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전 4:7-12, 엡 4:11-16, 마 13:24-30)
성탄절 둘째주일
설교문
[2025년 향린교회 세움 예식]
오늘 주보 목회마당에는 2025년 우리 교회 목회와 선교를 위해 직책을 맡으신 분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받았지만, 그리스도교 교회는 오랜 전통 속에서 제도와 직분을 두어왔습니다. 우리 향린교회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장로회의 직분과 우리 교회만의 직책을 갖추고 한 해의 교회 살림을 해 나갑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새해를 맞아 십자가를 달면서 우리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에는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마땅히 길러야 할 그리스도교적 영성뿐만 아니라,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향한 선교에도 정성을 다하겠다는 다짐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옆에 우리 십자가를 다는 예식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마가 8:34) 주님 말씀을 기억하며 올해도 내 십자가를 지겠다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첫 교회 교인들이 말했던 믿음, 그리스어로 '피스티스(πίστις)'는 로마제국에서 '황제에 대한 충성'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로마 황제와 로마제국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예수께 충성하겠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바로 제국이 지향하는 돈과 힘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것이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 즉 생명과 평화, 참 자유와 섬김, 그리고 상생과 감사의 삶을 살고, 그런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삶을 이루기 위해 바로 직분과 직책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은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하나님이 불러 세워 주신 사람들의 다양한 은사가 나옵니다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특별한 몇 직분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 예언자, 복음 전도자, 목사와 교사입니다.
우선 사도들은 예수의 첫 제자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대를 세운 분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도들의 증언 위에 우리의 신앙을 세웠습니다. 우리는 2000년 전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를 걸었던 사도들이 전해 준 대로 믿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기서 사도들이란 사도들의 증언 곧 성서로 보아도 문제가 없습니다. 즉 교회의 기초에는 사도들의 증언인 성서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를 가르치는 것은 신학적 전문성을 가진 목사의 임무이지만, 목사와 함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깨닫고 살아내는 일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두번째로는 예언자들인데 이분들은 교회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살피고 주님이 교회에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했던 분들입니다. 성경이 원칙과 기준이라면, 예언자들은 그 기준에 따라 삶의 구체적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 지침을 알려준 이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민주화된 시대에 전문성을 가진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기 분야에서 가장 알맞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또 누구나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피고, 귀를 세우고 들으면 일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예언의 말씀은 과거처럼 특별한 신탁을 받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에 깊이 들어가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 일에 전문성을 지닌 이들이 함께 숙의(熟議) 과정을 거칠 때 선포될 수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소식을 널리 전해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던 분들입니다. 목사와 교사는 설교와 가르침, 성서에 대한 전문적 해석을 통해 교회를 지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포문을 연 루터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목사와 교사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만인 사제직을 주장합니다. 교회 내 직무에서는 목사가 곧 성서 교사이지만, 세상으로 나아갈 때는 모든 교인이 복음 전도자로서 성서 교사이며, 목사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향린교회 여러분 모두가 이 세상에서 복음 전도자와 목사, 교사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주님께서 왜 직분자를 세우고 은사를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직분 맡은 자와 은사를 받은 이가 해야 할 첫째 사역은 성도들을 준비시키는 일이라 말합니다. 성도들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따로 떼어 놓으신 백성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 중에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들,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세상과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기 위해 준비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준비하다"(kataρtiσmoς)라는 말은 "훈련시키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장비를 갖춰주다"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회복하다", "수리하다", "완성시키다"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러 갈 때 그물을 깁는데, 여기서 "깁는다."라는 말도 바로 이 말을 씁니다(마가 1:9). 즉 교회에서 직책을 맡은 이들은 교인들이 교회와 세상에 봉사하도록 모든 장비를 갖춰 주고 훈련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이 훈련하고 준비되어 봉사의 일을 하게 한다고 했으니, 우리는 자기를 돌아보며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어떤 봉사를 해 왔는가? 봉사할 준비가 되었는가? 준비가 되지 못했다면 어떤 장애물들이 있었는가? 우리 교회는 특별히 평신도 교회라는 창립정신도 있는데,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목회를 하면서 극복해야 할 과제는 또 무엇인가? 우리 향린교회의 앞날은 교인 전부가 교회와 세상을 향한 봉사, 즉 디아코니아 사역을 잘 해낼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또 주의 깊게 새겨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13절부터 16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인의 목표와 그 목표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격의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 경지는 '나사렛 청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했던 경지였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이 어리고 여리면 나쁜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세상 풍조에 흔들리고 이리저리 밀려다닙니다. 저와 여러분은 함께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지 않는다고 구원을 못 받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여전히 어리광이나 부리는 자로 서야 되겠습니까? 장성한 믿음을 지닌 어른의 모습으로 그래서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스스로 알아서 부모님을 모시고 섬기면서 제 앞길을 펼쳐 나가는 자녀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지 않을까요? 계속 달라고 투정만 부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성장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선 모든 면에서 성장하려면 다양한 목회와 선교 사역을 몸소 해보아야 합니다. 신도회, 부서, 위원회와 소모임에 참여하고, 성서 공부와 봉사 활동, 선교활동을 하면서, 생각이 다르고, 일하는 방식이 다른 교우들과 협력하는 법을 배우고,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깨달으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워 나갈 때, 우리는 모든 면에서 자라게 됩니다.
주님의 교회를 세울 때 핵심적인 가치는 역시 사랑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사랑 안에서만 주님의 몸이 건설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바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속에서 가능했습니다. 저는 우리 향린교회가 매우 진지하게 다가가서 깊이 있게 매진해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라." 오늘날은 저마다 자기가 진리라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주장하는 자기는 참이지만 남은 거짓이라는 생각이 지나치면 혐오 가득한 언어와 거친 말들이 쉼 없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진리 주장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무례하지 않다고 했는데, 놀랍게 사랑의 종교라고 자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혐오를 남발하는 대표적인 사람들로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진리를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는 신념 때문입니다. 자기-고백적 언어라는 특징을 지닌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어느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으로 바꿉니다. 이 부분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가? 자기를 믿는가?]
우리를 비롯하여 대다수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기도할 때, 찬양을 드릴 때, 그리스도인들은 진실로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번 잘 생각해 봅시다. 정말 그럴까요?
사실 우리가 기도하고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만난 하나님', 즉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저마다의 삶에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어떤 계기가 있어서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믿게 됩니다. 어떤 사건을 경험하고 그 사건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하나님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을 우리가 만났다면 하나님이 우리가 인식하고 만날 수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축소 시켰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의 옷자락 하나를 살짝 만진 것이고, 그분의 단면을 언뜻 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그 하나님은 온전한 하나님 전체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만난 하나님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의 모양을 통해서 하늘을 보듯이(坐井觀天), 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피조물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우리가 만난 하나님,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하나님"인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면, 그 위기 상황을 빨리 탈출하려고 하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아프다거나, 취직이 안 된다거나, 하는 일이 자꾸 꼬일 때, 누구나 낫기를 바라고 더 좋은 상황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상황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정말 문제들이 해결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칭송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은 체험을 들려줍니다. 이른바 간증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어려움을 겪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기도를 해도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계속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을까요? 우리가 욥과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우리는 계속 신앙을 지킬까요? 만약 자기 문제해결의 관점에서, 그런 체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하나님 전체를 믿은 것일까요? 아니면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만을 믿은 것일까요? 자기 문제 해결자로서의 하나님을 계속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지금 저는 여러분에게 매우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가 믿고 싶은 대로 하나님을 믿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판적으로 성찰해 보면 사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싶었던 그것, 즉 내 자신의 신념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부터 더 큰 문제가 이어집니다. 내 신념을 믿었지만, 그 신념이 자기 신념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믿은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신념을 믿으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은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내세우면서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상식에 어긋나도, 목회자의 설교를 들어도, 성경에 쓰여 있어도 그런 것들은 쉽게 무시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바로 우상 숭배라고 불러왔습니다.
종교개혁자 깔뱅이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자기가 하나님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지만, 사실은 자기의 뜻을 관철합니다. 그래서 현실을 기만하는 신앙은 언제나 자아도취와 자기 숭배에 빠지고, 놀랍게 신앙이 철저할수록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파괴하는 매우 역설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우리는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었던 그 습관을 넘어서고, 남이 믿는 하나님, 대대로 믿음의 선조들이 믿어왔던 그 믿음과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여러 의견을 듣는 민주적 절차와 신앙의 비판적 성찰을 통해 오늘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지요.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함인데, 밑줄을 그은 성경 구절들을 모으면 하나님보다는 사실 자기가 보입니다. 보통 내가 좋아하는 구절, 내게 감동이 된 구절에만 밑줄을 긋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그동안 밑줄을 긋지 않은 부분을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내가 미처 몰랐던 하나님을 만나고, 나를 넘어서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숙한 신앙이 되는 데는 신중함과 기다림, 오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서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밭에다 분명 좋은 씨를 뿌렸는데, 보니까 밀 사이에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원수가 농사를 망치려고 가라지 씨앗을 뿌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뿌리가 밀보다 튼튼하고 독이 있는 이삭을 맺으며, 60센티미터까지 자라는 독보리인데, 밀과 함께 뿌리가 엉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확할 때 이 독보리가 밀과 섞이면 나중에 배탈이 나고 몸을 상하게 하기에 반드시 제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라지를 발견한 종들은 바로 뽑아버리자고 제안하는데, 주인은 추수 때까지 기다리자고 합니다. 줄기가 자라고 이제 곧 이삭이 패고 낟알이 들어찰 무렵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손해가 생기기 때문에 일단은 내버려두라고 합니다. 독보리는 검은색 열매를 맺는데, 그때가 되면 확실히 밀과 구분됩니다. 그때 뽑아도 늦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초대 교회 공동체의 어떤 상황을 반영합니다. 교회에는 복음대로 살아가는 성숙한 교인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덜 성숙하면 공동체에서 말썽을 일으키고, 무례한 언행과 소란과 소동, 다툼이 잦아지면 공동체 유지를 위하여 그런 사람들에 대한 징계가 논의되곤 합니다. 오늘 종들처럼 흥분하면서 뽑아버리자는 사람들도 생겨납니다.
그런데 오늘 주인의 자세는 매우 신중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느긋합니다. 기다릴 줄 압니다. 신경질을 내거나 분별없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신앙공동체라면 다수의 참된 신앙인이 좀 부족한 형제자매를 더 품어야 한다는 무언의 권고로 들립니다. 결국 신앙의 사람은 열매를 맺을 것이고, 열매가 없는 이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사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모든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내부 갈등을 다룹니다. 가족에서부터 직장, 사회에 이르기까지 갈등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심지어 한 개인 안에서도 두 가지 다른 생각이 들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곤 합니다. 이러한 갈등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상대를 파괴하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고, 변화가 필요한 공동체의 현 상황을 인식시키고 새롭고 더 나은 공동체가 되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잠재된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날 때, 그것을 풀어가는 가장 현명한 길은, 오늘 본문의 주인과 같이 "함께 자라도록" 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갈등이 서로에게 상처로 남게 하기보다, 함께 성숙하는 기회가 되게 하자는 거지요. 자연 세계에서는 밀과 가라지가 분명하게 구별될 수 있겠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모두를 품으려는 마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가 옳고, 남이 그르다고 생각하기 쉽고, 제 눈의 들보보다는 남 눈의 티가 더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에게서도 이런 부분에서는 가라지이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튼실한 밀 이삭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 기독교 변증가들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교회에서는 밀이 가라지가 되고, 가라지가 밀이 되기도 한다고 하였고, 그래서, 밀인 사람은 수확 때까지 견뎌내고, 가라지인 자들은 수확 전까지 반드시 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이 지금은 밀과 같은 존재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자신도 가라지처럼 행동할 수 있기에 늘 조심하고, 교인 중에 어떤 사람이 가라지 같은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언제든 바뀔 가능성을 믿고, 사랑으로 견책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바로 사랑과 정의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정의는 필요합니다. 옳고 그른 것은 분명히 밝히고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를 실천할 때 늘 사랑의 마음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얼마든지 회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노력해야 하지요. 자기를 기준으로 남을 나쁘다 정죄하고 그들을 제거하는 것은 사랑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랑을 말하면서 오래 참는 것으로 시작해서 견디는 것으로 끝내는 것입니다. 형제자매가 자기 잘못을 깨닫고 고칠 수 있도록 참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이미 추수 때가 되었고, 독을 품고 있는 검은 열매인 내란 수괴와 그 세력들을 단으로 묶어서 불태우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대 악과 싸우다 보면 나도 모르게 악에 물들 위험이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불의를 향해 뿜던 분노가 믿음의 형제자매들의 작은 실수에도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거대 악과 맞서 싸울 때와 믿는 가족들의 실수와 잘못을 고쳐줄 때의 자세는 달라야 합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전도서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때에 맞게 적절하게 응하는 시중(時中)의 지혜도 갖춰야 합니다.
[마시멜로 실험과 인내하는 힘]
선생님이 4살 된 아이들에게 마시멜로가 한 개 들어있는 접시와 두 개 들어있는 접시를 보여줍니다. 지금 먹으면 한 개를 먹을 수 있지만 선생님이 돌아올 때까지 먹지 않고 있으면 두 개를 주겠다고 합니다. 이제 마시멜로가 하나 들어있는 그릇을 아이 앞에 남겨놓고 방에서 나갑니다. 선생님이 나갔다 들어오는 15분 동안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먹어버리거나, 참다 참다 중간에 먹어버리거나, 끝까지 참고 기다리거나.
마시멜로 실험을 하였던 미셸(W. Mischel) 박사는 1966년에 만났던 653명의 네살배기 꼬마들을 15년 후 십대가 된 다음에 다시 만납니다.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오래 참은 아이일수록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삶 전반에서 참지 못한 아이들보다 훨씬 우수했고, 대학입학 시험(SAT)에서는 또래들에 비해 뛰어난 성취도를 보였습니다. 인내력을 발휘한 꼬마들은 이후 성공한 중년의 삶을 살게 되지만, 인내하지 못한 꼬마들은 비만, 약물중독, 사회 부적응 등의 문제를 가진 어른으로 살게 됩니다.
지금 하는 일이 매우 재미있지만 그 일을 딱 그만둘 수 있는 힘, 현재 하는 일이 너무너무 지루하지만 그것을 계속할 수 있는 힘! 기다릴 수 있는 힘, 참는 힘을 자기 통제력, 절제력, 또는 만족 지연력(delay of gratification)이라고 부릅니다. 마시멜로 실험 결과는 어릴 때의 만족 지연력이 어른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얘기합니다.
80년대에 한 가지를 바꾸고 다시 마시멜로 실험을 해보았습니다. 선생님이 나갈 때, 마시멜로 통의 뚜껑을 덮어 둔 것입니다. 그랬더니 평균 6분 이하를 기다린 아이들이 11분 이상을 기다렸습니다. 60년대 실험을 할 때에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보지 않으려고 자기 손으로 눈을 가리거나, 자기 머리카락으로 눈을 덮거나, 천장을 쳐다보거나 하는 행동을 스스로 만들어 냈고, 두 번째 실험의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이 마시멜로를 보지 않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15분을 견디지 못한 아이를 참을성이 없는 아이라고 명명하는 대신에, 마시멜로 그릇에 뚜껑을 덮어 주고, 어른이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두 배에서 네 배의 참을성을 지니는 아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인내력, 절제력, 통제력이 있는 아이 뒤에는 인내력, 절제력,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준 어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마시멜로 실험을 통해 믿고 따를 수 있는 신뢰 공동체가 있을 때, 훨씬 더 견디는 힘이 늘었다는 사실을 보았듯이, 우리 향린교회 또한 사랑으로 품어주고 기다려 주고 견뎌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직분을 만들고 직책을 감당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신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는 옛것과 새것을 골고루 간직할 줄 압니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며, 각각이 가진 장점을 두루 취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말씀을 바르게 읽고 실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올 한 해 저와 여러분이 하늘나라를 위하여 정확하게 훈련을 하는 한 해가 되길 빕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다를 것을 기대해 봅시다. 주님 가시는 길을 따라가면서 우리가 함께 주님의 마음을 느끼고 깨닫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그 언저리에 다다른 분도 있고, 아직 더 가야 할 분도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걸어간다면,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그 발걸음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면, 주님이 우리의 손길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지극히 사랑한다면, 그 마음에 주님이 언제나 계십니다. 우리들 모두의 발걸음에, 우리들 모두의 손길에, 우리들 모두의 마음에 주님이 언제나 깃들일 때, 우리 향린교회는 정말로 모두가 오고 싶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 향린교회를 통해 이 다중 위험 시대에, 위태로운 삶 한 가운데서도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올 한 해도 열심히 뛰어봅시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경지를 향해 나아갑시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보듬으며
함께 자라도록 힘써 봅시다.
*글/기사가 마음에 드신다면 베리타스 정기구독 회원이 되어 주세요. 회원가입 방법은 하단 배너를 참조하세요. 감사합니다.