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편지
곽재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 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시인(1954- )은 밤과 아침의 경계에 서서 "존재의 순간"(the moment of being)을 경험한다. 그 순간에는 비존재(non-being)의 장막이 걷히고 존재의 영역인 빛과 생명과 깨달음이 동시에 생겨난다. 그는 그 순간을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 ... 희망의 샘"을 눈앞에 그리는 것으로 형상화한다. 지금 그는 여전히 어두운 새벽에 절망과 같은 잠을 깨고 일어나 있다. 이때 아름다움이 그를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나도록]" 연출하고 그는 "고통하는 법"을 다시 익히고자 다짐한다. 그 순간은 존재에의 희망이 실현된 상황과 다르지 않다. 이 시는 연의 구분이 없으나, 내용상 "새벽에 깨어나 ...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 쓰기 위하여"로 나뉘고, 마지막에서 서두의 내용이 다시 반복되는 구성을 갖고 있다. 다만, 마지막 "연"에서는 첫 "연"에 나온 "사랑"이 "희망"으로 바뀌기는 했다. "희망"이 이 시의 자안(字眼)이다.
내용상 첫 "연"에서 화자는 새벽에 잠이 깬다. 무엇이 그를 깨웠는가? 아침에 대한 염려가 밤의 안식을 즐기지 못하게 한 것일까? 새벽에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상황이 그 의문을 해소해준다. 잠들기 전까지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이]" 준동했던 여파가 눈시울을 붉히게 했고, 그 때문에 밤잠을 설친 상태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새벽에 깨어났더라도 그는 그러한 염려의 중압감에 눌려 있지 않다. 그는 새벽하늘에서 별을 보고 있다. 그 별은 꿈을 대변한다.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그 샘은 눈에 바로 띄지는 않을 만큼 깊숙이 있으나 분명히 존재하며, 마르지 않는 사랑으로 용솟음치고 있다. 그는 그 꿈을 믿고 있다.
그 믿음이 다음 "연"의 동력이다. 비록 한낮은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에 지배당하고 새벽까지 인간의 혼들은 눈시울을 붉히지만, 그 속사정을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그는 별을 본다. 그 믿음 때문에 인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그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그는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을 느꼈고, 그것이 아름다움, 혹은 아름다운 일이다. 사실상 그 뜨거움이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으로 인해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에 사로잡히지 않게 했기 때문이다.
3"연"에서 그 아름다움이 또 다른 형상을 띤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그 다짐이 아름답다. 현실에 절망하기보다 오히려 고통을 수용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인생을 사랑하며 꿈을 품고 산다는 증거이다. 그 꿈은 세 번 반복되는 "위하여"에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이제 밝아 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현실의 절망을 인내하고자 한다. 그 꿈의 목적의식이 분명하다. 그는 어둠으로부터의 자유, 신이 허락한 온기와 향기로운 공기, 그리고 사랑의 열정을 누리며 발휘하고 싶다. 각 "위하여"는 동등한 무게를 가진 듯 배치되어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로 수렴된다. 그 사랑의 마음 때문에 그는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을 견뎌낼 것이다. "새벽 편지"는 이러한 "존재의 순간"을 영구적으로 향유하려는 시도이다.
마지막 "연"은 아마도 "새벽 편지"의 내용일 듯하다. 첫 "연"을 반복하고 있으므로 그 꿈이 인생에 대한 사랑의 표현임을 사실상 선언하는 셈이다. 다만, 첫 "연"에서 "사랑의 샘"이 별을 보게 하는 동력이었다면, 여기서 그 샘은 "희망의 샘"이 된다. 인생에 대한 끊이지 않는 사랑이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을 이룬 것이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이 꿈을 키우고, 결국, 현재의 고통을 참는 법을 익히게 했으므로 인생의 희망은 마르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시에서 두드러진 점은 화자가 경계선에서 좌고우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새벽에 깨어나서는 붉어진 눈시울에 괘념하지 않고 오히려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이 다시 닥쳐올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을 선뜻 만난다. 그는 그 뜨거움의 깊숙함이 "사랑의 샘"의 깊숙함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마르지 않는" 깊숙함을 믿고 있기에 인생의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을 사랑하고자 다시 다짐한다. 그래서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가 적힌 새벽 편지는 자기 고백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너"는 연인일 수 있으나 인생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므로 나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새벽 편지는 "존재의 순간"을 깨달았음을 자신에게 알리는 메시지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에, 새벽하늘의 별이 더 반짝인다고 믿으며, 마르지 않고 출렁이는 생명의 열정을 품고서 아침을 맞이하고자 한다. 그 새벽은 "희망의 샘"과 동의어이다.
물론, 화자는 공상에 빠져 있지 않다. 그는 현실의 고역과 눈시울을 붉힐 처지로부터 도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고통하는 법"을 익히고자 다짐할 내면의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고통을 수용할 마음이 희망의 근거이자 지속할 동력이다. 이 역설이 "존재의 순간"을 대변한다. 사실상 신앙생활도 "존재의 순간"으로 구성된다. 인생의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을 겪으며 눈시울을 붉힐 때 하나님을 바라보며 좌절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것이 신앙인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하도록]" 격려하시는 "희망의 샘"이다. 그 희망은 그분이 지닌 인생에 대한 "사랑의 샘"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이것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우리가 그분께 보내는 새벽편지의 내용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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