "땡볕 두어 달" 쬐며 "초승달 몇 날"을 마음졸여야 한다. 무수한 밤과 낮 등 여러 날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시간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무서리," "땡볕," "초승달"의 이미지처럼 쓸쓸하고 외로웠던 기억들로 속을 채워야 한다. 늦가을의 무서리, 한여름의 땡볕, 그리고 어느 불특정한 날의 초승달 등 계절의 순서와도 상관없이 어쩌면 무작정 기다리며 그 쓸쓸함과 외로움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속에서 녹여야 한다. 그래야 원숙해진다.
무엇이든 성장하며 원숙해지는 것은 저절로 되거나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성장은 과연 초월적인 힘의 조련을 거치면서 과거의 한계를 초월하는 과정이다. 태풍, 천둥, 벼락, 번개가 모두 하늘이 땅에 베푸는 섭리의 양태이므로 그러한 시련이 닥치는 순간에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고난인 것이다. 고난에 의해 함몰되지 않으려면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고난을 하늘이 우리를 성장시키고자 섭리하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대추의 작은 몸체가 그 사실을 시각화한다. 그러나 그렇게 고난을 대하는 과정은 인내를 요구한다. 으스스한 무서리를 맞고 이글거리는 땡볕 아래서 익으며 초승달처럼 고적하게 여러 날을 견뎌야 한다. 이 과정을 "한 알"이 혼자서 겪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맞다. "한 알"마다 모두 겪는다. 그러나 그저 고난에 노출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인내란 고난 앞에서 자기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 하늘의 섭리와 협응하려는 또 다른 자아의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는 없다." 외적인 풍파와 내면의 의지가 협응한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추 한 알에도 세상의 이치가 녹아 있다.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세상에서 고난은 태풍같이, 천둥같이, 벼락같이, 번개같이 닥친다. 만일 그 위용에 눌려 두렵다고 피하면 그 고난의 외피 아래 감춰진 하늘의 섭리를 놓치게 된다. 하늘의 섭리는 우리가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충만하도록 작용한다(창세기 1:28). 그러나 하늘의 이런 뜻도 우리의 두려움이 방해할 수 있다. 두려움은 자기보호의 순기능을 하는 반면에, 고난 앞에서 우리를 더 움츠러들게도 한다. 그래서 작은 몸체로도 두려움을 이겨낸 대추 한 알에게서 하늘의 뜻을 읽어야 한다. 그처럼 고난을 성장하고 원숙해지도록 훈련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 훈련을 거칠 때, 붉기도 전에 낙과한 대추 알처럼 세상살이의 길바닥에 나동그라지지 않게 된다. 그러나 어느 누가 고난이 닥쳤을 때 바로 극복할 수 있으랴! 빠져나올 수 없이 덮인 고난의 지붕 아래서는 하늘의 섭리를 왜곡시켰던 두려움을 견디고 자기 자신을 격려하며 그 섭리를 원활하게 소통시키려는 내면의 작업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이후에 대한 소망이 결국 고난의 날 수를 줄인다. 인내의 의지는 쓰나 그 열매는 달다. 이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고난으로 말을 건다. 고난을 통해 깨달음을 주고 성장하게 한다. 그 훈련을 거치며 우리는 원숙해진다. 그 과정에 우리는 세상의 이치를 소통하는 언어를 배우게 된다.
신앙생활도 부단한 훈련의 과정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붉고 둥글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번개 몇 개"를 거치고 고독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비록 그 약속이 은혜로 주어졌어도 "값싼 은혜"(cheap grace)가 되지 않으려면 성숙한 믿음의 그릇으로 그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성숙한 믿음은 훈련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 훈련의 과정을 완수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격려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10).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시므로, 그 말씀을 믿는다면 작은 몸체의 대추 알이 온몸으로 실현한 교훈을 거울삼아 훈련의 과정을 인내해야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통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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