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고성애)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시인(1948-1991)은 시집 『이 시대의 아벨』(1983)에 이 시를 발표했다. 아벨은 형에게 살해된 비운의 인물로서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피를 쏟았다. 마침, 그 이름도 '숨, 허무, 공허'의 뜻을 지니고 있다. 후세대의 해석적 작명일 수 있으나 그의 운명이 기구하다. 시집의 제목과 이 시의 제목을 연결하면, 이 시대 사람들의 영혼은 아벨의 처지와 같다. 그들은 아벨처럼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영혼에 상처를 입었고 "상한 영혼"이 사람들의 보편적인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아벨은 그 조건이 보편적이라 하더라도 상처가 유발한 "고통과 설움"에 대처할 용기를 발휘한다. 시인의 청유적인 목소리에 그 용기가 실려 있다.
그 목소리는 낙관적인 세계관을 표명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의 신산한 경험을 백안시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그녀에게 "상한 영혼"은 뿌리가 있으나 상처 난 갈대와 같다. 흔들릴 때마다 그 상처가 얼마나 쓰리고 아프겠는가? 그리고 "상한 영혼"은 뿌리 없이 떠도는 부평초 잎과도 같다. 물 따라 흘러가는 처지가 얼마나 서럽겠는가? 이러한 은유는 그녀가 물가에서 상한 갈대와 떠다니는 부평초를 보면서 거기서 사람들의 영혼의 상태를 발견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시는 그러한 경험을 배경으로 숨기고 극복과 희망의 길을 전면에 내세운다.
시인이 그렇게 한 근거는 이것이다. 그녀는 갈대가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갈대가 흔들리고 있는 물가에서 부평초가 "뿌리 없이 흔들리[지만]" 어디든 물이 고인 곳에서는 "등불"처럼 꽃을 피우는 것을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녀는 이미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이것이 "하늘 아래선" 삶의 원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상처 혹은 뿌리 없음이 좌절할 일이 아닌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영혼이 상처 때문에 "고통과 설움" 속에서 스러지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녀가 "상한 영혼을 위하여" 극복과 희망의 길을 청유한 것은 그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그래서 그녀는 확고한 어조로 "상한 영혼"을 설득한다. 상처의 고통이 죽음과 같더라도 "충분히 흔들리자"고 힘주어 말한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된 설움이 영혼을 온통 감싸더라도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고 반문한다. 해가 지듯이 물도 흘러서 어딘 가에서는 고일 것이기 때문에 작정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러므로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고자]" 작정할 일이다. "고통과 설움"이 극복과 희망을 위한 작정을 방해하기는 하겠으나 그것은 마치 "두 팔로" 바람을 막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 작정은 "밑둥이 잘리어도" 그리고 "가기로 목숨 [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작정은 "뿌리 깊은 벌판"이 된다. 벌판 자체가 깊은 뿌리를 가졌으므로 물가와는 달리 "고통과 설움"을 훨훨 지나칠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작정이 인생의 보편성에 대한 통찰과 삶에 대한 도덕적 용기만으로 생기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알리고 있다. 작정이라는 것이 "두 팔"을 지나쳐 오는 바람과 같기 때문이다. 바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 수 없으나 분명히 우리 곁에 있다. 마찬가지로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비록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어도 그 "손 하나"가 곁에 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믿음에 해당한다. 이 믿음이 도덕적 용기의 토양인 것이다. 이 믿음이 그 "벌판"의 뿌리이다. 시인은 <서울 사랑-절망에 대하여>에서 "하느님을 모르는 절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쁜 우매함인가를/ 다시 쓸쓸하게 새김질하면서/ 하느님을 등에 업은 행복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맹랑한 도착 신앙인가도/ 토악질하듯 음미하면서" 참된 믿음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밝힌 적이 있다. 그녀는 절대자의 섭리가 우매한 절망이나 맹랑한 도착이 아니라 생명의 기회를 열어주는 것임을 믿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신앙생활에서 도덕적 용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르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 16:24-25). 믿음의 길에는 상처를 안고 살아야 하는 "고통"과 떠돌아야 하는 "설움"이 있지만, "뿌리 깊은 벌판에 서[고자]" 하는 작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작정할 수 있는 근거는 그 벌판에로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다]"는 보다 근원적인 믿음이다. 이것은 절대자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다. 그 섭리는 이렇게 베풀어져왔다. "뿌리가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이] 돋[아]" 난다. 그리고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갈]" 데가 없다. 이러한 섭리가 바로 손을 마주잡고 "고통과 설움"을 이겨낼 토대인 것이다. "상한 영혼"에게 영원한 눈물도, 영원한 비탄도 없다고 격려할 논리적 근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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