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컬 운동은 무엇인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것은 그 범주도 문제이거니와 그 다양성도 문제일 것이다. 에큐메니컬이란 말은 본래 그리스어인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비롯됐다. 신약성경에만 15회에 걸쳐 쓰인 오이쿠메네는 세계, 우주, 땅이란 뜻으로 여러 차례 사용됐다. ‘하나님의 선교’(Missi Dei)란 새로운 선교관으로 기존 보수·복음주의 선교관을 송두리째 흔들기도 했던 에큐메니컬. 때문에 에큐메니컬은 정의, 평화, 인권, 평등 그리고 통일 등의 다양한 사회 현안에 큰 관심을 갖고, 실제적으로 접근했다. 이 에큐메니컬 운동은 한국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교회의 분열엔 ‘교회 연합과 일치 운동’으로 민족의 분단엔 ‘평화 통일 운동’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
혹자는 에큐메니컬 운동을 “(에반젤리컬과 함께)그리스도 몸의 한 지체”로 혹자는 “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집안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도 에큐메니컬에 대한 소개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이 때문에 에큐메니컬 운동이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선도했던 과거 금빛 영광을 잃고, 위축됐다는 말에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본지는 7월 14일부터 매주 월요일 총 7회에 걸쳐 에큐메니컬 운동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에큐메니컬 운동 이해’(대한기독교서회, 2006)를 저자 안재웅 박사의 동의를 얻어 연재한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권위자 안재웅 박사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총무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을 역임했고, 홍콩에 주재하면서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 아시아 태평양지역 총무와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총무를 역임하는 등 평생을 에큐메니컬 운동에 종사했다. 저자의 염원대로 위축된 에큐메니컬 운동이 이 연재를 통해 보다 널리 알려져 옛 활기를 되찾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 편집자주
2 화해와 치유를 이루어 가는 교회
▲ 저자 안재웅 박사 ⓒ베리타스 DB |
요즘 아시아는 점차 세계의 관심을 모으는 대륙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제정치와 경제, 문화와 종교, 과학과 기술 등 괄목할 만한 일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활력을 일으키고 있다. 미래학자들에 의하면 21세기는 아시아, 태평양 시대가 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시아”라는 말은 어디서 유래되었을까? 아시아라는 말은 그리스어 “아수(asu)”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해가 뜬다(sunrise)”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며, 유럽은 “에렙(ereb)”즉, “해가 진다(sunset)”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해는 아시아에서 떠올라 유럽에서 진다는 것이 유럽 사람들의 생각이었고, 이들이 만들어 낸 말이 결국 “아시아”라는 것이다.
아시아에는 세계 문명과 종교 발상지가 있고, 기독교의 여러 종파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아시아 교회는 어떻게 유지되었으며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매튜(Koshy Mattew)는 여러 가지 전승을 바탕으로 해서 아시아 최초의 교회는 인도의 성 도마(Mar Thoma)교회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한 분인 도마가 AD 52년에 인도의 남부에 있는 말라바 해협을 통해서 케랄라 지방에 왔다는 것이며, 코친 지역을 중심으로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웠다고 믿는다.
도마는 군다포루스(Gundaphorus)왕의 환심을 얻게 되어 왕으로부터 교회를 세우도록 돈을 하사받았으나,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돈을 모두 써버리고 만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은 도마를 감옥에 가두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의 동생이 꿈을 꾸었는데, 왕을 위한 성전이 미니 천국에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생이 이 꿈 잉기를 왕에게 전하자 왕은 도마를 즉시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믿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도마는 일곱 교회(Malian Kara, Chavakad, Parur Near Alwaye, Gokamangalam, Niranam, Nilakkal, Quilon)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도마는 마드리스까지 올라가 복음을 증거 하다가 순교했다고 하지만,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할 역사적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전설과 유품 등을 통해서 확증을 갖고 있을 뿐이다.
도마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성 도마교회인데, 이 교회는 182년-189년경에 이미 많은 교인들을 확보했다는 것이며 오늘까지도 도마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제 1차 에큐메니컬 공의회기AD 325년 니케아에서 열렸을 때 인도의 존(John) 주교가 아시아 교회를 대표해서 참석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또한 635년 중국의 당나라 때, 경교(景敎)가 소개되었다는 사실도 비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1625년에 발견된 한 수도원 안에 있던 비석의 비문을 통하여 확인되었는데 이 수도원은 638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시아 개신교의 역사는 서방 선교사들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며, 이들은 교회를 세우고, 학교와 병원 등을 뒤이어 건립함으로써 서구 문명의 가교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개신교 서방 선교사들이 최초로 세운 교회들의 역사를 보게 되면, 인도(1793년), 스리랑카(1894년), 중국(1807년), 미얀마(1813년), 태국(1831년), 인도네시아(1833년), 일본(1859년), 한국(1884년), 필리핀(1899년), 라오스(1902년), 베트남(1911년), 캄보디아(1911년)의 순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여러 교파의 교회들이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시아 최초의 에큐메니컬 회의
아시아 여러 나라에 교회가 설립되고, YMCA와 YWCA 등이 소개 되는가 하면 기독학생회(SCM)가 대학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성서공회와 기독교 서회 등이 각 나라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 에큐메니컬 국제회의는 주선되지 못하고 있었다.
웨버(Hans-Ruedi Weber)는 아시아 최초의 에큐메니컬 회의를 1907년 4월 3일부터 7일까지 도쿄 YMCA에서 개최된 “세계기독학생대회”라고 하였다. 이 대회는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직후여서 일본과 거리사의 긴장이 감돌던 때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를 주최한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의 부회장인 혼다(Yoichi Honda)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서 얻은 평화가 참 평화라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 했고, “이런 평화는 평화일 수 없다.”라고 잘라 말해다. 참가자들은 참 평화를 갈구하는 중보의 기도를 중국어, 프랑스어, 일본어, 한국어, 영어 등으로 간절히 기원했다.
도쿄 대회는 아시아 최초의 에큐메니컬 대회로서 “평화”가 그 첫 번째 의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대회에는 25개국으로부터 700여 명의 기독학생, 교수, 학생운동의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뿐만 아니라 하콘(Haakon)노르웨이 국왕과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미국 대통령으로부터 평화를 모색하는 대회의 성공을 비는 축전을 받았고, 에드워드 7세(Edward 7)대영제국의 국왕과 버나도트(Oscar Bernadotte)스웨덴 왕자로부터 비슷한 내용의 전문을 받았다. 이와 같은 전문은 대회의 분위기를 한층 북돋았고, 일본정부 역시 상당히 고무되어 외교 교육성 대신인 이토(Ito)후한 오자키(Y.Ozaki)도쿄 시장은 대회 환영사에서 “세계 25개국으로부터 참가한 여러분이야 말로 인종과 언어와 국적을 초월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와 자ㅐ라는 확신을 보여주어 크게 감명 받았다.”는 요지의 인사를 하였다.
이 대회가 남긴 강한 인상은 아시아는 아시아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한 점이다. 중국의 왕(C.T Wang)이나 인도의 아자라야(V.S Azariah)등은 서양의 기독교가 서양 사람들에 의해서 번창했듯이, 5천만 일보인과 4억의 중국인, 그리고 3억의 인도인들의 복음화는 아시아 크리스천들의 복음화 열정에 달렸다는 열정적인 강연을 해서 큰 감명을 일으키기도 했다. 예수께서 자기를 비우고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하였듯이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예수는 아시아의 왕(Jesus King of Asia)”이라는 대회 슬로건을 내건 획기적인 에큐메니컬 대회였다.
일본의 대표적인 신문들은 앞을 다투어 대회의 인상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마치 세례자 요한처럼 기독 학생들이 아시아의 복음화에 앞장서는 결단이 이 대회가 남긴 수확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특히 평신도들이 아시아 선교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 이 대회야 말로 에큐메니컬 운동에 새로운 선교 모델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윤치호 등이 참석하였다.
도쿄대회를 주관한 사람은 모트(John R. Mott)로서, 당시 WSCF 총무로 활약하던 에큐메니컬 운동의 대표적인 평신도 자도자였는데 WSCF 중앙위원회를 1922년 북경에서 개최하였다. 도쿄 세계대회를 치른 지 15년 만에 다시 아시아에서 모임을 갖게 된 것이다. 이 당시 중국은 1919년 5․4운동을 겪은 터라 민족주의 성격이 크게 고무되어 있었으며, 학생운동의 분위기는 사회봉사뿐만 아니라 사회변혁에 앞장서는 주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1917년, 칭화대학이 북경에 설립되었고 이 대학의 학생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채플에 참석함으로써 서양 사상과 문화를 익히는 창구 역할을 하였다. 칭화대학 학생들은 꾸준히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중국의 새 역사 창조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
하지만 5․4운동이 일어난 후 학생운동의 기류는 급격하게 바뀌게 되는데 즉, “반크리스천학생연맹(anti-Christian Student Federation)”을 만들어 1922년 WSCF 중앙위원회 겸 대륙 대표자 회의를 방해하였으니 1907년의 도쿄 대회와는 딴판이었다. 북경회의는 아무런 환영사도 없이 다만 긴장된 위기 속에서 회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인 김필례 여사는 북경대회의 인상을 이렇게 글로 남겼다. “나는 이 대회에서 흑인을 처음 보았다. 이 대회의 흑인 강사인 킹(Willis King) 박사가 연단에 올라섰을 때 미묘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가 과연 다른 강사들처럼 우리에게 유익한 연설을 할 수 있을까?라는 조바심을 가지고 그의 강연을 경청했다. 그러나 이는 기우였다. 그의 강연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도록 만든 훌륭한 강연이었다. 인종이 다르다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북경대회 참가자들 간에 서로의 긴장을 해소하고 크리스천으로서의 한 형제요 자매라는 뜻으로 “하늘 아래 한 가족(Below Heaven, One Family)”이라는 대회 주제를 내걸었지만 중국 사람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인도 사람과 영국 사람, 필리핀 사람과 미국 사람, 일본 사람과 중국 사람,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 독일 사람과 프랑스 사람 등으로 그룹을 나누어 한 가족이라는 개념에 따라 서로 하나임을 확인코자 하였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식민주의자들에 의해서 고통을 겪는 이들로써는 국제문제가 곧 크리스천의문제와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북경대회는 주변 상황이 워낙 달라졌기 때문에 무엇 하나 뚜렷하게 결론은 짓지 못하고, 다만 크리스천의 우애를 다짐하는 정도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 후 1928년 인도의 마이소에서 WSCF 중앙위원회가 열렸으며, 세계적 경제 공황을 겪은 처지에서도 1933년 인도네시아의 자바에서 제 1차 “아시아기독학생대회”를 개최하였다.
북경대회에서는 구(T.Z. KOO)라는 중국 지도자가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WSCF 실무자로 뽑혀 1925년-1947년까지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된다. 이 분의 뒤를 이어 팅(K.H .Ting)주교가 임명되어 제네바에서 일하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조국이 공산화되자 국제기구의 일을 버리고 귀국해서 교회와 국가와의관계를 새롭게 수립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이 후 주목할 만한 에큐메니컬 세계대회는 1938년 마드라스 근교의 탐바람에서 열렸던 세계선교대회를 시작으로 1958년 도쿄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교교육대회, 1961년 뉴델리에서 세계협의회 제 3차 총회, 1972년 방콕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주제:Salvation Today)와 1990년 서울에서의 세계선교대회(주제: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등을 대표적인 모임으로 꼽을 수 있겠다. 물론 YMCA와 YWCA 그리고 WSCF 등도 중요한 세계대회와 총회 그리고 정책 관련 모임을 아시아에서 개최하였다.
세계 최초의 지역 에큐메니컬 기구
서방 선교사들에 의해서 세워진 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은 파송을 받은 그들의 교단이나 선교단체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다. 모트는 아시아교회의 현황을 둘러보기 위해서 1912년 10월부터 1913년 5월까지 아시아 여행을 하게 된다. 그는 각 나라 교계 지도자들을 만나본 겨로가 ,나라마다 기독교연합회(NCC)와 같은 형태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시아 각국의 교회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지역 에큐메니컬 협의체도 꼭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얍(Yap Kim Hao)은 이렇게 증언한다. 1938년 마드라스 근교 탐바람에서 개최된 세계선교대회에서는 세계선교협의회(IMC)극동아시아 사무국 설치의 필요성을 집중적으로 토론하게 된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소강상태를 겪다가 1946년 IMC 회의 때 극동아시아 사무국 설치에 합의하게 된다. 1947년에는 정식으로 사무국 설치에 도립하게 되고, 인도의 마니캄(Rajah B. Manikam)을 의장으로, 그리고 중국의 륭(S.C. Neung)을 서기로 뽑아 아사기 교회의 일치와 협력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이후 1948년 마닐라에서 계속적으로 몸임을 갖게 되는데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한국 그리고 태국 대표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닐(Stephen Neill)이 이 모임에 참석하여 또 하나의 에큐메니컬 지역 기구의 탄생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에큐메니컬 운동은 WCC를 중심으로 제네바가 주도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입장을 강력히 피력하였다.
1949년 중국의 항저우에서 계속 모임을 가질 예정이었지만 정치적인 현실로 말미암아 방콕에서 회집하게 되었다. 36명의 아시아교회 대표들이 모여 아시아만의 케뮤메니컬 기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하고, 마니캄을 IMC 동아시아 간소로 뽑았다. 그는 1954년 홍콩에서 아시아 에큐메니컬 선교협의회가 조직되면서 실무 책임자로 일한 후 1956년 인도 루터교의 주료로 임명되어 WSCF 부총무인 초탄(U Kyaw Than)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떠나게 된다.
초탄은 미얀마 출신의 평신자로 기독학생운동의 지도자인데, 아시아 에큐메니컬 지도력 훈련 프로그램을 주도하였고, 1955년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 아프리카 대회(Afro-Asain Conference)의 영향력을 받아 아시아기독교협의회의 조직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초탄은 새로 태어날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조직 간사로 활약 하면서 1957년 3월 17일-26일 까지 인도네시아의 프라팟에서 CCA의 전신인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EACC)조직위원회 확대 모임을 주선하게 된다. 아시아교회의 선교적 과제에 힘을 모으기 위해서 모인 프라팟 대회는 수카르노(Soekarno)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10만 명의 바탁 지역 교인들이 참석해서 “교회의날 ”행사를 크게 가진 바 있다. 수카르노는 “Gotong Royong” 즉, “협동”을 강조하면서 , 아시아기독교협의회도 바로 협동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는 강연을 함으로써 큰 인상을 남겼다. 또한 그는 인도네시아 건국이념인 판차실라(Pancasila)를 거듭 강조했다. 판차실라는 5대 지주를 말하는데, belief in God, nationalism, humanism, democracy, and social justice를 국가의 이념적 바탕으로 삼아 통치한다는 각오가 담겨진 국가정신 비슷한 내용이다.
프라팟 조직대회에는 아시아의 15개국에서 107명의 총대가 참석하였는데 서방교회 대표는 8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중국 대표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서 불참했다. 개회 설교는 나일스(D.T. Niles)가 하였고, 강연은 파키스탄의 레이(Chandu Ray)와 인도의 토마스(M.M Thomas)가 각각 종교의 다양성과 기독교의 경건성을 역설하면서 새롭게 발전하는 아시아에서의 기독교적 선교 과제를 함께 풀어가자고 호소하였다. EACC 조직 대회는 “우리는 갈라지만 할 수 없는 일도 함께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We can do together what we cannot do separately)”는 말로서 아시아 교회의 단결을 강조하였다.
프라팟 대회에서는 필리핀의 소브리페나(Enrique C. Sobrepena)대주교를 의장에 그리고 인도의 모세스(D.G Moses)를 부의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스리랑카 출신의 나일스(D.T niles)를 총무로, 초탄(U Kyaw Than)을 부총무로 그리고 뉴질랜드 출신의 브래쉬(Alan A. brash)를 교회 구호 전담 실무자로 영입했다.
WCC의 비서트 후프트 총무는 EACC 창립에 우려를 가졌던 분이었으나 반둥대회가 비동맹국가 간의 세력을 형성하는 힘의 결집체라면 EACC는 아시아교회가 선교를 함께 해 나갈 에큐메니컬 기구라는 점에서 도리어 다행스럽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렇게 해서 EACC는 창립 총회 준비를 마침으로써 세계 최초의 지역에큐메니컬 기구(Regional Ecumenical Organization)로 출범하게 되었다. EACC의 탄생은 아시아 교회가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에큐메니컬 정신을 구현하는 기구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주게 된다.
프라팟 대회의준비를 마친 EACD는 1959년 5월14-26일까지 쿠알라룸푸르에서 창립총회를 갖게 된다. 참가국의 범위를 파키스탄을 서남의 끝으로, 일본을 동북의 끝으로,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남쪽의 끝으로 정하고 14개국으로부터 48개 교회 대표들이 모여 창립 총회를 열었다. 아프리카와 유럽 그리고 미국 교회 대표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총회의 주제는 “Witnessing Together”인데 복음의 증거를 함께하는 것이 아시아기독교협의회의 과제임을 시작부터 부각시켰다.
창립총회장에는 큰 현수막에 다음과 같은 성구를 달아 놓았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살전2:5)
EACC 창립 총회 때가 바로 성령 강림주간이어서 많은 참석자들은 새로운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기도했는데, 이는 마치 예수의 제자들이 체험했던 성령의 뜨거운 경험을 연상케 했다.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EACC)는 창립준비로부터 창립총회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복음의 증거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다하고자 다짐하는 아시아 교회의 결단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모트 기념 강좌를 총회 기간에 마련하고 비서트 후프트와 뉴비긴으로부터 다섯 차례 강연을 듣게 되었다. 이들은 한결 같이 복음이 아시아의 토양에 잘 자랄 수 있기를 바라는 동시에 세상의 소금 역할을 하는 아시아 교회가 될 것을 역설하였고, 아시아 토양은 타 종교와 여러 문화가 편재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서로 힘을 합쳐 선교할 수 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아시아 교회는 교회만의 게토(Ghetto)를 벗어나 아시아의 혁명적 변화에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새로운 세속적 거룩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 후 1964년과 1968년에 방콕에서 총회를 개최하였고 나일수가 1968년 총무를 사임하게 되자 부총무였던 초탄이 총무로 피선되어 1973년 싱가포르 총회 때까지 직무를 수행하게 된다.
1973년 싱가포르 총회는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EACC)를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로 이름을 바꾸었고 말레이시아 출신의 얍 킴 하오를 총무로 선출하게 된다. 얍 총무는 방콕에 있던 사무국을 싱가포르로 옮겨 CCA를 탄탄하게 자리 잡게 한다. 그는 1977년 페낭 총회와 1981년 방갈로 총회를 거쳐 1985년 서울 총회 때까지 총무로 봉직하게 된다.
1985년 서울 총회는 한국의 박상증 목사를 총무로 선출하였고, 박 총무는 1990년 마닐라 총회 때까지 재직했다. 그러나 CCA본보는 1987년 12월 싱가포르 정부로부터 추방령을 받게 되어 총무단은 오사카로, 그리고 나머지 프로그램부서는 홍콩, 마닐라, 쳉마이 등지로 분산되어 활동을 하게 되엇다.
1990년 마닐라 총회에서는 파키스탄 출신의 사무엘(John Victor Samuel)주교가 총무로 선출되었고 그는 1995년 콜롬보 총회 때까지 CCA를 섬겼다. 사무엘 총무는 네 곳으로 나뉘어 있던 사무실을 홍콩으로 한데 모으기 위해서 홍콩의 루터교 신학교를 매임해서 CCA 본부를 마련하였다.
1995년 콜롬보 총회는 총무의 선출을 총회에서 할 것이 아니라 중앙위원회에서 하도록 헌장을 개정했는데 이는 총무 선거 때문에 일어나는 정치적 부작용을 없애려는 시도라 하겠다. CCA중앙위원회가 모여 처음으로 선출한 총무는 필리핀 출신의 카리뇨(Feliciano V. Carino)이고 그는 2000년 토마혼 총회 때까지 일하였고 새로 선출된 중앙위원들과 함께 2000년 12월 홍콩에서 모인 중앙위원회에서 안재웅을 총무로 선출하고 사임하였다.
안 총무는 2005년 쳉마이 총회 때 중앙위원들과 함께 태국 출신의 프라웻(Prawate Khin-arn)을 총무로 뽑고 얼마 동안 일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쳉마이 총회는 현재의 홍콩 CCA본부를 쳉마이로 옮기기로 의결하였다.
CCA는 아시아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이슈들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예를 들면, 전통문화와 종교 간의 갈등, 종교의 정치 도구화, 가난과 각종 질병, 소외와 차별, 서방 의존 현상 등을 극복하기 위해 CCA는 해방의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 정의와 평화를 이룩하는 교회, ㅗ하해와 치유를 이루어 가는 교회,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등을 솔선수범하는 교회, 그리고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여러 부서를 중심으로 선교의 시ㅐ적 사명을 다하고자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